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40)


#13화

허름한 옷에 볕에 그을린 얼굴,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여인은 외곽민일 터였다. 손목 뒤에 숨긴 단검을 부엌 찬장에 대충 찔러 숨긴 선이 한 걸음 물러서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카암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형체 때문에 놀란 것도 잠시, 점잖은 목소리와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난 훤칠한 청년을 발견한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 디가 챙겨 주라던 분이 그쪽인가 봐요.”

“디가요?”

“네, 당분간 집을 비울 것 같다고. 며칠만 그쪽 식사를 챙겨 주랬어요.”

“아, 저는 선이라고 합니다.”

뒤늦게 악수를 청하는 선을 힐긋힐긋 올려다본 여자는 ‘저게 사내자식이여, 여자애여. 드럽게 이쁘게도 생겼네.’ 중얼거리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그냥 ‘양이’라고 부르면 돼요. 우리 같은 게 무슨 변변찮은 이름이라도 있다고.”

“네, 양이 씨. 그건 제가 먹을 반찬인가 보죠?”

“아앗!”

놀라서 떨어뜨린 생선을 얼른 주워 든 양이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 귀한걸! 그러게 사람이 기척을 좀 내고 다녀야죠!”

“미안합니다.”

난처하게 웃으며 답한 선이 그녀를 도우려 안쪽에 들어서려고 하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허! 환자가 어딜 들어와요? 딱 봐도 중병이구만! 우리 디가 요새 왜 그리 죽상인가 했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어, 이유가!”

“디가 그러고 다녔어요?”

“아니, 뭐. 우리 디가 일일이 다 티를 내고 다니는 성미는 아니지만,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더 흉흉해져서 마을 사람들이 무슨 큰일 있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거든요. 디가 그러고 다닐 때마다 큰일이 꼭 하나씩은 터져서….”

예상대로 변경에서도 가장 외곽 지역인지 여자는 대장군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눈치였다. 중앙에서 변경, 변경에서 외곽으로 빠질수록 전기 보급이 낙후되어 티브이는커녕 라디오도 귀할 것이다. 속죄 주간이고 뭐고, 대장군이 반역을 저지른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고, 안 해도 된다니까요? 크게 다쳤다면서요? 그쪽도 우리 디처럼 사냥꾼인가 본데, 잘난 척도 몸 성할 때나 하는 거라구요. 딱 봐도 되지도 않는 상대 앞에서 나대다가 호되게 당한 것 같은데, 생판 남인 사람 떠맡은 디 생각해서라도 몸부터 챙겨야죠. 우리 디가 이렇게 누굴 집에 들인 것도 처음이고, 그 사람 챙겨 달라고 부탁한 것도 처음이라 잘해 보려고 하는데 자꾸 저 면목 없게 할 거예요?”

“가만있으려니 좀이 쑤셔서요.”

“그럼 쩌어기 마당 평상에 가서 땡볕이라도 받고 있어요. 얼굴색이 허연 게 귀신이 친구하자고 들러붙겠네.”

“그것도 가만있는 건데요.”

“내 말이! 제발 가만있으라고요. 우리 디가 이런 부탁 어디 자주 하는 줄 알아요? 생전 처음이라고 처음! 맨날 우리 좋은 일만 해 주고, 저는 뭐 필요 없다고만 하고, 됐다고만 하고. 허구한 날 나쁜 놈들 잡으러 싸돌아다니면서 어쩌다 한 번 얼굴 비치는 것도 마을에 뭔 일 생길 때만이고. 그렇게 밖으로 나돌아다닐 거면 이 으리으리한 집은 뭐 하러 지었는지 몰라. 냉장고에 욕탕까지, 중앙도 이런 집이 흔하진 않죠?”

그녀의 말처럼 중앙엔 이런 집이 흔하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중앙은 1세기나 앞선 공간이었으니까.

“네, 중앙에서도 이런 집은 흔하지 않은데, 디가 돈이 많은가 보죠?”

뭐든 소유할 수 없는 대신 뭐든 무상으로 제공받는 사냥꾼은 돈 쓸 일이 없었지만, 재산을 모으고자 하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12구역 괴수들을 해치워 쓸 만한 것들을 암시장에 팔아 이익을 취하든가. 겉만 쓰레기장인 폐기물 처리장에서 교환해 오든가. 편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백인부대에서도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이 변경에서는 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퍽이나 그러겠네요. 마을 사람들이 고맙다고 갖다 주는 식량도 족족 거절하는데. 사냥꾼은 또 봉급도 없다면서요? 선생님도 박하시지. 목숨 바쳐 일하는데 백만금을 안겨 줘도 모자랄 사람한테.”

“사냥꾼은 명예직이니까요.”

“명예는 얼어 죽을,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를 판국에. 아무튼지간에 우리 디는 땡전 한 푼 없어요. 이 집도 혼자 뚝딱뚝딱, 냉장고도 어디서 버려진 걸 주워 갔다더니 그것도 고쳐서 썼나 봐요. 우리 디는 사냥꾼 아니고 만물상을 해도 잘했을 건데. 우째 그 험한 일을…. 하긴, 우리 디 없었으면 마을 사람들은 벌써 다 뒈지고 없지. 저번에도 약탈자 그 썩을 놈의 새끼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애기들을 빼앗아 가려는데….”

