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23)화 (123/133)

123.

정강필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은 투명한 벽에 점점 금이 가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조금만 더 힘을 가하면 부서질 것 같아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데 정강필의 모습이 기괴했다.

“제 팔에 주사를 놓는 것까지는 저도 봤는데…….”

벽을 부수는 데 집중하고 있던 하프 좀비들 눈에도 정강필은 이상해 보였다.

“크으으, 아아아아악……!”

정강필의 얼굴 위로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그 모양새가 정말 피부 아래에서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끔찍했다.

“뭐야, 저 새끼. 지금 자기가 불리하다는 거 알고 자살 시도한 거 아니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발광하는 모습을 보니 고통스러워 보이기는 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서동연은 정강필의 살점을 한 점씩 저며도 시원찮을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정강필에게 그런 분노를 느끼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무조건 생포해야 해. 이현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강필의 꼬리를 밟았다고 통신 아티팩트를 통해 한수호에게 얘기했을 때 그가 서동연에게 한 말이었다.

서동연은 그 말을 듣고 무언가 이현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예감했다.

안 그래도 이현은 정강필에게 납치당해 끔찍한 실험을 당한 처지였다. 정강필이 그때 했던 짓 때문에 이현이 위험에 처한 걸지도 모른다.

김진수도 정강필이 만든 독에 당해서 사경을 헤매지 않았던가.

이현에 대한 생각까지 닿자 서동연은 미친 듯이 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흰자위의 실핏줄이 다 터지도록 힘을 줘 벽을 두들겼다. 주먹 위로 피가 흐르고 발목에서도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않았다.

서동연의 광기가 전염된 하프 좀비들도 제 몸이 망가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달라붙었다. 손발 할 것 없이 벽을 두들길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했다.

한참 동안 위태롭게 흔들리던 벽이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갔다.

파지직―.

마침내 벽 위에 그어져 있던 금들이 한자리에 얽혀 들어가며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강필!”

“크윽, 흐으…….”

서동연이 정강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강필은 이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정강필의 주변은 그가 정신없이 손을 댔던 실험 도구들이 널브러져 엉망이었다.

서동연의 발아래에서 실험 도구 하나가 엉망으로 깨졌다. 다가가는 소리가 들릴 텐데도 정강필은 괴로운 신음을 흘려 대며 땅바닥에 이마까지 박고 있었다.

“이 새끼 왜 이래?”

정강필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웠으나 당장이라도 죽을 듯 헐떡이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 뭔 주사를 처맞은 거야?”

약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서동연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머리카락에 엉겨 붙어 찝찝했다.

“끈 같은 것 좀 찾아 와.”

“네!”

서동연의 명령에 하프 좀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길게 숨을 내쉬며 흥분을 가라앉힌 서동연이 정강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야. 정신 좀 차려.”

검지 끝으로 정강필의 머리를 쿠욱, 쿡 찔러도 정강필은 푹 숙인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크흐흐흐…….”

“……와, 씨발. 방금 웃음소리는 진짜 무서웠다.”

그러다 갑자기 미친놈처럼 흐느끼듯 웃는 정강필 때문에 서동연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자신도 한 광기 하지만 어째 정강필에게는 한 수 밀리는 기분이었다.

“실패…… 실패했어…….”

실패라는 단어에 서동연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삐죽 솟아올랐다. 그가 손을 뻗어 정강필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뒤로 꺾었다.

“뭐야, 너. 눈동자 색이 왜…….”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는 정강필의 눈동자 위로 찬란한 황금빛이 감도는 게 보였다. 서동연은 이 빛을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매달렸는데…… 실패할 줄이야…….”

주름진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몹시 탁했다. 서동연이 좋지 않은 예감에 정강필의 머리채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다들 저 새끼한테 가까이 다가가지 마.”

이변을 눈치채고 다가오려던 하프 좀비들도 뒤로 물러났다. 정강필은 서동연과 하프 좀비들을 둘러보면서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만 계속해서 흘려 댔다.

