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선.”
집요하기까지 한 선의 시선은 참을 수 있어도, 그러느라 섭식을 멈춘 선의 배 속에서 나는 소리는 참기 어려웠던 디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먹어요. 너무 식어도 맛이 없어요.”
“내 기억 속엔 이렇게까지 잘생긴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데요.”
백인부대에서 난다 긴다 하는 미남들을 들이밀어도 외려 그쪽이 비교 대상이 된 것 자체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이 어린 알파는 미남이라는 표현이 부족했다. 이렇게 눈에 띄도록 잘생긴 얼굴은 사냥꾼에겐 약점이나 다름없을 텐데. 이토록 훌륭히 살아남은 것 자체가 어린 알파의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다.
“식어도 맛있어요.”
디가 내민 고구마를 한 입 더 베어 문 선이 눈매를 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더 식으면 조금 덜 맛있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러니까 어서 너도 먹으라는 눈짓에도 잿빛 눈동자는 미동이 없었다. 그저 입에 문 고구마를 녹여 삼킨 선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남은 고구마 반을 껍질도 까지 않고 한입에 삼켰다.
“정말 내가 기억해 낼 때까지 말해 주지 않을 작정입니까?”
“기억해 내지 않아도 돼요.”
“사람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들어 놓고?”
“그거면 됐어요.”
디는 과거의 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에게 기대도 실망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밤 스치듯 지나간 서운함은 순전히 선의 감이 좋아서 읽어 낸 것에 불과했다. 과거 선이 ‘선생님’ 노릇을 하고 돌아다닐 때면 선도, 디도, 이보다는 훨씬 어린 나이였다.
13년 전, 백인부대에 소속되기 전에 선은 무려 5년이나 밑바닥을 뒹굴며 많은 아이를 만났다. 그 시절에 맺은 연이라면 아마도 이 어린 알파에겐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비록 표면적일 뿐이지만, 어쨌든 서로에겐 만남도 이별도 좋은 연으로 포장되었을 시기였다.
다만, 선은 그 시절의 기억을 많이 갖고 있지 못했다. 군데군데 구멍 난 기억엔 빈칸이 많았다.
“애석하네요.”
다른 고구마를 골라 껍질을 까던 디가 눈을 마주쳤다. 이 어린 알파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거나, 눈동자만 굴려 힐긋, 남을 쳐다보지 않았다. 선의 작은 목소리에도 온전히 시선을 들고 고개를 들어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선에 대한 존중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태도였다.
정말 좋은 기억이었나 본데. 그렇다면 저도 이 아이를 기억했으면 좋았을 텐데.
싱긋 웃은 선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귀여운 아이였을 게 분명한데요.”
디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듯 짧게 고개를 젓고 마저 고구마 껍질을 깠다. 귀를 살짝 덮은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서서히 붉어진 살점이 비쳤다. 진짜 애 같네. 이런 타입은 이용하기도, 회유하기도, 자신이 그런 짓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기도 쉬웠다.
지난밤에 아주 잠시 보았던 어린 알파의 상처투성이 알몸을 떠올린 선의 눈길이 길고 두꺼운 목까지 올라온 디의 검정 상의에 닿았다. 땀과 물로 조금 젖어 있었다.
“디. 덥지 않나요?”
“네?”
“내 눈길이 부담스럽다면 방에 들어가 있을게요. 더운데 좀 시원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작을 패요. 아예 벗고 해도 좋고. 보는 내가 다 더워서 숨이 막히겠어요.”
“그게 아니라.”
이번엔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디의 말을 막지 않은 까만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아름답고, 영리하고, 선한 사람. 디의 유일한 ‘선생님’인 선은 여전했다.
“보기 흉해서요.”
괜스레 턱밑을 긁적이려다 멈춘 디가 고구마 껍질을 까는 데 다시 집중했다. 한 알을 말끔하게 깔 때까지도 선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자 마지못해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하며 곤란한 듯 답했다.
“선에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어요.”
순간 선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다 크게 벌어진 입술이 아파 눈살을 찡그리며 웃음을 멈추는데도, 햇살을 받은 얼굴은 태양처럼 빛났다.
“이미 내 못 볼 꼴은 혼자 다 봐 놓고. 내 알파는 엄청 이기적이네요.”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속삭이듯 달싹이는 선이 눈부셔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뜬 어린 알파의 석상 같은 얼굴 한쪽이 살짝 붉어졌다. 그게 망가지고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선의 외모 때문인지, ‘내 알파’라는 무심한 호칭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몰랐다.
5. 발정기
디의 첫 기억은 썩은 내였다. 자그마한 구덩이에 온갖 오물이 고이고 고여 아예 마을 하나를 집어삼킨 그 썩은 내가 디의 첫 기억이었다. 후각으로 남은 기억이 가장 강렬하다던 말이 사실인지 디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 썩은 내부터 떠올랐다.
