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디… 정말 나를 복상사 시킬 생각은… 헉-! 아… 니죠? 흐아!”
이성이 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 어린 알파의 아니, 이제 성체가 될 알파의 등덜미를 보듬어 안은 선이 낮게 한숨을 쉬며 허벅지를 더 넓게 벌렸다.
“아픈 건… 읏! 흐윽! 흣! 디… 아픈 건 좀 괜찮나요…?”
이번에도 디에게선 아무런 답도 반응도 없었다. 디는 그저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을 쥐어짜고, 전신을 잡아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좁은 동굴 안엔 오로지 흐느낌 같기도, 비명 같기도 한 선의 신음과, 헉헉 발정 난 알파의 거친 숨소리, 젖은 몸이 거세게 맞부딪치며 튀어나오는 마찰음뿐이었다.
디. 내숭쟁이라고 놀리면 이번에도 울 건가요?
물론 디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선은 사라질 테지만. 제 질문에 피식 웃은 선은 아랫배가 늘어나는 느낌에 아아, 진저리를 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정액 섞인 오줌 줄기를 뿜어내며 까무러치는 선을 꽉 끌어안은 디가 성기 끝을 주먹만큼이나 부풀렸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노팅이었다. 이러다 배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 법도 했으나, 이미 선은 의식을 잃은 채였다.
산 전체를 뒤흔든 폭발음에 정신을 차린 선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밖의 소란과는 달리 빛 한 점 들이치지 않아 캄캄한 동굴 내부는 침입자 하나 없이 휘발되지 못한 열기로 한껏 달아오른 채였다. 부비트랩이 발동한 듯, 사방을 뒤흔드는 진동에도 꼼짝하지 않고 웅크린 디는 선의 품에 안겨 끙끙대고 있었다.
“디….”
탈피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로소 일주일의 발정기가 끝난 사실을 실감한 선은 뼈마디가 다 부서진 것 같은 몸을 추스르며 제 품에 안긴 어린 알파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탈피를 끝내면 성체가 될 우성 알파였다. 각인을 통해 우성 알파의 힘을 완전히 해방시켜 줄 오메가는 선이 아닌 다른 이의 몫이었다.
볕에 그을려 짙은 색을 띠었던 피부가 쩍쩍 갈라지며 얼굴 표면에서 유리되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불덩이였고, 아직 고통을 끝내지 못한 디는 전신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신음했다. 이대로 디를 끌어안아 진통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밖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말없이 디를 내려다본 선이 천천히 몸을 물렸다. 뜨끈뜨끈한 머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을 때쯤 힘없이 눈을 뜬 디가 멍하니 선을 올려다보았다.
“가지… 마세요…. 선… 가지 마요….”
“…….”
미안합니다, 디.
찰나도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눈을 내리감은 디가 다시금 탈피의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연은 여기까지인 걸로 해요.
살려 줘서 고맙고, 보살펴 줘서 고마웠습니다.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겁니다.
디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킨 선이 벗어 던졌던 무기와 옷을 하나씩 걸쳤다. 움직일 때마다 배 속에서 걸쭉한 정액이 흘러내렸지만, 선은 익숙하게 가랑이를 닦으며 마지막 단추를 잠갔다. 완전한 탈피가 끝날 때까진 하루가 꼬박 걸릴 터였다. 발정기 알파의 몸부림을 7년이나 버틴 동굴이 든든한 둥지가 되어 줄 것이다.
연검을 왼팔에 감은 선은 홀로 신음하는 알파를 뒤에 두고 걸음을 내디뎠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버러지 같은 새끼! 이 버러지만도 못한!’
시궁창의 썩은 내가 첫 기억인 디에게도 부모 비슷한 분들은 있었다. 시궁창에 버려진 디를 주운 그들은 좁고 더러운 움막에서 열댓의 아이와 함께 키웠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다닥다닥 붙어 누워도 잠자리가 부족했지만, 나름 행복한 시간이었다. 형제들은 어린 디를 막냇동생처럼 대했고, 매일 아침 먹을 걸 구하기 위해 외곽을 서성인 부모도 손찌검 한 번 하지 않고, 마실 물과 음식을 기꺼이 양보하며 열댓의 아이를 건사했다.
그런 그들이 하루아침에 비명횡사했다. 열병에 걸린 디의 약을 구하기 위해 12구역 경계를 서성거리다 괴수들에게 당한 것이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사냥꾼이 피 묻은 유품을 던져 주며 부모의 죽음을 알렸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부모님의 유품 앞에서 열댓의 형제들은 얼어붙었다.
‘너희 같은 것들이 12구역에 갈 일이 뭐 있겠냐. 약 같은 걸 구하겠다고 설치다가 당한 거겠지. 돈 몇 푼이 뭐라고’
사냥꾼의 무심한 한마디에 마침내 자초지종을 알게 된 열댓의 형제들이 일제히 디를 돌아보았다. 디는 순식간에 그들의 귀여운 막냇동생에서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디는 핏덩이가 되도록 얻어맞고 갖은 욕과 원망의 말을 들었다. 저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디는 쏟아지는 발길질과 욕설에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엉엉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형제들은 디를 내쫓는 대신 궂은 일을 떠맡겼다. 위험하고 험한 일을 도맡으면서도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낸 디는 저를 버리지 않는 형제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저를 주워 친자식처럼 보살핀 부모가 저 때문에 죽은 데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우는 소리 한번 할 수 없었다.
