소설리스트

19화 (19/40)


#19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검을 휙 던진 선이 상의를 훌렁 벗었다. 디는 하의까지 망설임 없이 벗는 선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돌아섰다.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했으면서, 수줍음도 많네, 내 알파는.

내심 웃은 선이 팔다리에 덕지덕지 걸친 무기 벨트까지 던져 버리고 상체를 세운 찰나였다. 하얗게 드러난 디의 등을, 자연스럽게 날갯죽지를 훑던 선의 눈동자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무사히 첫 발정기를 보내 성체가 되고, 1차 탈피에 성공한 우성 알파의 왼쪽 날갯죽지에 붉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토끼 모양이었다.

6. 이름

‘꼭 살아 주렴.’

날갯죽지를 바라보는 선은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혼란과 의문이 범람하는 눈동자는 외려 서늘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이상한 기척에 뒤를 돌아본 디의 눈가로 염려가 스쳤다.

“선?”

“…네, 디.”

“무슨 일이에요? 몸이 많이 안 좋은 거예요?”

“…….”

“선.”

더 지켜볼 수 없어 다가오려는 디를 만류하듯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한 선이 웃었다.

“디, 실은 제 몸이 아직 성치 않습니다. 물론 우성 알파인 디와 섹스하면 금방 회복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는 선이 미처 말을 맺기 전에 고개를 끄덕인 디가 외려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으나, 머릿속엔 온통 토끼 모양의 화상 자국뿐이었다.

죽은 게… 아니었어? 진짜… 스승님과 밤의…?

한쪽 팔만 달랑 들린 채 끌려가던 핏덩이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구역질 나는 알파 년의 마지막 핏줄이다. 통으로 구워 야들야들한 살맛을 볼까, 산 채로 얇게 저며 회를 쳐 먹을까?’

‘밤’을 닮아 맑고 커다란 회색 눈동자.

선은 제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저를 바라보고만 있는 디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선에게 남은 기억은 ‘밤’의 목소리와 향기, 따뜻한 온기와 다정한 목소리가 전부였다. 햇살 아래서 더 윤이 나던 은빛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며 선을 돌아보던 ‘밤’의 모습과 장난스럽게 빛나던 눈동자만이 흐릿하게 남았을 뿐, 막상 떠올리려 하면 눈, 코, 입, 이목구비의 어느 모양새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토끼는, ‘밤’이 선에게 주려고 직접 만들어 새긴 토끼는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토끼 귀 하나엔 ‘뫼’를 뜻하는 산 모양이, 다른 귀 하나엔 ‘밤’을 뜻하는 별 모양이, 그리고 한껏 웃는 얼굴은 ‘선’을 본뜬 것이었다.

기쁠 ‘선’.

그들이 선에게 지어 준 이름이었다.

“디.”

“…네.”

“안고만 있어도 될까요?”

선이 당장 떠나겠다는 말이라도 할까 봐 긴장한 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영 시원찮은 반응에 이해한다는 듯 웃은 선이 다시 말했다.

“탐탁지 않으시다면, 섹스해도 상관은 없….”

“좋아요, 선.”

“…….”

“나는 그게 더, 아니, 그것도 좋아요.”

“하….”

다급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디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 선이 두 손을 뻗었다.

“그럼 안아 줄래요?”

“네, 선.”

뒤늦게 안정을 찾은 디가 양팔을 넓게 벌려 선을 꼭 껴안았다. 청포도 향이 났다.

“낯서네요.”

“네?”

“나한테 섹스보다 포옹이 더 좋다고 한 상대는 처음이거든요.”

아니,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할 필요가 없는 상대들이었다. 어렸을 땐 실험체로, 좀 더 커선 수태 도구로, 백인부대의 부대원들은 각자의 발정기 때마다 매칭되어 서로의 의무를 다할 뿐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행위’에 불과했다. 그들의 페로몬은 어둡고, 난폭하고, 가끔 역겨웠다.

“선, 춥지 않아요?”

머리 하나는 더 큰 디가 알몸인 선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발끝이 들리자 아예 두 다리를 디의 허리에 감아 버린 선이 널따란 어깨에 뺨을 기댔다. 굵은 목덜미 너머 날갯죽지에 시선이 닿았다.

토끼. 산과 별과 선이 다 그려진 토끼.

“아기처럼 따끈따끈해요.”

“네?”

구석에 처박힌 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깨끗한 자리를 찾던 디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선의 숨결이 목덜미 가득 번지고 있었다.

“디 말이에요. 몸이 아기처럼 따끈따끈해요.”

“난로로 쓸 수 있을 만큼이요?”

