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한시도 떨어져 있기가 싫어 연무장이 바로 보이는 곳에 가마를 지어 올렸다는 ‘뫼’는 늘 빛이 흐르는 눈빛으로 ‘밤’을 바라보았다. 그 소중한 ‘밤’이 눈앞에서 참수를 당하고, 괴수에게 시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음 한번 하지 않은 ‘뫼’의 숨죽인 절규를 선은 문틈 사이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형제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선은 소리도 없이 눈물을 쏟았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눈물이 제 품에 안긴 작은 몸의 열기를 식혀 주었는지, 아기는 뜨거운 가마 속에서도 새근새근 잠든 채였다.
‘꼭 살아 주렴.’
선은 터질 것 같은 비명과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아기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그 순간 뭐가 잘못된 건지, 눈도 못 뜬 아이가 와앙 울기 시작했다. 놀란 선이 아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잔뜩 웅크렸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연무장을 피바다로 만든 침입자들이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이었다. 혀를 베어 문 ‘뫼’가 누군가의 칼을 빼 들었다.
중상의 몸으로도 단숨에 침입자 다섯의 목을 베어 버린 ‘뫼’에게 수십의 침입자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들었다. 그렇게 선은 ‘뫼’의 목숨을 담보 삼아 살아남았다. 총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 밤하늘을 가르는 비명과 겁을 집어먹은 일꾼들의 울음소리가 혼탁하게 뒤섞인 연무장은 아비규환이었다. ‘뫼’가 죽어 가는 동안 서서히 울음을 그친 아기는 제풀에 지쳐 잠들었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난도질당한 ‘뫼’의 등에 침을 뱉고 오줌을 갈기는 수십의 침략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한 선의 눈알에서 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흘렀다. 침입자들에게 끌려 나간 순간부터 성한 곳 하나 없이 도륙당한 ‘뫼’는 가마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꼭 살아 주렴’
발가벗겨진 ‘뫼’가 저잣거리에서 갖은 능욕과 참혹한 짓을 당하는 내내 가마 속에 웅크려 있던 선이 움직인 건 어둑한 밤이 다시 찾아왔을 때였다.
지친 건지, 어디가 안 좋은 건지, 아이는 칭얼대지도 않고 잠든 채였다. 덜컥 겁이 난 선이 제 팔뚝보다도 작은 아기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다행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다행히….
돌연 왈칵 터진 눈물이 피눈물로 말라붙은 선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선은 흐느낌을 삼키며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손끝에 닿는 감촉에 놀라며 얼른 눈물을 닦았다. 이내 선은 울음을 그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마침내 낯선 감촉의 정체를 알아낸 선이 다시금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아기의 왼쪽 날갯죽지에 시뻘건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토끼 모양이었다. 곧 다가올 선의 생일 선물을 굽기 위해 ‘밤’이 준비해 둔 문진에 작게 올린 토끼 모양 장식이 아기의 등에 닿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울어서. ‘뫼’가… 스승님이, 어머님이….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눈물을 쏟은 선이 울음만큼은 끅끅 참으며 아이를 끌어안고 문밖을 살폈다. 혹독한 전쟁이 끝난 전장처럼 을씨년스러운 적막으로 가득 찬 연무장에선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기척 없는 연무장을 문틈 사이로 뚫어져라 쏘아보던 선이 다 식은 가마에서 조심스레 몸을 빼기 시작한 건, 달이 높이 뜬 시각이었다.
오랫동안 웅크린 몸이 삐걱대고,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선은 희미한 달빛 아래서도, 선명한 핏자국 앞에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연무장 바닥을 시커멓게 물들인 핏물에서 ‘밤’의, 형제들의, ‘뫼’의 소리 없는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피 냄새가 가득 실려 왔다. 비릿한 코끝에 희미한 과일 향이 스친 듯도 싶었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나간 선은 아무 생각도,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마터면 품에 안은 아기를 놓칠 뻔도 했다. 그 순간 ‘밤’의 다정한 목소리가 선의 귓가를 간질였다.
‘꼭 살아 주렴.’
선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바위를 매단 듯, 그렇게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냄새 나는 오메가 새끼, 여기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줄 알았다니까.’
머리 위에서 선의 가족을 죽인 침입자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아기를 꽉 안은 선이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머리채를 잡힌 뒤였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제게서 아기를 빼앗아 가는 침입자들에게 저항하고 발버둥을 쳐 보지만 소용없었다.
