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40)


#14화

“밥이 맛있네요.”

“자연이 지나간 뒤로 땅이 기름져서 흰쌀이 잘 나요. 물론 중앙에서 가져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대장이 괴수라면 질색해서, 식량 배분은 대장 대신 디가 하는데 우리 디가 또 그런 데서는 정확하거든요.”

“이건 무슨 음식인가요? 처음 먹어 보는데.”

“아, 이건….”

어느새 평상에 놓인 밥상에 밥 두 그릇, 수저 두 세트까지 차려졌다. 선의 자연스러운 권유에 절로 음식 맛까지 보게 된 양이가 오지랖 넓은 성격답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식초에 파랑 달래를 잘 버무려서, 간장 조금, 고춧가루 조금….”

“이건 못 보던 쌀 모양인데요. 이 지역에서만 나는 종인가 봐요.”

“아, 이건 작년에 뿔 달린 황소가 우리 디한테 뒈지고 나서부터 나기 시작한 건데. 살짝 더 고소하죠?”

“네, 솜씨도 좋으셔서 저도 모처럼 입맛이 도네요.”

그렇게 얼결에 같이 식사하고 배웅까지 받게 된 양이는 대문 밖에서 인사하는 선에게 마주 손을 흔들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내가 뭐에 홀렸나? 저 인간을 언제 봤다고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주저리주저리…. 사람이 나빠 보이진 않은데, 거기서 밥은 왜 또 같이 처먹고 있어!

사람 구슬리고 홀리는 재주 또한 못지않은 선은 대문 앞에 서서 양이가 걷는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기할 것도 없이 그녀는 부비트랩이 없는 자리만 골라서 울창한 수풀을 빠져나갔다.

‘웬걸요? 여기 죄다 지뢰밭이라고 얼씬도 못 하게 했는데, 어제는 한번 하지도 않던 부탁까지 하면서 알려 주더라고요. 절대 절대 다른 데는 밟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요. 이럴 때마다 정말 우리 디가 사냥꾼이라는 걸 실감한다니까요?’

변경에서는 보기 드문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처럼 괴수가 출몰해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구역에 있기엔 지나치게 훌륭했다. 싱긋 웃은 선이 대수롭잖은 어투로 물었다.

 

‘그래서 디는 언제 돌아온다던가요?’

‘일주일쯤 걸리지 싶은데요. 1년에 한두 번씩 이맘때랑 저맘때쯤 말도 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일주일은 걸렸거든요.’

‘변경에서도 고생이 많네요.’

‘내 말이요!’

선이 원하는 대답을 술술 털어놓고도 여우에 홀린 것처럼 새삼 경계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던 양이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1년에 한두 번, 일주일, 그리고 점점 짙어지던 페로몬.

디가 발정기를 보내기 위해 모처에 숨었다는 추측은 쉬웠다.

어젯밤에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오더니, 12구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날개종의 알을 내놓았다. 디가 그렇게 구해 오겠다던 약이었다. 웬만한 중병 환자도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는 알은 금액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가치를 지녔다. 그 귀한 약재를 밤새 선에게 쏟아부은 디는 회복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혼절한 선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동이 트고서야 문밖을 나섰다.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건 빠른 회복의 후유증이었다. 선은 전만큼의 위력은 아니어도 백인부대원 열댓은 혼자 상대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바보같이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치밀하게 교활하다고 해야 할지. 디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선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이 보낸 감시자들은 자신들의 기척을 감추지도 않았다. 제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경고하는 셈이었다. 감히 도망할 생각을 하지 말라. 저를 구속하는 게 목적인 그들이 제 목숨을 살려 두는 것도 임무에 포함된 것인지 확실치 않았다. 디는 아마도 후자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아직 다 성치도 않은 선을 혼자 두고 꼭꼭 숨어 버린 걸 보아 틀림없었다.

언제는 저를 지켜 주고 보호해 준다더니.

피식 웃은 선이 마당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섰다. 디는 ‘오메가’ 선이 아닌, ‘대장군’ 선을 믿었을 것이다. 날개종의 알이 가진 효력과 그 효력을 거의 흡수한 선의 회복력과 전투력을 믿고 며칠이나 집을 비울 결심을 했을 것이다. 사냥꾼에겐 기밀이나 다름없는 무기고를 보란 듯이 공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니면 그것조차 선의 신뢰를 얻기 위한 획책일지 몰랐다.

무엇 때문에?

선은 언제 선생님의 마음이 변해 사형당할지 모를 반역자이자, 가장 낮은 곳의 오메가였다. 발정기 수태 도구로 쓰라고 친서까지 보내 안겨 준 물건이었다.

한편, 오래 곁에 두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는 선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아직은 짐작할 수 없었다. 순순히 어린 알파의 순정이라 믿기엔 선이 지나온 삶이 녹록지 않았다.

‘꼭 살아 주렴’

‘밤’은, ‘뫼’는 왜 그날 자신들의 핏줄이 아닌 선을 그 핏덩이와 함께 가마 속으로 밀어 넣었을까. 선이 아닌 다른 형제들을 밀어 넣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멍청하게 아이를 빼앗기고 죽게 놔두진 않았을 텐데. 그 후로 회색 눈을 가진 남자아이만 보면 선은 미친 듯이 왼쪽 날갯죽지를 확인하려 들었다. 그러다 얻어터지기도 하고, 쌍욕을 듣고, 윤간을 당할 뻔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조금씩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면서 왼쪽 날갯죽지를 확인하는 방법에도 요령이 생겼다.

