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몇 년 전에 크게 당한 약탈자들은 부비트랩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 디가 책임지는 구역까지 쳐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구역을 벗어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그에 질색한 변경부대원들이 디와의 파견 순찰을 빼먹기 일쑤였다. 디 역시 누군가 저 때문에 죽어 나가는 게 싫고,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 매번 홀로 구역 순찰을 돌았다.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이 터지면 소란스러울까 싶어서 매일 밤 저와 선을 노리고 모여드는 날파리들을 구역 밖에서 해치웠는데, 역시 선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부비트랩 같은 걸로 붙잡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어 속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선이 회복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게 전부였다. 할 수만 있다면 사냥꾼의 의무도 내팽개치고 종일 선의 곁에만 붙어 있고 싶었다.
그러나 선의 안전을 위해선 사냥꾼의 의무에 소홀하지 않아야 했고, 제 발정기가 오기 전에 그를 회복시킬 약도 구해야 했다. 회복하면 떠나겠다는 선의 말을 흘려들은 건 아니었다. 선은 그런 사람이니까.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선이 떠나면 디도 사냥꾼을 관두고 떠나려 했다. 선의 뒤를 쫓는 건 바람의 흔적을 쫓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으나, 디는 선을 제 곁에 묶어 둘 욕심도 방법도 없었다.
그저 살리고 싶어서, 제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뿐이었다. 선생님이 포상을 허락하지 않으면 처형장으로 달려가 그대로 선을 안고 도주하려 했었다. 그 자리에서 전신에 총구멍이 나고, 사지가 잘려 나간다 해도 선만은 빼내고 싶었다.
생전 처음으로 제 존재가 기꺼웠다. 제가 아직 발정기도 치르지 못한 원형 알파라는 사실이 좋았다.
콰과광-!
부비트랩은 동굴마저 무너트릴 기세로 요란을 떨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을 빨리하려던 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선…?”
디는 오로지 냄새만으로 멀리서 기척을 드러내며 달려오는 사람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푸르른 하늘빛 페로몬이 어두운 동굴을 밝히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선명한 비누 냄새. 희미하게 맡았던 것보다 더 산뜻하고 깨끗한 냄새가 선에게서 확 풍겨 왔다.
“디.”
“선…!”
부비트랩 세 개면 산의 절반이 날아갈 수준이었다. 물론 완벽에 가까이 회복한 선을 다치게 하진 못하겠지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제 막 탈피를 끝내 갓 태어난 망아지 같은 모양을 하고도 저에게 달려오려는 디에게 손을 뻗은 선이 쏟아지는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디. 탈피를 무사히 마쳤군요.”
“왜….”
어쩐지 물기 어린 목소리에 의아한 선은 제 품에 파묻힌 디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탈피 후에 더욱 맑고 선명해진 회색 눈동자가 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왜… 아직 안 갔어요?”
“…….”
그 맹목적인 눈길에 잠시 말문이 막힌 선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선.”
재차 저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선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었어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본인이 더 인기인이라는 거.”
한 박자 늦게 이해한 디가 선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힘을 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방금 전까지 약탈자들을 상대하느라 신나게 날뛴 선은 체내 에너지가 최대치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이제 막 갓 태어난 우성 알파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부비트랩은 세 개만 터트렸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요.”
“…….”
선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차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디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도 보였다.
“나는….”
별 가루를 뿌린 듯 맑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내려다본 선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가 겨우 입매를 끌어 올렸다.
“디의 탈피가 잘 끝났는지 확인하러 왔어요.”
“…….”
“디가 너무 인기인이라 탈피 도중에 방해받을까 걱정됐거든요. 지금 보니 안 와도 될 뻔했지만요.”
“아니에요.”
“네?”
“…선이 없으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요.”
“그렇지만, 디.”
웃음기 어린 눈이 하얗게 질린 디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요. 여기까지 이렇게 혼자 잘 왔잖아요.”
“그건… 선이 걱정돼서….”
탈피 직후의 고통까지 떨쳐 내고 가까스로 걸어왔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어리광이 심하네요.”
“…….”
정답을 피하는 아이처럼 눈을 맞추지 못하는 디의 뺨을 감싸 고정시킨 선이 한숨 쉬듯 말했다.
“그래요, 디.”
