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F 등급의 솔이. 여섯 살 여자아이. 관리자들은 삐쩍 마르고 시커먼 여섯 살 여자애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이 변한 건 솔이가 오메가로 발현된 직후였다.
열성도 아닌 우성 오메가였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본인이 억제하지 않으면 베타들도 맡을 수 있었다. 이제 막 발현한 여섯 살 솔이는 당연히 제가 오메가인 줄도, 페로몬을 억제하는 법도,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게 변한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솔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변함없이 저를 냉대하는 디뿐이었다. 무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제가 쩔쩔맬 때마다 은근슬쩍 도움을 주고 가는 디,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왕자님처럼 잘생긴 디, 무뚝뚝하게 굴지만 친오빠처럼 다정한 디.
솔이는 제 주변의 변화에 겁을 먹고 움찔거리다가도 작은 손을 뻗어 거칠거칠한 디의 손을 꼬옥 붙들었다. 디는 마주 잡아 주지 않았으나, 뿌리치지도 않았다. 솔이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던 디에게 유난히 달라붙던 솔이 처음으로 관리자들에게 불려 가게 된 밤, 디는 솔이를 광산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디 역시 광산을 빠져나갔다. 어두컴컴하고 복잡한 광산에서 작은 두 몸을 빼내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지 디에겐 광산에서 도망가야 할 이유보다 남아야 할 이유가 더 컸다.
광산에서 아이 하나가 도망치면 남은 아이 다섯이 모두의 눈앞에서 맹수의 놀잇감처럼 구르다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디는 솔이를 빼내고 저는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미 2년이나 동고동락한 아이들과 정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저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12구역과 가까운 광산을 둘러싼 외곽엔 언제나 갓 생긴 시체들이 즐비했다. 거기서 솔이와 닮은 시체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손을 꼭 잡은 디와 솔이는 외곽의 하수구에 몸을 숨길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기만 했다. 마침내 광산을 벗어난 안도감에 몸서리칠 수 있게 됐을 때, 솔이는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다. 오메가의 냄새를 맡고 몰려온 약탈자들에게 산 채로 사로잡히기 전까지, 솔이는 작은 눈을 반짝이며 디에게 바짝 안겼다. 그리고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가 솔이의 머리채를 잡아 하수구 밖으로 빼냈다. 소리를 지른 디가 뒤따라 튀어 나간 순간, 번쩍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주먹을 휘두른 약탈자 중 하나가 귀찮은 어조로 툴툴거렸다.
‘웬 횡잰가 했더니 역겨운 버러지 새끼 하나가 들러붙었네.’
‘뭐 하냐? 형질자도 아닌 놈 짐만 되는 걸 뭐 하러 챙겨.’
‘변태한테 싼값에 팔아치워도 되잖아.’
‘그럼 네 자리에 네 놈 대신 저걸 태우든지.’
‘씨발, 말이 그렇다는 거지.’
‘빨리 처리하고 타. 저것들 다 얼어 죽기 전에.’
자리가 모자라다 못해 미어터지는 고물 트럭을 돌아본 약탈자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허리에 찬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쩍- 갈라진 디의 가슴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 더러운 오수에 섞였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버러지 같은 새끼! 이 버러지만도 못한!’
‘보자. 네가 저 버러지들 부모랍시고 나대던 쓰레기들을 죽인 놈이구나?’
‘애미 애비 잡아먹은 놈이라더니 형제들까지 잡아먹은 기분이 어떠냐?’
‘불운을 부스럼처럼 옮겨대는 놈이래도 이대로 얼어 죽게 만들 수는 없지.’
‘네 놈이 어린것들을 홀려 몰살당하게 만든 주범이구나.’
‘너 같은 놈들은 곳곳에 역병을 옮겨 다니는 종기나 다름없다. 긁어도 긁어도 부스럼이 나지 않게 싹싹 발라놔야지 뒤탈이 없지 않겠냐.’
아무렇게나 버려져 간신히 숨만 쉬던 디를 발견한 건 식량을 구하러 가기 위해 하수구에 숨어들었던 외곽민들이었다. 그들은 디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이 사는 마을로 데려갔다. 변변한 약도 없어 가진 생명력만으로 겨우 몸을 회복한 디는 말을 잃었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뒤 광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디는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대로 정신을 잃은 디는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애미 애비에 형제들까지 잡아먹은 놈.
불운을 부스럼처럼 옮겨 대는 놈.
어린것들을 몰살당하게 만든 주범.
곳곳에 역병을 옮겨 다니는 종기.
제 주제를 깨달은 디는 사람을 피해 다니며 마을에 일손이 필요할 때만 드나들었다.
어느 날 괴수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사람들을 벌레처럼 눌러 죽이고, 고깃덩이처럼 물어 죽일 때까지. 홀연히 나타나 그 괴수들을 무찌른 선생님을 마주하기 전까지. 디는 말을 못 하고 말귀도 잘 못 알아듣는 행세를 하며 살았다.
‘네 이름은 뭐니?’
‘부스럼이요.’
‘부스럼이 무슨 뜻인 줄 아니?’
‘무슨 뜻이에요?’
‘종기, 살아 있는 것을 좀먹는 세균이란다.’
‘…….’