그리고 두 번째는 깨끗한 비누 냄새였다. 볕에 잘 말려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나던 비누 내. 오물투성이 아홉 살짜리 디를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선의 냄새였다.
그때 선을 따르던 아이들은 모두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덜컥, 장지문이 조용히 열린 틈으로 어린 알파가 커다란 체구를 구기듯 들어섰다.
불 꺼진 방에서 희미한 달빛을 의지해 소리도 없이 걸음을 옮기는 디는 젖은 채였고, 알몸이었다. 서랍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젖은 몸을 닦아 내는 그에게선 미처 지우지 못한 피 냄새가 풍겼다. 예민한 사냥꾼이 아니었다면 모를 정도로 옅은 냄새였지만, 디가 들어서자마자 눈을 뜬 선은 그 냄새를 단번에 맡을 수 있었다.
오늘로 보름. 선이 사경을 헤맨 며칠을 제외하고 꼬박 보름째, 디는 매일 밤 우물가에서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쓰곤 방에 들어섰다.
다 씻겨 나가지 않은 피 냄새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냥꾼의 의무를 다하고 왔을 것이다. 선을 보살피느라 소홀히 한 며칠을 만회하기 위해 평소보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을 디를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은 매일 밤 저 어린 알파가 풍기며 들어오는 피 냄새가 의문스러웠다.
약탈자 박멸이 목표인 백인부대도 매일같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전장을 뒹굴진 않았다. 악명 높은 외곽의 치안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사실 변경부대원의 주 임무는 외곽 구역민의 보호가 아니었다. 변경부대원의 주 임무는 백인부대가 놓친 약탈자 잔당을 소탕해 혹시 모를 재발호를 방지하는 일이었다.
즉, 약탈자 중에서도 잔챙이를 골라내 잔불을 끄듯 밟아 버리는 게 주된 임무였고 외곽 구역민의 보호는 뒷전이었다.
간혹, 선생님께서 직접 포상을 하사할 만큼 큰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말 그대로 백만 번에 한 번 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변경부대원인 디가 이렇게 매일 밤 피 냄새를 풍기며 들어올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안 자요?”
알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온 디가 모로 누운 선의 등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닿는 면적을 넓혔다. 잠자코 품 안으로 끌려간 선이 제 뺨에 닿는 팔뚝의 서늘함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어린 알파는 오직 우성 오메가만이 맡을 수 있는 옅은 페로몬을 풍겼다. 설익은 포도 향이었다. 도저히 22세로는 보이지 않는 덩치에 범의 화신처럼 생긴 어린 알파가 풍기는 냄새는 푸른 초록을 불러일으키는 청포도 향이었다. 성체가 되어 발정기를 보낸다면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은 적을 터였다.
“매일 밤 어딜 다녀오는 겁니까?”
“…밖에요.”
당치도 않는 대답이었지만 선은 코웃음 치거나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디를 향해 돌아누우며 어둠 속에서도 예쁘게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나갈 땐 왜 그냥 나갑니까?”
“…그냥 나가지 않으면요?”
선이 무얼 묻는지 모르겠다는 어린 알파의 얼굴은 볕에 그을리고도 달빛을 받아 창백했다.
“내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얼굴은 아니었다. 임무를 수행할 때도 이처럼 속내가 다 얼굴이 드러나는 타입이면 위장 업무는 어려울 것이다.
말없이 선을 내려다본 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어린 알파는 아무리 곤란한 질문을 던져도 뜸을 들일 뿐,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마치 회피와 거짓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지 않을 거잖아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죠?”
“선은… 여전히 아프고.”
선이 이불 속에서 왼 다리를 들어 올리자 자연스레 가랑이를 벌려 제 허벅지 사이에 끼운 디가 다른 손으로는 선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아직도 삽입은 무리라 둘 다 알몸으로 누워 최대한 접촉 면적을 넓히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선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 주기도 했다. 더 빠르게 회복하지 못하는 건 이제 겨우 오므라지기 시작한 선의 요도 구멍과 제 크기를 되찾은 불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더 밀접한 접촉을 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아직은 내가 필요하고.”
선이 베고 누운 제 팔뚝을 조심스레 접는 디의 손끝에 가는 머리칼이 닿았다. 듬성듬성 잘렸어도, 여전히 삐죽삐죽한 모양이어도,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우아했다. 차마 쓸어 보진 못하고 허공을 더듬던 디가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선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바깥엔 감시자들이 있잖아요.”
“더는 디가 필요하지 않아지면요?”
바짝 얼굴을 붙인 채 작게 속삭이는 선의 숨결이 디의 뺨을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