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울지 마.”
본인도 큰 눈망울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신지우가 작은 목소리로 이민영에게 속삭였다.
두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침착한 김솔의 태도가 한몫했다. 또한 아이들은 영웅이나 다름없는 에스퍼들도 떠올렸다.
만화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저 흉악하게 생긴 남자는 악당이었다. 울지 않고 버텨 내면 에스퍼들이 구하러 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김솔이 입 모양으로 신지우와 이민영에게 말하는 와중,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천 조각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협상을 잘해야 하는데.”
김솔이 남자의 눈치를 보면서 양쪽에 앉은 친구들의 손등을 다독였다. 다행히 남자는 아이들을 폐교로 데려와 교실 안에 둔 후 해코지하지는 않았다.
다만 겁에 잔뜩 질린 아이들의 상태가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지고 있어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김솔 또한 빠르게 뛰는 심장에 가슴께가 뻐근한 감각이 들어 평소보다도 숨을 느리게 쉬는 중이었다.
남자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움푹 파였던 머리가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솔은 그 모습을 통해 남자가 하프 좀비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 어떡해…….”
이민영이 흐느끼듯 목소리를 냈다. 바닥에 진하게 번져 가는 물 자국에 김솔이 이를 악물었다.
“뭐야, 이 지린내는.”
창문을 통해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던 남자가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민영은 울지 않기 위해 입술까지 꾸욱 깨물어 봤으나 실례한 흔적은 감추지 못했다.
아까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기에는 남자가 너무나 무서웠다.
“야,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가고 싶다고 말을 해야…….”
남자의 말이 뚝 멎은 건 아이의 입술 위로 핏방울이 맺히면서부터였다. 울음을 참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깨문 탓에 이민영의 아랫입술 위로 피가 조금씩 배어났다.
“……내 등 뒤에 있어.”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위험을 기민하게 감지한 김솔이 몸을 움직여 이민영의 앞을 막아섰다.
“……그래. 인질이 꼭 여러 명일 필요는 없지. 한 명쯤은 먹고 흔적만 없애 버리면 상관없을 거야.”
먹는다.
귓가에 박혀 오는 오싹한 단어에 김솔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지우도 몸을 덜덜 떨며 김솔의 등 뒤로 숨으려 했다.
김솔이 떨리는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팔을 활짝 벌리고 남자를 막아섰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보다도 무모한 대치였다.
“너로 할까?”
남자가 눈매가 접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가 유독 날카로워 이민영은 결국 양손으로 입을 막고 끅끅거렸다.
남자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김솔에게 다가갔다. 김솔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르는 눈물을 볼 가운데로 흘려보내며 입을 앙다물었다.
“……흐으.”
그래도 두려움에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다. 이현이 보고 싶었다. 더 적극적으로 신지우를 말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휩쓸려 버린 본인의 행동에 자괴감이 들었다.
“애새끼들은 먹어 본 지가 오래돼서 안 그래도 입 안에 침이 고이던 참이었는데.”
남자의 눈동자가 식욕으로 번들거렸다. 이성은 있으나 금세라도 본능에 휩쓸려 사라질 듯 희미하기만 했다.
두려움에 잠식된 김솔의 시야에 이질적인 광경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남자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두려울 만한 광경이겠지만 김솔에게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핑 돌 만큼 반가운 모습이었다.
“아니면 팔 하나라도 먼저…….”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남자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나온 그림자 때문이었다.
한수호는 이건오를 공격하는 동시에 아이들의 시야를 가렸다. 진표성이 이어 비틀거리는 이건오의 목을 쥐고 교실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괜찮아?”
“흐어엉…….”
“흐윽, 엄마…….”
방금 전까지 이건오가 서 있던 자리에는 옅은 핏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수호는 그것마저도 그림자로 가려 버린 뒤 이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아저씨.”
김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꼬리에 그렁그렁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요동치는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리 와.”
한수호가 남은 팔을 들어 올렸다. 이미 한쪽 팔에는 신지우와 이민영이 달라붙어 있었다. 김솔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남아 있는 품으로 뛰어들었다.