‘구역질 나는 알파 년의 마지막 핏줄이다. 통으로 구워 야들야들한 살맛을 볼까, 산 채로 얇게 저며 회를 쳐 먹을까?’
‘씨발, 그 정도로 분이 풀리겠냐? 개 좆같은 알파 년의 핏줄이라면 뼈까지 씹어먹어도 성에 안 차는데!’
‘아악! 안 돼! 안 돼! 안 돼-!’
선의 처절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껄여 대던 침입자들은 아기의 팔을 달랑 들고, 머리채를 잡힌 선을 질질 끌며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선은 의심을 했어야 했다.
대장군의 일가족이 하룻밤에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다음 날 대장군의 직속 부하인 백인부대는커녕 중앙의 위병 하나 대장군의 저택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선은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했다. 그러지 못해서, 가족들의 마지막 바람을 지키지 못했다. 친자식이 아닌 선의 품에 핏덩이를 안기며 가마에 밀어 넣은 ‘밤’의 마지막 부탁을 지켜 주지 못했다. 저 혼자만 살아남고, 그들이 맡긴 핏덩이는 살리지 못했다.
뻔뻔하게도. 멍청하게도. 선은 혼자만 살아남았다.
상체를 일으켜 앉은 선이 옆을 돌아보았다. 곤히 잠든 어린 알파의 뺨에 창백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맨몸을 드러낸 채 역시 맨몸인 디를 가만 내려다본 선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저를 바라보고 누운 어린 알파의 왼쪽 날갯죽지를 한참 바라보았다. 칼에 깊이 찔렸다가 아문 오래된 흉터, 그 위에 채찍 자국이, 또 그 위에 D라는 낙인이, 또 그 위에 총탄 자국이 겹겹이 쌓인 날갯죽지에선 토끼 모양의 흉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했다. 그 아이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뫼’는 풍성한 흑발에 어둠보다 더 짙은 흑안이었고, ‘밤’은 은하수 같은 은발에 별의 조각 같은 회안이었다. 그 아이도 ‘밤’을 닮아 별의 조각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선이 지켜야 했으나, 지키지 못한 아이. 태어난 그 밤, 이름도 없이 잔혹하게 죽어 버린 ‘뫼’와 ‘밤’의 마지막 아이.
선생님, 왜 나를 살리셨습니까. 그때도 지금도, 왜 나를 살려 두신 겁니까.
선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들어야 했다.
* * *
벌떡 몸을 일으킨 디가 곧장 이불을 걷었다. 디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선은 눈길도 주지 않고 하던 일에 열중했다. 외려 당황한 건 디였다.
“선.”
“새가브다 드 크에어.(생각보다 더 크네요.)”
“입에 물고 말하지 마세요. 아니, 그보다.”
손을 뻗은 디가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선을 훌쩍 들어 올렸다. 졸지에 디의 허벅지에 올라타게 된 선이 빙긋 웃었다.
“입보다는 밑으로 하는 게 더 좋은가 보죠.”
“선, 입술에서 피가 나요.”
갈라진 살점을 비집고 배어 나오는 피를 닦아 주려 손가락을 갖다 댄 디가 외려 움찔했다. 혀를 내민 선이 디의 손가락을 살짝 빨며 엉덩이를 허벅지 부근에 문지른 탓이었다.
“선.”
의도가 분명한 행위에 디는 불편함보다 걱정을 드러냈다.
“선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어요.”
혹여 선이 쓰러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등을 둘러 안은 디의 손길은 조심스럽다 못해 정중했다. 여전히 섬세하게 도드라진 등 근육 아래로 뼈가 만져졌다. 속죄 주간 이후 10kg 가까이 무게가 빠진 선은 근력도 체력도 그만큼 잃은 채였다. 역시 디의 보살핌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선을 바깥에 노출하는 건 위험했기에 신중해야 했다.
쪽,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깜짝 놀란 디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 솔직한 반응을 가만히 내려다본 선이 웃었다.
“이런 어린애 장난으로는 내 입술의 상처조차 치료할 수 없어요, 디.”
총칼이라곤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을 것처럼 단정하고 새하얀 손가락이 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강인하게 도드라진 관골을 더듬었다.
“디는 성체도 되지 못한 어린 알파잖아요. 아니면 내가 빨리 낫는 게 싫은 겁니까? 내가 도망친다고 해서?”
입매를 끌어 올린 선이 덧붙였다.
“좀 덜 솔직할 걸 그랬나 봐요.”
그러나 디는 긍정도 부정도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달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