‘자연의 확산’ 이후 최저치라는 한파가 1구역을 휩쓸고 지나간 겨울, 12구역 근처에서 풀뿌리를 캐서 돌아온 디를 맞은 건 움막에서 불타 죽은 열댓의 형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열다섯 명의 형제와 자매들이었다. 추위를 견디려 피운 불씨가 낡은 움막 천을 타고 올라 잠든 형제들을 집어삼킨 거라고 했다.
‘쯧쯧, 진즉에 허물고 정식으로 등록된 민가로 이주하라니까.’
뒤늦게 얼굴을 비친 조사관이 혀를 차며 열다섯의 목숨을 대충 처리했다.
‘보자. 네가 저 버러지들 부모랍시고 나대던 쓰레기들을 죽인 놈이구나?’
허망하게 죽은 형제들 앞에서 얼어붙은 다섯 살 디를 찬찬히 훑어본 조사관이 물었다.
‘애미 애비 잡아먹은 놈이라더니 형제들까지 잡아먹은 기분이 어떠냐?’
인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조사관의 눈으로 얼핏 탐욕이 스쳐 지나갔다.
‘불운을 부스럼처럼 옮겨 대는 놈이래도 이대로 얼어 죽게 만들 수는 없지.’
뼈만 남은 형제들을 수습해 묻어 주지도 못하고 떠날 수는 없었다. 조사관의 손을 뿌리치고 잿더미로 달려가려는 디의 등허리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몽둥이질을 하고서야 성가신 얼굴로 그만하라 지시한 조사관이 더러운 수레에 피투성이가 된 작은 몸을 실었다.
디가 눈을 뜬 곳은 낡은 보건소였다. 백 명을 수용하기에도 비좁은 보건소엔 천여 명의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겹겹이 구겨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홀딱 벗겨진 디도 소몰이용 막대기에 찔려 가며 구석으로 몰렸다.
막대기를 든 어른들은 디에게 형질 검사와 신체 검진을 연달아했다. 원형 알파인 디의 형질은 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형질자도 아니고, 또래보다 작은 디의 등에 D 등급이 찍혔다. 뜨겁게 달군 쇠가 아이들의 등을 누르고 지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죽기 싫으면 닥치라는 누군가의 윽박에 작게 사그라들길 반복했다.
쓸 만한 물건 하나 건진 줄 알았더니, 재수 옴 붙었다는 조사관이 보건소 사람에게서 돈 몇 푼을 받아 챙기곤 채찍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른 채찍이 이제 막 찍힌 디의 낙인을 찢고 지나갔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기절한 디는 다시 더러운 수레에 실렸다.
디는 시도 때도 없이 12구역 괴수가 출몰하는 외곽에 청소부로 배치되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디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원형 알파의 특성인지 괴수의 기척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 간발의 차로 살아남은 일도 여러 번이었다. 덕분에 디를 따르는 어린 청소부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네놈이 어린것들을 홀려 몰살당하게 만든 주범이구나.’
디가 괴수와 인간의 시체를 치우고 먹을 걸 구하러 간 사이, 안전한 곳에 숨겨 두었던 어린 청소부들이 악어종 괴수에게 와득와득 뼈까지 씹어 먹혔다.
졸지에 문책을 당하게 된 관리자 중 하나가 혼자 살아남은 디에게 마구 채찍질하며 화풀이했다. 그러잖아도 버러지 같은 게 대장이랍시고 더러운 것들을 쪼르르 끌고 다니던 꼴이 눈엣가시인 차였다. 오래 빨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풀풀 나는 관리복이 땀에 젖을 때까지 채찍질을 해 댄 관리자가 부하들에게 축 늘어진 핏덩이를 치우라 명령했다.
‘너 같은 놈들은 곳곳에 역병을 옮겨 다니는 종기나 다름없다. 긁어도 긁어도 부스럼이 나지 않게 싹싹 발라 놔야지 뒤탈이 없지 않겠냐.’
이번에도 수레에 실린 디는 광산에서 눈을 떴다. 낮에는 작은 몸을 이용해 다람쥐처럼 광산 굴을 달리며 석탄을 캐고 밤에는 관리자들의 놀잇감으로 불려 다녔다. 그들은 저들끼리 하는 도박에 디와 같은 아이들을 판돈으로 걸었다.
디를 판돈으로 건 관리자가 질 때마다 디의 등에는 낙인이 늘어 갔다. 뜨거운 쇠를 달궈 찍은 낙인이 아니라 칼로 긁어 만든 낙인이었다. D, D, D, D, D. 디의 등급이 빼곡하게 찍히다 못해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디의 엉덩이에도, 허벅지에도, 종아리에도 낙인을 긁어 만들고, 표적지 삼아 단검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디는 D등급의 D가 아닌 부스럼으로 불리게 됐고, 두 살을 더 먹어 여덟 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애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