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40)


#8화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정보가 많지 않은 선으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뇌리를 스친 존재가 있었다.

백인부대. 그리고 선생님.

선을 이렇게 망가뜨린. 가장 천한 오메가로 남김없이 취급한.

“디. 나는 반역자입니다.”

어느새 엄격한 대장군의 얼굴을 한 선이 거듭 말했다.

“당신은 선생님과 1구역을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친 사냥꾼이고요.”

반역자 선을 각성체의 도구로 사용하거나, 뒤로 빼돌려 암시장에 팔아넘기거나, 약탈자들에게 산 채로 넘겨 수태 기계로 만들거나, 그런 짓들이 차라리 나았다. 제 몫을 해 줄 도구에게 비치는 호의와 호감이라면 괜찮았다. 이 어린 알파의 맹목적인 시선이 가리키는 감정보다는 차라리 그와 같은 짓들이 어린 알파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더 나았다.

반역자 선에게 경멸과 혐오, 분노와 증오와 반대되는 감정을 갖는 건, 디 또한 반역자가 되는 길이었다.

“디라고 불러요.”

“…디.”

“내 선생님은 그….”

불시에 뻗어 나간 선의 손이 디의 입을 틀어막았다. 부릅뜬 선의 눈에 비친 건 맹목적이기보단 따뜻한 빛을 띤 어린 알파의 회색 눈동자였다. 선생님이 저를 살려 준 이유를 선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주변엔 듣는 귀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디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선을 바라보며 재차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눈빛만큼 따뜻한 숨결이 선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내 선생님은 그 가짜가 아니에요.”

선의 손바닥에 눌린 채 선의 간절함을 수용한 디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누구도 듣지 못한 속삭임이 맞붙은 살갗에 맴돌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까이 있던 선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힘이 빠진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전신의 신경이 곤두선 선의 검은 눈동자를 가득 채운 건 온갖 혼란과 불신이었다.

* * *

선은 마루 기둥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볕이 좋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자연의 확산’ 이후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맑은 공기와 신선한 바람, 그리고 시야가 탁 트이는 녹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저지선이 무너지며 자연에 삼켜지는 형별 대신 받게 된 찰나의 선물이었다.

디는 마당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1구역 중앙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1구역 중앙과 외곽은 1세기만큼이나 인프라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쩍- 쩌억- 단번에 갈라진 장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균일하게 팬 장작을 한쪽 벽에 척척 가지런하게 던져 쌓은 디는 따가운 땡볕 아래서도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사냥꾼들의 기본 제복이자 가장 실용적인 복장이지만, 땡볕 아래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덥지도 않은지 제 몸을 꽁꽁 싸맨 채 도끼질을 하던 디가 뒤를 돌아보았다. 디가 꼼짝도 못 하게 하는 바람에 마루에 앉아 꿔다 놓은 보릿자루 노릇이나 하게 된 선은 어쩐지 겸연쩍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형식적으로 마주 웃어 주기라도 하면 좋을 것을, 디는 그저 선이 얌전히 있는지 확인만 하곤 다시 장작을 패는 데 집중했다.

아니, 그걸 집중이라고 할 수 있긴 한지. 선이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도끼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목이 말라서요.’

반사적으로 대꾸하면 도끼를 내던지고 성큼성큼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 텀블러에 시원한 물을 떠다 받쳤다. 시원한 물은 부엌 한구석을 차지한 구형 냉장고에서 꺼내 왔을 것이다. 지난번 목욕 시중을 받을 때 얼핏 본 기억이 있었다.

그 뒤로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 꿈쩍거리면 또 도끼를 내던지고 걸어와 선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살이 많이 빠지고 야윈 선이었지만 그래도 장신의 사냥꾼인데, 디는 깃털이라도 되는 듯 번쩍 안아 옮겨서 괜히 선이 멋쩍어지곤 했다.

속죄 주간에 수없이 반복된 착상과 유산에 혼자 설 수조차 없어 볼일을 볼 때도 디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제 아랫배를 조심스레 감싸 안고 축 늘어진 성기를 변기에 조준해 잡아 주는 디의 손길에 선은 제법 선선히 순응했다. 아이처럼 안겨 큰일을 보기까지 한 마당에 그런 게 뭔 대수인가 싶고, 어차피 여태껏 살면서 못 볼 꼴을 제일 많이 보여 준 상대였다.