그러나 소득은 없었다. 누구도 토끼 모양이나, 그 비슷한 모양의 화상 자국을 갖고 있지 않았다.

‘구역질 나는 알파 년의 마지막 핏줄이다. 통으로 구워 야들야들한 살맛을 볼까, 산 채로 얇게 저며 회를 쳐 먹을까?’

봉두난발의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나 선은 그 밤 눈알이 터지도록 눈에 새기고 머릿속에 각인하듯 하나하나 새긴 침입자들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32년을 살면서 숭숭 뚫려 버린 공백 중 하나였다. 머릿속 어딘가 분명히 고장 난 선을 알고도 대장군의 자리에 올린 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나의….

‘스승님, 저는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어요.’

‘그러려면 네가 강해져야 한단다.’

‘제가 당한 만큼 갚아 주고, 제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그들의 목을 베어 단 한 명의 후손도 남기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요.’

‘그러면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겠니?’

‘네. 그런 뒤에 저는 반드시 웃을 거예요.’

‘뫼’와의 기억이었다. 채 하루도 살지 못한 그녀의 마지막 자식이 태어나기 전, ‘뫼’에게 검술을 전수받으며 나눈 대화였다. 단 한 명의 후손도 남기고 싶지 않다, 이를 갈며 단언할 정도로 커다란 원한을 가졌으면서, 선은 그들이 누군지 기억도 못 했다.

이러니 멍청하게 이용이나 당하지.

냉소를 머금은 선이 벽을 열어 무기고를 살폈다. 손목과 허벅지, 발목에 단검과 소총용 벨트를 착용하고, 옷은 디의 것 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그래도 사이즈가 커서 소매를 길이에 맞게 자르고 바지는 허리띠로 꽉 졸라맸다. 감을 수 있는 연검을 왼팔에 착용한 선이 장지문을 열고 나섰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문밖의 서늘한 공기에 찌르르- 자연의 소리가 섞여 들었다.

디가 신경 써서 만들었는지 튼튼한 마룻바닥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덕분에 쓸데없는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있었지만, 선은 이미 저를 주시하고 있는 시선들을 읽었다. 마루에 앉아 군화를 찾아 신었다. 그간 이 지역을 오고 간 변경부대원들의 신발이 아무렇게나 방치된 창고엔 선의 발에 맞는 군화도 있었다. 능숙하게 끈을 묶어 매듭을 짓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감시자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쪽을 향해 돌아보는가 싶던 선의 모습이 사라진 건 순식간이었다.

“잡았어?”

“씨발, 놓쳤어!”

“새끼야, 한눈팔지 말랬잖아!”

“내가 안 그런 것 같아?”

며칠을 같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선을 감시하던 보안대원들 중 하나가 무전을 날렸다.

“여긴 보안 1대대. 오메가 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듯 망원경과 투시경을 번갈아 선의 자취를 찾던 부대원이 무전을 마친 대원을 돌아보았다.

“계속 지켜보라는 지시다.”

“사라졌는데요? 도망이라도 간 거면…!”

“선생님의 지시야.”

부대원의 말에 입을 다문 다른 대원들 역시 침묵을 지켰다.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것도 선생님이었고, 임무는 극비였다.

페로몬을 쫓는 건 선에겐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감시자들을 따돌린 선은 수풀에 별 가루처럼 묻은 페로몬을 쫓아 걸음을 디뎠다. 원형 알파는 보통 15세 전후로 발정기가 시작됐다. ‘자연의 확산’ 이후 더욱 희귀해진 원형 알파에겐 발정기를 가라앉혀 줄 진정제가 없었다.

발정기의 부작용은 끊임없는 고통이었다. 1초에 살점 하나가 저며지고, 1초에 뼈 한마디가 부서지고, 1초에 내장이 짓밟히는 고통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기다란 바늘이 혈관을 따라 달리며 세포와 신경 하나하나에 바느질하는 고통으로도 부족했다.

대개 그들은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미쳐 버리거나, 스스로 죽거나. 운이 좋아 우성 오메가를 반려로 맞지 않은 이상 그들의 최후는 비참할 정도로 불행했다.

디 역시 7년 가까이 그 고통을 혼자 견뎠을 것이다. 1년에 두 번. 무지성 상태에서 무방비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그는 발정기를 보낼 은신처를 만들어 일주일간 홀로 고통을 견뎠을 터였다.

이번에도 그러려는 걸까. 왜? 우성 오메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제가 가슴 한쪽을 베여 가며 구해 온 알을 깨뜨려 완벽에 가깝게 회복시킨 우성 오메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왜 그 고통을 기꺼이 혼자 견디려 한 것일까.

디가 남기고 간 페로몬의 흔적을 쫓으며 선은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나, 저에게 신뢰를 심어 주려고. 그러면 이용하기가 쉬워지니까.

둘, 몇 번이나 말했던 것처럼 선을 그렇게 취급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발정기의 도구처럼. 선에게 드러낸 마음이 진심이라서.

선은 내심 두 가지 다 아니길 바랐고, 또 두 가지 다 사실이길 바라기도 했다. 그런 제 속내를 깨닫고는 고소를 머금었다.

어리석고 멍청한 선.

아직도 사람을 믿고 싶어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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