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한수호의 꽉 쥔 주먹 위로 시퍼런 핏줄이 선명하게 불거졌다. 1초가 1분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이현이 최대한 빨리 약을 완성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김진수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상태였다. 깍지 낀 진표성의 손 위로 투명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형,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가슴 한가운데가 움푹 파일 정도로 아무리 압박해도 김진수는 무력하게 흔들리기만 했다. 진표성이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굳게 닫혀 있는 김진수의 눈꺼풀이 열리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가 다시 숨을 쉴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CPR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으…….”
“형!”
모두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 김진수의 호흡이 돌아왔다. 정신이 드는지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에 진표성이 서둘러 그의 위에서 내려와 회복 포션을 가져왔다.
심장 마사지를 하느라 갈비뼈가 다 부러졌다. 조심하기는 했지만 자칫 뼈가 장기를 찌를 수도 있었다.
“힘들어도 이거 마셔야 해.”
김진수가 진표성이 흘려 주는 회복 포션을 조금씩 받아 목 뒤로 넘겼다. 가늘게 열린 눈꺼풀 사이로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여기, 가 어디…….”
쉴 대로 쉬어 버린 목소리가 진표성의 귓가를 두들겼다. 오랜만에 듣는 김진수의 목소리였다.
진표성이 손을 들어 거칠게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손등에 물기가 묻어나자 흐릿했던 시야가 밝아졌다.
“연구소야. 조금만 있으면 해독약 완성될 거니까 정신 붙들고 있어. 알았지?”
김진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진표성이 이현을 돌아봤다. 이현도 김진수가 정신을 차린 걸 봤는지 손길이 더 분주해졌다.
플라스크 안에 들어 있던 약물을 페트리 디시에 떨어뜨린 후 마지막 점검을 했다. 원하던 반응을 얻어 낸 이현이 쓰고 있던 보안경을 벗어 던졌다.
“완성했어요!”
“하아, 다행이다. 진짜…….”
약이 완성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진표성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현아, 여기.”
한수호가 이현에게 주사기를 건넸다. 이현이 멸균작업까지 끝낸 해독약을 주사기에 서둘러 넣은 후 김진수에게 다가갔다.
“해독약 주사할게요.”
알코올 솜으로 팔을 문지른 후 그대로 해독약을 주사했다. 김진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약 기운이 빠르게 퍼지는 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면 피가 들끓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덮쳐 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었다.
버텨 낸 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동료들과 여동생 때문이었다. 독에 중독된 상태로 헤어졌으니 동생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감긴 김진수의 눈가를 따라 투명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김진수의 목과 얼굴을 뒤덮다시피 했던 검은색 핏줄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거칠었던 김진수의 호흡도 차츰 편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진표성은 김진수가 누워 있는 철제 침대를 두 손으로 붙잡고 숨을 골랐다.
“몇 가지 신체 반응 좀 확인해 볼게요.”
연구소장이 만들었던 해독약에도 김진수는 잠시나마 차도를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보다 더 극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이현도 처음 만들어 보는 약물이었다. 게다가 별다른 실험조차 거치지 못했다.
“……고마워요. 김이현 가이드.”
김진수가 제 몸을 살피는 이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현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결국 죽고 말았을 테니까.
이현은 제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빨리 만들어야 했는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 온 거라고 해도, 김진수의 심장이 멎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어 이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김진수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해독약을 만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거다.
이현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이라면 무슨 수를 쓰든 분명 해독약을 얻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저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죽을 위기를 수없이 겪었지만 결국에는 살았다. 누워 있던 김진수가 몸을 일으켰다. 이현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듯 엷게 미소 짓는 얼굴 위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몸을 풀자 한수호가 곁에 다가와 김진수의 정수리 위로 손을 툭 얹었다.
“고생했다.”
독 때문에 사경을 헤매는 김진수를 보면서 얼마나 제 무능함을 탓했던가.
짧은 단어였지만 그 안에는 김진수를 걱정한 한수호의 마음이 짙게 담겨 있었다.
“팀장님도 제 걱정 많이 하셨구나. 표성이는 눈도 발갛고.”
그제야 제 얼굴이 눈물범벅이라는 걸 자각한 진표성이 뒷걸음질을 쳤다.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자 눈물 대신 발간 기운이 얼굴을 뒤덮었다.
“나 안 울었거든?”
죽어 가는 동료를 걱정해 눈물을 흘린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이현의 시선도 제 얼굴에 닿자 귓불까지 붉어졌다.
어느덧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현이 이곳에 온 두 번째 목적을 떠올렸다.
“신체 반응을 살펴보니까 해독약은 제대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최소한 만 하루는 더 지켜봐야겠지만요.”
동공 반응, 체온, 맥박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현이 채혈 도구를 꺼내 와 김진수의 앞에 섰다.
“채혈해서 몇 가지 반응만 더 살펴볼게요.”
“네.”
김진수의 혈액을 채취한 이현이 진표성과 한수호를 돌아봤다.
“저는 이제부터 좀비 치료제를 만들게요.”
실험에 집중하려면 혼자 있는 편이 나을 터. 치료제에 필요한 재료를 채취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꺼려졌고.
한수호라면 분명 반대할 테니까.
“김진수 에스퍼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예요. 연구소 내에 휴게 공간도 있을 거예요. 세 분은 거기에 계시는 게 어떨까요?”
한수호는 이현이 자리를 피해 주길 원한다는 걸 눈치챘다.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일인데 이상하게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나랑 진수 형은 휴게실에 가 있을게. 팀원들한테 진수 형 깨어났다고 연락도 해야 하고.”
진표성이 한수호와 이현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먼저 몸을 움직였다. 이현의 곁에 계속 있고 싶지만 지금은 자리를 피해 줄 때라는 걸 알았다. 그가 김진수의 옆으로 가 손을 뻗었다.
“부축해 줄게. 일어나.”
“아냐. 내가 애도 아니고.”
김진수는 처음에는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 거절하더니 땅에 발을 딛자마자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오랜 시간 독에 시달려 신체가 약해진 거였다. 김진수가 별수 없이 진표성에게 의지해 걸음을 떼었다.
두 사람이 실험실을 빠져나간 뒤에도 한수호는 이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현아.”
한수호가 살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이현의 앞에 선 채 손을 들어 올려 수척해진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진표성처럼 이현도 김진수의 숨이 멎었을 때 눈물을 흘렸었다. 붉어진 눈가를 엄지로 문지르자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마.”
묵직한 목소리에 새까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현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렵게 고개를 들어 한수호와 시선을 맞췄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제 속내를 한수호가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그는 이현이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했다.
“나는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돼.”
좀비 치료제를 개발해야 인류에게 드리워진 멸망의 장막이 거둬진다고 해도, 만약 그게 이현의 안위를 위협한다면 한수호는 망설임 없이 이현과 함께 죽는 삶을 택할 거였다.
제게는 이현이 세상의 전부였다. 처음 그를 눈에 담는 순간부터 제 세상은 이현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니까.
한수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메마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그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 온기로 전해지도록.
이현이 눈을 감았다. 굴러떨어진 눈물이 맞닿은 입술 사이를 촉촉이 적셨다.
서로의 온기만 나누는 가벼운 키스였다. 한수호는 이현의 떨림이 잦아들고 나서야 입술을 떼어 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말랑말랑한 귓불을 매만지자 이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수호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이현이 왜 치료제 얘기에 이토록 망설이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한수호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