선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야 했으니, 까닭을 알 수 없는 디의 온전한 호의를 우선은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득 지난밤의 대화가 떠올랐다.

‘디, 나를 알고 있습니까?’

여전히 선에게 입술을 틀어막힌 디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조용히 들숨과 날숨을 내쉬기만 했다. 그 숨결이 간지러워 저도 모르게 움찔하면서도, 선은 이 어린 알파가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틀어막은 입을 풀어 주지 않은 채 거듭 물었다.

‘대장군이 아닌 나, ‘선’이라는 사람을 아는 겁니까?’

조용히 잿빛 눈을 깜박인 디가 선의 손바닥을 밀어내는 대신 제 얼굴을 뒤로 내빼며 답했다.

‘그건 선이 알아내세요.’

덤덤한 어조에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서운해 보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선은 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건 삐졌다고 표현해도 될 법한 표정이었다.

어리긴 어리네.

제가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아예 이쪽을 바라보고 장작을 패도 될 것을, 디는 굳이 등을 보이고 서서 세 그루는 되어 보이는 장작을 기계처럼 패고 있었다. 그러면서 온 신경은 저에게 곤두세우고 있는 티가 역력한 모습에서 어린 태가 났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직 반이나 남은 장작을 내버려 두고 홀연히 부엌으로 사라진 디가 들고나온 건 갓 찐 고구마였다. 아까부터 고소한 냄새가 나더라니. 디는 찌르르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에 묻히고도 남을 선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놓치지 않고 얼른 먹을 걸 내놓았다. 소쿠리에 담긴 고구마는 알이 굵고 윤이 났다.

백인부대에 소속된 이후로는 비상식량으로도 배급받아 본 적 없는 고구마를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과거 소속도 없이 밑바닥을 구를 때는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귀한 식량이었다. 별의별 출신들이 오로지 전투 능력 하나로 모인 백인부대원 대부분은 과거의 지긋지긋한 가난과 형벌 같던 삶을 증오하는 만큼, 하층민을 대표하는 식량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디 먼저 드세요.”

“뜨거우니까 만지지 말아요.”

세수만 대충 하고 고구마 소쿠리를 들고나온 디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한마디 했다. 저는 손도 못 대게 하고 젤 알차 보이는 고구마 하나를 집어 드는 디의 굵은 손가락을 유심히 내려다본 선이 입을 열었다.

“먹을 거 눈앞에 두고 고문하려는 속셈은 아니죠?”

“그게 아니라,”

그제야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디를 마주 본 선이 생긋 웃었다. 제법 개구진 표정이었다.

“알아요, 디.”

장난이었다는 듯 웃으며 입을 벌리곤 디에게 눈짓했다. 저 먹이려고 껍질을 까 놓고 왜 넣어 주질 않느냐는 뜻이었다. 물끄러미 선을 바라본 디가 정말 별수 없다는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아직 뜨거운 고구마를 호호 불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선의 입에 물려 주었다.

“뜨거워요. 조심히.”

그냥도 얻어터지고, 수많은 좆을 물고도 얻어터지고, 또 스스로 낳은 알을 물고도 얻어터지고, 그 외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물고도 얻어터진 선의 입은 나을 시간도 없이 뭉개지길 반복했다. 디에게 온 지 12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겉으로나마 제 형태를 되찾게 된 선은 내내 디가 넣어 주는 무르거나 묽은 음식들만 받아먹었다.

의식이 있든 없든, 디는 선을 보살피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선이 자신의 오메가라서.

‘내 선생님은 그 가짜가 아니에요.’

그 발언의 이면을 쉽사리 짐작할 순 없었다. ‘선생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건지, 디에겐 진짜 선생님이랄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뜻인지. 그도 아니면…. 어느 쪽이든 ‘선생님’과 1구역에 충성을 맹세한 사냥꾼의 발언으로는 불경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선은 제가 먹을 것도 아닌데 꼼꼼히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열을 식히려 호호 부는 데 열중한 디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치 흐릿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과거 제가 ‘선생님’이라 불리던 한때의 순간들을 되짚듯. 그 과거에서 제 눈앞의 어린 알파 비슷한 기억을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선은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를 훤히 드러낸 채 대놓고 디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이 어린 알파의 얼굴에서 과거 제 곁을 짧게, 혹은 길게, 또는 찰나보다 더 짧게 스쳐 지나갔던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기라도 한 듯.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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