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선에게선 여전히 깨끗한 비누 냄새가 났다. 디는 가끔 제가 성체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선과 달리 저에게선 시궁창의 썩은 내가 날 것만 같아서. 아주 가끔 성체가 되지 않고, 선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사냥꾼으로 뒹굴다 죽어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제 썩은 내를 선이 맡을까 무서워서 그토록 지극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대장군 선을 목격했을 때, 디는 다시 살고 싶어졌다. 제 ‘선생님’이 여전히 살아 있고, 찬란히 빛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디는 시궁창의 오물로라도 살아가고 싶어졌다.
“내가 바깥의 감시자들을 조용히 처치할 만큼 다 회복해 버리면?”
건강한 선은, 아니, 어쩌면 조금쯤 망가진 선이라도 바깥의 감시자들을 없애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땐 나를 어쩔 생각입니까, 디.”
똑바른 시선은 올곧고 맑았다. 선생님의 잔혹함과 일주일의 속죄 주간은 선에게 어떤 흠집도 내지 못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절감한 디는 제 ‘선생님’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픈 충동에 내심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디의 창백한 얼굴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당혹감을 기다려 준 선의 귓가에 굵고 나직한 음성이 닿았다.
“정을 붙일 거예요.”
“…….”
“선이 불쌍해서라도 나를 버리고 가지 못하게.”
정을 붙인다는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본 선이 내심 웃었다. 몸정? 아니면 애정? 선에겐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디.”
선의 부름에 도톰한 눈송이처럼도 보이는 잿빛 눈이 따라왔다.
“나는 회복하면 반드시 여길 나갈 거예요.”
선도 이 어린 알파에겐 거짓도 회피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진.
“내 몸이 충분히 회복되면, 바깥의 감시자들을 해치우고, 디의 곁을 떠날 겁니다.”
“같이 가요.”
“평생 쫓길 겁니다.”
“선을 다시 잃는 고통보단 나아요.”
선은 다시금 여백이 많은 제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이번에도 수확은 없었다.
선의 머릿속에 남은 오래된 기억 중 몇 가지는 제 스승이자 어머니와 같았던 뫼의 죽음, 그리고 토끼 모양의 상처, 살이 다 뜯기는 듯했던 고통이었다.
고통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제가 겪은 고통을 어린 알파가 겪은, 고작 몇 년 전에 잠시 스친 ‘선생님’과 헤어진 고통과 견줄 수 있을까.
아니, 어차피 고통의 무게를 재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몇 번에 걸친 실험으로 32년의 기억에 수많은 공백이 생겨 버린 선이 끈질기게 물고 있는 과거의 파편에 어린 알파가 없다는 사실은 많은 걸 이야기해 주었다. 어린 알파와 달리, 선에게 디는 아무것도 아닌 인연이었다.
“그래도 디.”
끝내 선의 머리카락을 쓸어 보지 못하고 손을 떨군 디의 팔뚝에 온기가 문질러졌다. 선의 뺨이었다.
“말도 없이 도망가진 않을게요.”
외려 손을 뻗은 선이 디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려 잘생긴 이마를 드러나게 했다.
“디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악행을 저지르고 가겠습니다.”
굵게 도드라진 눈썹뼈와 움푹 파인 눈가를 쓰다듬은 선이 생긋 웃었다.
“그러니 어서 나를 회복시켜 주세요.”
디의 얼굴을 어루만진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제 등을 두른 디의 오른팔을 훑어 내려 손에 깍지를 낀 선이 제 엉덩이 사이로 끌고 갔다. 의도는 분명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삽입을 해 디의 정액을 안에 싸 주세요. 사실 디의 성기는 멀쩡한 상태에서 받더라도 내장이 다 망가지기 십상이겠던데요.”
가볍게 농담을 덧붙이는 선을 조용히 바라본 디가 답했다.
“조금만, 더요.”
선의 회복이 더딘 게 걱정돼서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고 싶어서인지 속내가 불분명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 선은 후자라 생각했다. 어차피 발정기가 오면 디는 걸신들린 것처럼 눈앞의 오메가에게 달려들 것이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홀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알파들은 짐승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했다. 이 어린 알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오메가와 발정기를 한 번도 보내 보지 못한 원형 알파라면, 이성보다 추잡한 본능이 앞서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선은 그런 것에 일일이 마음을 다치지 않았다. 그런 건 군데군데 숭숭 뚫린 기억의 공백만큼이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지 않은 선에겐 꼭 살아남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7구역과의 전쟁 중 크게 다친 1구역의 대장군 ‘뫼’가 병석에 누웠을 때, 정체 모를 침입자들이 야밤에 대장군의 저택 담벼락을 넘었다. 만삭의 몸으로 ‘뫼’의 곁을 지키다 진통을 시작한 남편 ‘밤’이 난산 끝에 아이를 낳은 직후였다.