“흐흐……. 도대체 뭘 위해서 나는 이렇게까지…….”

황금빛이 도는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진 게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물론 원래도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 그토록 많은 살육을 저지른 거겠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광기가 정강필의 눈동자 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네놈, 신부가 가이딩을 할 때처럼 눈동자 색이 변하는 거지?”

서동연이 정강필에게서 물러난 이유는 간단했다.

이현이 가이딩을 할 때 새까만 눈동자가 꼭 저렇게 변했다.

순도 높은 금가루를 흩뿌린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하프 좀비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저놈이 이현과 같은 능력을 가진 거라면 자신을 비롯한 하프 좀비들은 저놈을 상대할 수가 없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손쓸 새도 없이 하프 좀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원거리 공격으로 S급 에스퍼인 정강필을 사로잡는 건 무리였다.

“내 눈동자가…… 어떻다고?”

그때 서동연의 말을 들은 정강필의 눈동자에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멸망한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처럼 실실거리더니 묘하게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강필이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흉하게 꿈틀거리던 혈관도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고개를 휙휙 돌리는 걸 보니 제 얼굴을 살필 무언가라도 찾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신부는 분명 눈 색깔이 저렇게 변하면 바로 가이딩 마력이 흘러나왔는데 말이야.”

그쯤 되자 서동연도 무언가 정강필이 이현과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정강필의 눈동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이 가이딩을 했을 때처럼 섬뜩한 감각은 들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정강필은 가이딩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원래부터 그는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이기도 했고.

“끈.”

“여기 있습니다.”

마력을 먹인 끈을 찾아낸 하프 좀비 하나가 서동연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가 원하는 물건을 내밀었다.

“일단 그 새끼 말대로 생포해야겠어. 데려가면 도대체 저 새끼 눈깔이 왜 저런 색으로 변했는지 신부가 알려 주겠지, 뭐.”

서동연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이쪽으로는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실험 영역은 도구의 명칭조차 제대로 모르는 수준이었으니까.

자신이 잘하는 걸 한 후에 저놈을 묶어서 이현에게 데려다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가 수많은 이들에게 그랬듯이 정강필 또한 실험대 위에서 낱낱이 해부되고 나면 지금 보인 이상 현상의 원인 또한 밝혀지리라.

“커흑……. 이게 왜…….”

정강필에게 이현과 같은 능력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는 여전히 S급 에스퍼였다. 그렇기에 서동연은 처음부터 전심전력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전력을 다했어도 처음부터 정강필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다만 자신은 부하들까지 여럿 데리고 있으나 정강필은 혼자여서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을 뿐.

“뭐야. 너무 싱겁잖아.”

서동연이 제 손에 잡힌 정강필의 목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마치 S급 에스퍼가 아니라 일반인을 제압한 듯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손에 힘을 잔뜩 줬다가 목뼈가 잘못되는 느낌이 선명해 다시금 손에서 힘을 풀어야만 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정강필을 제압해야지, 죽였다가는 수많은 이들이 복수의 대상을 허무하게 잃어버릴 테니까.

“말도…… 안 돼…….”

그럼에도 정강필은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손을 들어 올려 제 목을 감싼 서동연의 힘을 밀어내려고 노력했으나 서동연 입장에서는 날파리가 얼쩡거리는 것만큼 하찮은 힘이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실험이 실패한 것뿐만 아니라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너…… 에스퍼 능력을 잃어버렸구나?”

서동연의 양 입꼬리가 무서울 정도로 위를 향해 올라갔다. 가까이에서 번뜩이는 살기 짙은 눈빛에 정강필의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예전이었다면 웃으면서 넘길 수 있을 만한 살기였으나 지금은 고양이 앞에 내몰린 쥐가 된 것처럼 눈조차 마음대로 깜박일 수가 없었다.

찰나라도 시야가 차단되는 순간 서동연이 자신을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