어차피 밖은 난장판이었다. 먼 길을 나서려면 선도 회복해야 하고, 혼자 남게 될 인기 많은 남자 디도 탈피 후유증을 털어 내야 했다.
“탈피 후유증이 끝날 때까지만.”
짧게 숨을 삼킨 디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요.”
하지만 디한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순 없어요.
“성체가 된 걸 축하해요, 디. 싫다는 디에게 억지로 안게 한 걸 사과하진 않아도 되겠죠?”
“선….”
“그럴 줄 알았어요.”
외려 미안해하는 디의 뺨을 가볍게 다독인 선의 손길이 떨어졌다.
“그럼 이제 내 회복에도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겠네요.”
“…….”
“네, 이번엔 제대로 섹스하자는 이야기예요.”
일방적인 갈취가 아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성행위는 같은 형질의 알파와 오메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러기 전에 우선, 자리를 좀 옮기죠.”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따라오는 눈길에 난처하게 웃은 선이 저에게 안긴 디의 굵고 긴 팔을 제 목에 둘렀다. 그리고 끙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얼결에 같이 일어선 디는 최대한 체중을 싣지 않으려다가 “혼자 걸을 만한가 보죠?”라는 질문에 얼른 몸을 기댔다. 피식 웃은 선이 여전히 컴컴하지만, 저와 디의 시야에는 한낮처럼 밝은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 조금이나마 푹신한 곳은 없습니까? 사실 일주일 내내 딱딱한 돌바닥에서 디를 받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거든요.”
흠칫 놀라 저를 돌아보는 디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선에게선 부끄러움이나 불쾌감 같은 건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디 옷은 안 될 것 같고.”
알몸인 디의 상체를 슥 훑은 선이 이번엔 제 꼴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걸치고 있을 뿐, 너덜너덜한 건 비슷했다.
“내 것도 큰 효과는 없을 것 같네요.”
“제가….”
“네?”
“제가 밑에서 할게요.”
뜻밖의 제안에 디를 돌아본 선은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디, 오메가가 알파한테 박는 것보단 알파가 오메가한테 박는 게 더 효율적인 건 알고 있죠?”
“네…?”
“몰랐나 보네요. 디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넉넉한 게 아니니까요.”
그제야 선이 제 말을 오해한 사실을 깨달았으나, 디는 말뜻을 정정하지 않았다. 디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말엔, 섹스 후엔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속내가 깃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고 싶었다. 우성 알파로 잘 탈피되어서 다행이라고 안도한다면 너무 비열한 것도 같았지만. 디는 체중을 살짝만 더 실어 선의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었다. 푸르고 산뜻한 향이 나른하게 흘러들어와 디의 뇌수를 적셨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번쩍 눈을 뜬 디가 펄쩍 뛰듯이 선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도착했다며 디를 돌아보려던 선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디?”
“…….”
잔뜩 당황한 디는 속내를 조금도 감추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물끄러미 디를 바라본 선이 이번에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디.”
“아… 저는.”
‘썩은 내 나는 버러지 새끼!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역겨운 악취나 흘리는 부스럼 같은 놈!’
겨우 평상심을 찾은 디가 저도 모르게 제 냄새를 맡아 보려 코끝을 움찔거렸을 때였다.
“내 페로몬 향이 별로예요?”
그럴 수 있다며 한발 물러선 선이 애석한 얼굴을 했다.
“발정기엔 그런 거 챙길 정신 같은 건 없죠. 이해해요. 내 냄새가 역겹게 느껴진다면 지금 당장 사라져 줄게요.”
“그게 아니에요, 선.”
“그게 아니면요?”
“…….”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갈등하면서도 선이 지금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겁 난 디가 머뭇거리던 입을 열었다.
“내 냄새요….”
물러났던 한 걸음까지 두 발 다가선 선이 디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고 들숨을 쉬었다.
“좋은데요?”
처음으로 불신 어린 눈빛을 보이는 디가 재밌어 빙긋 웃은 선이 다시 한번 깊숙이 그의 향을 들이마셨다.
“청포도 향이에요.”
“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디와 눈을 마주친 선이 따뜻한 숨결을 토했다.
“이전엔 풋풋한 청포도 향이었는데, 성체가 된 디의 페로몬은 그윽하고 달콤하네요.”
“…….”
순식간에 붉어진 디의 뺨을 부드러이 훑어본 선이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내 취향이에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어서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