“죄송해요……. 흐윽…….”
김솔도 한수호의 한쪽 어깨에 고개를 묻고 눈물을 쏟아 냈다. 한수호가 제때 와 줘서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은 죽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한수호의 손길에서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는지 전해졌다.
“보금자리로 돌아가자. 이현 아저씨도 걱정 많이 하고 있어.”
“네에.”
죽을 위기를 넘겨서 그런지 이현의 생각이 많이 났다. 김솔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수호가 아이 세 명을 한 번에 안아 일어났다.
아이들을 볼 때와는 달리 날카로워진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 * *
“머리통에 문신이라. 네 이름이 이건오 맞나?”
“크윽…….”
이건오는 진표성의 질문에도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렸을 뿐만 아니라 진표성이 목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인정사정없이 비틀었기 때문이다.
옥상에 끌려와서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온몸을 덮치며 쏟아져 내린 잔해 더미에 생매장당할 뻔했다. 숨을 참으려고 노력해 봐도 반사적으로 쉬어지는 숨에 코와 입 안으로 잔해들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뭐라도 봐야 했기에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연약한 눈알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마지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야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숨죽여 이동했다.
에스퍼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반 좀비처럼 행동하면서 움직였다. 그러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전세가 에스퍼들 쪽으로 확 기울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던 서동연이 에스퍼들과 하나 되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다.
과거의 자신이 부린 만용이 해일처럼 덮쳐 오고 있었다. 어렵게 살아난 만큼 끝까지 생존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에스퍼들과 먼저 화해 비슷한 거라도 해야만 했다.
그냥 찾아가면 바로 죽이려고 들 테니 인질이라도 있으면 나을까 해서 무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 마침 오늘 세 아이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길래 기회를 잡은 거였다.
“대답하라고, 이건오.”
“커헉…….”
진표성은 대답하라고 하면서 이건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물어 가기 시작하는 가슴 한가운데를 워커 앞코가 거칠게 헤집었다.
생살이 찢기는 고통에 이건오의 흰자위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진표성의 행동에서 자신을 살려 줄 마음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이 버텨 온 게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서동연을 배신하지도 않았다.
‘자네 정도 되는 인재가 왜 서동연 밑에서 능력을 썩히고 있는 건가?’
자신에게 다가와 사람 좋은 얼굴로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정강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까득. 턱뼈가 어긋날 정도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 이렇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지 않을 텐데.
“저, 정강필…….”
“뭐?”
숨이 간당간당하게 차오르기 직전에 죽을 각오로 내뱉은 단어는 효과가 있었다. 이건오를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진표성의 움직임이 멎었던 것이다.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어?”
진표성이 연신 거친 기침을 토해 내는 이건오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세상이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중이지만, 아직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정강필은 붙잡지 못했다.
서동연이 놈의 뒤를 뒤쫓고 있으나 생포했다거나 죽였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마, 말해 줄 테니까…… 살려 줘…….”
이건오는 정강필에 대한 정보가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가늘게 경련하는 손을 들어 진표성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진표성의 눈동자가 어둑한 빛으로 물들어갔다. 손끝이 희게 질릴 정도로 간절해 보였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으면서도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는 미련을 못 버리는 모습이 끔찍했다.
“아악……! 악……!”
“말하는 데 필요한 건 팔다리가 아니니까.”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진표성이 이건오의 팔다리를 뭉개다시피 했다. 서동연에게 크게 당한 이후로 이건오는 본신의 능력을 되찾지 못했다.
사람이라도 잡아먹어야 힘이 날 듯한데 먹은 거라고는 들짐승뿐이었다. 일반 좀비와 좀비 몬스터들의 심장도 섭취했으나 입맛만 버렸다. 에스퍼들이 일대의 생존자들을 다 모아 놓고 보호하는 바람에 먹잇감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약해진 몸은 진표성의 발아래에서 찰흙처럼 뭉그러졌다. 고통스러운 비명에도 진표성은 묵묵히 징벌 같은 행위를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