“난로는 아니고, 담요 정도?”

“쓸모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네. 디는 그렇지 않아요.”

나직이 대꾸한 선이 망설이던 손끝으로 가만 디의 날갯죽지를 더듬었다.

“디, 여기에 토끼가 있는 거 알고 있습니까?”

“토끼요?”

“네. 토끼 모양의 화상 자국이 있어요.”

“거긴 원래 칼자국이 있었는데. 뒤에서 찔려서 관통한 자국이요.”

“희미하게 남았어요.”

얼굴을 들고 상체를 조금 뗀 선이, 날갯죽지를 관통해 들어왔을 자국을 찾아 디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여기도 살짝 남았네요.”

어쩐지 서운한 표정의 디를 알아차린 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다시 온몸을 기댔다. 그거 잠깐 떨어졌다고 뭘 서운해하는 거야. 씁쓸하게 웃으며 두 손을 디의 겨드랑이 밑으로 밀어 넣었다. 두꺼운 흉통 너머 넓은 등을 끌어안자 따끈한 체온이 정말 담요처럼 선을 데워 주었다.

“어릴 때 당한 것 같아요. 기억에 없거든요.”

계속해서 제 날갯죽지 근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거북해하는 대신, 좀 더 만지기 편하게 자세를 바꾼 디가 그나마 깨끗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구석에서 주워 온 옷을 선의 어깨에 둘러 주고 공들여 빚은 것 같은 등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위에 D라는 낙인이 찍힌 뒤엔 계속 쌓이기만 해서.”

디는 웬만해선 옷을 벗지 않았다. 목덜미부터 발목까지 광산에서 노리개 취급을 당할 때 빼곡히 쌓인 낙인을 본 상대는 디를 깔보거나, 불편해했다. 몸에 낙인을 찍는 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노예라는 확실한 징표. 거기까지 생각하다 선도 불편해할까, 슬쩍 벽에 등을 기대려는 디의 날갯죽지에 차가운 손끝이 닿았다.

토끼 위에 자상, 자상 위에 D라는 낙인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D를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던 선은 움푹 파여 선명히 매만져지는 표면에 눈썹을 떨었다.

“낙인은 어디서 찍힌 겁니까?”

“…….”

“디?”

“별로… 유쾌한 얘기가 아니라서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디의 속내를 읽은 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제가 찾아내면 되니까. 찾아내서 다 죽여 버리면 된다. 아니, 세상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고통도 있었다.

“광산에서요.”

그러나 이번에도 디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선이 거북해할까 걱정이 돼서 망설인 참이었다. 그래도 선과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 이렇게 서로를 마주 안고, 서로의 심장 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전신으로 스며드는 페로몬을 느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 좋았다.

실은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섹스할 때보다 회복이 더딘 것도 좋았다. 그러면 더 오랫동안 선과 온기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페로몬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선이 조금이라도 더 제 곁에 있어 줄 테니까.

“12구역과 붙어 있던 광산이요? 지금은 폭파되고 없는?”

“네. 거기 관리자들이 밤에 도박할 때 저 같은 애들을 판돈으로 걸었거든요.”

“…….”

“질 때마다 낙인 몇 개. 칼이든, 달군 쇠든, 아무거나. 선? 불편해요? 자세를 바꿀까요? 아니면 다른 얘기를….”

저도 모르게 몸에 들어간 힘을 뺀 선이 고개를 저으며 토끼를 매만졌다. 디가 자라면서 같이 자란 토끼는 제법 통통했다. 그 통통한 토끼를 관통한 칼자국도 같이 자랐지만, 같이 자란 것들을 덮을 만큼 크고 선명한 낙인이었다.

‘그게 아니라.’

‘보기 흉해서요.’

‘선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요.’

“디.”

“네, 선.”

“디의 추종자 중에 귀면탈을 쓴 작자가 뇌 기능에 문제가 있더라구요.”

밖에서 혼쭐이 난 뒤 줄행랑친 7구역의 약탈자를 말하고 있었다.

“왜요. 그 새끼가 선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돌변한 목소리에 진정하라며 디의 등을 토닥인 선이 입매를 끌어 올렸다. 살면서 이렇게 제가 다칠까, 혹여 누군가에게 해코지당할까 걱정해 주는 이는 없었다. 가족들이 몰살당한 그 밤 이후엔 그랬다.

어쩌다 작은 생채기라도 달고 들어가면, 어떤 놈들이 그랬냐, 대장군 체통도 잊은 채 칼을 빼들고 달려나가던 ‘뫼’와 그 곁에서 총을 장전하던 ‘밤’을 이 아이도 닮은 것 같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