언제 발현할지 모를 아이들을 낚아채 가는 건 약탈자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형질자를 원하는 입찰자에게 경매를 붙여 이문을 남기는 형태였다. 형질자를 원하는 부류는 많고도 다양했다.

“디가 훌륭한 사냥꾼이긴 하죠.”

“말해 뭐 해요? 저번엔 집채만 한 뱀종이 마을을 풍비박산 내기 직전이었는데, 우리 디가 혈혈단신으로 그 무시무시한 괴수를 처치했다니까요? 어휴 그 보기도 무섭고 징그러운 걸, 단칼에. 다른 부대원들은 밥만 축내는… 아이고, 하지 말라니까! 어째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어느새 양이의 곁에 주저앉아 파를 다듬던 선이 생긋 웃었다.

“심심해요. 디는 저랑 잘 안 놀아 주거든요.”

“우리 디가 좀 무뚝뚝하긴 하죠. 그래도 이렇게 아픈 사람 모른 척 안 하고 돌봐 주는 거 봐요. 생긴 것 같지 않게 마음만 착해서. 자세히 보면 어린 티도 풀풀 난다니까요? 중앙은 말 한마디로 사람 벗겨 먹는 인간들이 많다던데, 그 어린 게 홀랑 벗겨 먹히고 오는 건 아닌지. 나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구요.”

저답지 않게 조심성 없이 이러쿵저러쿵 있는 대로 쏟아 놓던 양은 제법 손끝이 야무진 선을 보곤 ‘우째 손까지 이쁠까?’ 혀를 차며 괜한 소리를 덧붙였다.

“그쪽이야말로 사냥꾼 관두고 딴 일 알아보는 게 어때요? 우린 디가 큰 공을 올려서 중앙까지 간다기에 뭐라도 좋은 걸 받아 올 줄 알았지, 이렇게 골골대는 사냥꾼을 선물이랍시고 받아 올 줄은 몰랐다구요. 그쪽이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우리 디 사냥꾼 일 한다고 밥도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지 어쩐지도 모르는 마당에 객식구까지 들인 거 보니까 속이 터져서 그래요.”

“하하, 그 마음 백 번 천 번 이해합니다. 저도 오래 신세 지고 싶지는 않은데 몸이 좀체 낫지 않네요.”

“그러니까 빨리 몸 추슬러서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가도 좋고, 뭐 다른 재주가 있으면 우리 마을에 정착해도 좋고.”

그러나 은근슬쩍 훑어보는 눈길은 다른 재주라곤 눈곱만치도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아님 뭐, 그 오메가 그런 거라도 되나요? 물론 우리 디가 알파는 아니지만서도.”

“제가요?”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빙그레 웃는 얼굴을 마주한 양이가 금세 볼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오메가는 선녀나 천사처럼 예쁘다니까…. 하긴, 오메가가 사냥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대장군이 오메가라는 사실이 이 외곽 지역까지는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을 대장군으로 임명했을 때 1구역 안팎으로 벌어진 난리를 떠올리면 그러는 게 쉽진 않을 텐데.

고립되다시피 외부와 차단된 마을.

약탈자 추적이 주 임무였던 지난 10년, 다녀 보지 않은 곳이 없는 선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지형은 낯설었다. ‘자연의 확산’으로 시시때때로 지형이 변한다지만, 이 구역은 지형이 변한 흔적도 없었다.

“뱀종이면 A급 괴수인데 왜 디 혼자 상대했죠? 다른 부대원은 없었습니까?”

“있기야 있었지! 있으나 마나 한 대장이라는 놈 하나랑 띨띨한 놈 두 명! 근데 띨띨한 놈 중 한 놈은 다른 데로 가고 한 놈도 다른 데 지원 나갔다대요? 대장이라는 놈은 여기 살지도 않아요! 변경 안쪽에다 으리으리한 집 지어 놓고 산다던데. 여기 일은 우리 디가 다 한다니까요?”

외부 침범이 잦고 범위가 넓은 외곽은 구역을 잘게 쪼개 수십의 사냥꾼이 3교대로 보초를 서는 구조였다. 예외인 곳도 있었다. 12지역과 맞붙은, 그래서 괴수가 자주 출범하는 외곽 구역이었다. 이제야 마을이 고립되다시피 외부와 차단된 이유를 알아챈 선은 곱게 깐 파를 양이에게 넘기고 주변을 치웠다.

“디는 다친 데 없이 무사했습니까?”

“뱀 잡은 날이요? 보기엔 멀쩡해 보였는데, 걔는 아파도 말 안 하고, 다쳐도 말 안 해요. 사냥꾼이 약점 잡힐 짓을 해서 뭐 하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좀만 곁을 내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마을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보통의 외곽과는 달리 사냥꾼에 대한 인식이 좋은 건 모두 디 덕분인 것 같았다. 아니, 이건 사냥꾼이 아닌 디의 평판이 좋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외곽에 파견 나간 일부 대장의 태업이나, 중앙과 크게 차이 나는 변경부대원의 실력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변경부대원의 주 임무가 경계 근무와 동시에 백인부대의 뒤처리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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