‘사람에게 붙일 만한 이름이 아니지.’
‘그렇지만 다르지 않은걸요. 내 이름을 지은 사람이 아주 똑똑한가 봐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럼 디라고 부르세요.’
‘그건 무슨 뜻이니?’
우물쭈물하던 디가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떠밀려 비틀거린 순간이었다. 가볍게 디를 잡아 세운 선생님이 입을 닫았다. 제가 뭘 또 잘못했나 싶어 눈치를 보던 디는 선생님의 시선이 제 날갯죽지에 꽂힌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디의 옷은 누더기였고, 칼날에 수없이 긁히고 찍힌 자국은 목덜미에도, 등에도, 날갯죽지에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디.’
‘…네.’
‘세상엔 소중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상대에게 부르는 호칭이 몇 가지 있단다.’
그래서요? 묻고 싶은 얼굴로 선생님을 올려다보았지만, 디는 함부로 버릇없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디의 오물투성이 뺨을 가볍게 감싸 안은 선생님이 말했다.
‘Dear.’
‘…….’
‘네 이름은 그런 뜻인 것 같구나.’
탈피를 마친 디가 눈을 떴다.
“선생님….”
동굴은 평소처럼 어두컴컴했으나 탈피를 마치고 성체가 된 디의 시야는 밝았다. 이윽고 콰광- 온 산을 뒤흔드는 진동에 몸을 세운 디가 일어선 자리엔 고통스러운 탈피의 흔적만이 남았다.
오메가와 알파가 긴 발정기를 함께 보낸 증거이자 표식이기도 했다.
부비트랩을 건드린 건 7구역의 약탈자들이었다. 귀면탈을 뒤집어써 본인들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들이 대뜸 원하는 바를 외쳤다.
“‘미친 귀신’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네놈부터 쳐 죽이겠다!”
“‘미친 귀신’이 누군지 알려 주는 게 먼저 아닙니까?”
기척을 쫓아 주위를 살핀 선이 앞장선 귀면탈에게 정중히 대꾸했다.
“네놈을 가져간 사냥꾼 디 말이다! 그 자식을 도륙 낸 뒤 내 너를 공장으로 끌고 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해해 주겠다!”
“자기소개는 필요 없겠군요.”
“반역자 오메가 선! 항복하고 전향하면 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나는 사냥꾼 디의 소유입니다. 본인이 한 말조차 기억 못 하는 걸 보니 뇌 기능에 문제가 있나 보군요.”
“주제도 모르는 천박한 오메가 같으니라고! 네놈에게 난도질당해 죽은 내 동료만 해도 수백 수천이다! 그걸 덮고 동료로 삼아 주겠다는데 그따위로 지껄여? 그렇다면 좋다! 네놈을 산 채로 끌고 가 홀딱 벗겨 똥구멍을 까발려 주겠다! 네놈을 씹어 죽이지 못해 눈이 벌게진 놈들이 정액과 오줌을 번갈아 갈기기만 할 뿐이냐? 네놈 배가 터질 때까지 알을 쑤셔 넣고 내장을 밟아 으스러뜨려 주마!”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려면 오늘 하루는 바쁘시겠네요. 저를 산 채로 붙잡고, 디까지 도륙을 내야 할 테니까요.”
숫자는 40여 명.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걸로 보아 저쪽에서는 디가 숨은 동굴의 위치도, 곳곳에 설치된 부비트랩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혹시 몰라 다른 쪽으로 돌아 나오길 잘한 것 같다. 집에서 여기까지 페로몬을 쫓으며 살펴본바, 한 번이라도 부비트랩이 터진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평소 저들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디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지금에서야 ‘미친 귀신’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상대를 쫓아 우르르 몰려온 건 디가 원형 알파라는 사실이 알려져서일 터였다. 발정 주기도 대충은 눈치챘다는 뜻이고.
물론 제 목숨을 걸 정도의 배짱과 진지함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선생님이 상대라도 해 주셨겠지만, 참 무모한 짓을 했습니다, 디.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탈피하는 중에도 애원하듯 저를 붙잡던 디의 눈동자를 애써 지운 선이 연검을 뽑아 들며 빙긋 웃었다.
“먼저 저부터 산 채로 잡아 보시죠.”
“허세다! 속죄 주간을 보낸 지 한 달도 안 된 새끼야!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어!”
동료들을 독려하듯 악을 쓰는 귀면탈을 바라본 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선공했다.
“제 허세도 곧 밝혀지는지 볼까요?”
저들이 부비트랩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디의 실력이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알파의 페로몬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우성 오메가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7구역은 형질자들을 짐승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차별자들이 세운 도시니까. 선에게 전향을 요구한 것도 동료로 삼기 위해서가 아닌 회유나 고문으로 선생님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서였다.
쨍하니 올라붙은 태양이 길을 밝혔다. 우거진 나무 사이를 올려다본 선이 디에게 필요한 시간을 짐작해 보았다. 얼굴부터 상체까지 피부가 유리되었으니,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더 걸릴 것이다. 수적 열세인 선은 원형 알파인 디가 오랫동안 공들여 설치했을 부비트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콰광-!
연이은 진동에 동굴을 빠져나가던 디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다잡았다. 이건 부비트랩의 반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