봉두난발의 침입자들이 저택 위병들을 돌로 쳐 죽이고, 쥐새끼처럼 숨어들어 종일 앓다 겨우 잠든 대장군 ‘뫼’를 끌어냈다. 사방에 불이 밝혀진 널따란 연무장 한가운데 침의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대장군 ‘뫼’의 무릎이 꿇렸다.
저택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낸 ‘뫼’의 식솔들이 그 앞에 줄지어 꿇어앉았다. ‘뫼’의 각인 상대이자 막 해산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밤’, 네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을 돌아본 봉두난발 중 하나가 물었다.
‘네년 씹집이 갓 싸지른 핏덩이는 어딨느냐?’
‘뫼’가 침묵하자 봉두난발은 ‘밤’의 목을 베어 본보기를 보였다. 그래도 ‘뫼’가 답하지 않자 ‘밤’의 시체를 뒤집어 시뻘겋게 젖은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12구역에서 포획한 괴수가 시체가 된 ‘밤’을 겁간하는 동안, 강제로 벌려진 ‘뫼’의 입으로 새카만 피가 쏟아졌다. 낡은 도끼로 두 번에 걸쳐 내리친 ‘밤’의 머리를 쥐어짜 낸 핏물이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산 채로 치욕을 당하고, 죽은 채로 능욕을 당하는 부모 앞에서 네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은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들 모두 성인도 되지 못한 어린아이들이었다.
‘뫼’가 굴복하지 않자 봉두난발이 피 묻은 도끼를 휘두르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네 연놈들 애비가 갓 싸지른 핏덩이는 어딨느냐?’
두 눈을 부릅뜬 그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첫 번째 자식과 마지막 자식이 ‘밤’처럼 도륙과 윤간을 당했다. 그사이 10년은 더 늙어 버린 ‘뫼’의 배 속이 남편과 자식들의 피로 가득 찼지만, 그 눈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년 씹집이 갓 싸지른 핏덩이는 어딨느냐?’
제 이로 혀를 물어 끊은 ‘뫼’에게 달려든 침입자들이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대장군 ‘뫼’가 누군가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봉두난발 다섯의 목을 베었다. ‘뫼’는 산 채로 난도질당하며 침입자 100명을 상대했다.
동이 틀 무렵, 마침내 쓰러진 ‘뫼’의 등에 침을 뱉고 오줌을 갈긴 침입자들이 걸레짝이 된 그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목에 올가미를 걸고 흉측한 괴수의 꼬리에 매달았다. 동이 트고 환한 대낮이 될 때까지 고깃덩어리처럼 저잣거리를 끌려다닌 ‘뫼’의 주변으로 구역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중 누구 하나 ‘뫼’를 위해 나서는 이가 없었다. 비겁한 그들을 비웃은 침입자들은 피가 철철 흐르는 ‘뫼’의 입을 벌려 뜨겁게 달궈 녹인 쇳물을 부었다.
즉사한 ‘뫼’의 사지를 잘라 괴수의 목구멍에 찔러 넣고, 똥구멍에 찔러 넣고, 성기에 물려 준 봉두난발이 위풍당당하게 대장군의 보호 아래에 있던 마을을 벗어났다.
대장군가의 참변을 뒤늦게 접한 중앙에서 백인부대를 보냈지만, ‘뫼’의 사지는 간데없고, 가족들의 처참한 시체만이 그들을 맞았다. 대장군을 철저히 욕보임으로써 1구역을 농락하고 ‘선생님’을 능욕한 침입자들은 이미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였다.
‘밤’이 참수를 당하고, 첫 번째 아이와 마지막 아이까지 참변을 당하는 내내 선은 가마에 웅크려 있었다. 도기 빚는 취미를 즐겨하는 반려 ‘밤’에게 건넨 ‘뫼’의 결혼 선물이었다. ‘뫼’의 쾌차를 기원하려 한 ‘밤’이 지난밤까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기를 구운 가마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 다급한 손길로 선을 밀어 넣은 건 침착한 얼굴의 ‘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 알겠니?’
비장함과 애틋함이 뒤섞인 얼굴로 선의 뺨을 어루만진 ‘밤’이 선의 품에 꼭 안긴 갓난아이를 보았다. 태어난 지 이제 고작 세 시간. 이름도 붙여 주지 못한 핏덩이를 열 살 선에게 맡긴 ‘밤’이 가만 웃음을 지었다.
‘내 아이들.’
나직이 속삭인 ‘밤’은 겁에 질린 열 살 어린아이의 뺨에 부드러이 입을 맞추곤 가마 문을 닫았다. ‘밤’이 덮어 준 방화천 아래서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가마 속의 열기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이를 악문 선은 눈도 뜨지 못한 제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뫼’는 선의 어머니였으며, ‘밤’은 아버지였고, 큰누나부터 막내 형까지 선에겐 가족이었다. 이제 막 태어난 제 품 속의 아이도, 선에겐 첫 동생이자 유일한 동생이었다.
‘꼭 살아 주렴.’
‘밤’의 속삭임이 눈물이 되어 선의 자그마한 얼굴을 축축하게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