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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16)화 (116/133)

116.

이현의 부모님은 의심이 많았다. 이현을 실험체로 두기 전까지는 부부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핵심적인 연구 자료를 숨겼을 정도니까.

그러나 그들도 하나뿐인 아들, 이현 앞에서는 종종 경계심을 풀고는 했다. 어쩌면 이현이 아직 그들의 자리를 위협할 동급의 연구원이 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거는 립스틱 안쪽에 들어 있었고, 아버지는 낡은 벨트 버클 안쪽에 USB를 보관하셨어요.”

아마 이현이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USB를 보관하는 장소를 알 수 없었을 거다. 덕분에 부모님의 핵심 연구 자료는 정강필의 손에 들어가지 않고 이현의 수중에 남아 있게 됐다.

“협회와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정강필에게도 숨겼던 것 같아요. 좀비 치료제에 관한 연구 중 가장 핵심이 되는 자료들은요.”

1년간의 기억의 공백 때문에 이현은 한참 동안 방황했다. 부모님의 USB를 찾은 건 이현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당시에는 부모님의 죽음이 온통 수상스러운 점으로 가득했기에 뭐라도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몇 번 살펴보기는 했는데 당시에는 이게 어떤 자료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야만 풀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부모님이 정보를 암호화해 놨기 때문이다.

이현은 실험을 당하면서도 부모님이 나누던 대화 내용과 화면 위에 떠오르던 정보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자신을 실험체로 사용하지 않아도 좀비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이현은 아무리 명석하다고 한들 고작 학부생이었다. 부모님의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었기에 그들이 하는 얘기와 보이는 정보들을 무작정 외우는 게 최선이었다.

“……부모님을 닮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보통 사람이라면 오래전에 들었던 정보들을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일 터. 하물며 그 기억이 오랜 기간 잊고 있었던 것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현은 부모님이 나누던 대화가 바로 어제 들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것들은 뭐야?”

이현의 얼굴이 슬픈 빛으로 물들어 가자 진표성이 화제를 돌렸다. USB와 함께 들어 있던 것들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될 정도로 자그마한 약병이었다.

“옷장 안 비밀 공간에서 찾은 거예요. 혹시 몰라서 이 약들도 챙겨 놨거든요.”

“병에 숫자가 쓰여 있는데? 45……. 중간에는 지워진 건가?”

진표성의 말에 한수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김진수를 회복시킬 해독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고 이현이 언급했던 약과 넘버가 비슷했다.

“아무래도 코드 넘버 45619 약물을 저희 아빠가 개발한 것 같아요. 숫자가 지워져 있어서 기억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리기는 했는데. 아마 제 예상이 맞을 거예요.”

좀비 치료제도 치료제지만 해독약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아지트에 있을 것 같아 이곳에 오자고 한 거였다. 특수 처리된 약병이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안쪽의 내용물은 멀쩡할 테니.

“약을 만들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하는 거지?”

“네.”

“협회 안에…… 실험 도구들이 남아 있을까?”

필요한 재료들을 구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표성이 마지막으로 봤던 협회의 모습을 떠올렸다.

탈출한 건물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건물들도 폭발의 영향권에 들어간 건지 멀쩡한 것이 없었다.

설상가상 좀비 웨이브가 휩쓸고 지나갔으니 실험실이 멀쩡하게 남아 있을 확률은 0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이라면…… 종로구에 사설 연구소가 있기는 해요. 거기도 멀쩡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협회 쪽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럼 당장 움직이자.”

이현이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한수호에게 건넸다. 자신은 현재 실험복 하나만을 입고 있어서 손에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했다가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다른 물건은?”

“제가 모은 전 재산이기는 한데…….”

아지트 안에는 금괴는 물론 달러 뭉치도 있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또 한 번 겪고 났더니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챙기면 되지.”

한수호가 그림자를 움직여 아지트 내에 있는 귀중품들을 공간 확장형 아티팩트에 쓸어 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이현은 얼떨떨했다.

자신에게는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하나하나 챙겨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설 연구소 위치가 정확히 어디야?”

진표성이 창문을 열어 바깥쪽 동태를 살폈다. 여전히 1층 쪽에는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었고 골목길마다 좀비들 몇이 어슬렁거렸다.

“종로*길 38이요.”

“……혹시 주변에 내가 알 만한 건물 같은 건 없을까?”

이현이 정직하게 주소를 말해 주자 진표성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강필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재 길을 찾는 데 사용하는 아티팩트도 불통이었다. 대략적인 위치를 알고 움직여야만 했다.

“아. 종로구청에서 가까워요.”

“오케이. 그쪽이라면 내가 잘 알지.”

진표성이 김진수를 등에 업었다. 이현도 한수호에게 다가가 익숙하게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잠시 멈칫했던 한수호가 이현을 부드럽게 안아 들었다. 이현이 숨을 고르며 연구소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가장 먼저 김진수의 해독약을 만들어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좀비 치료제를 만들어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든 반전시켜야 한다.

‘……치료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약의 핵심 재료 때문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정강필이 먼저 창문을 통해 바깥쪽으로 튀어 나가고, 이어 한수호가 창문턱에 발을 올렸다.

“눈 감고 있어.”

“네.”

다정한 말에 이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수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다면 지금 숨기고 있는 부분을 말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을 테니까.

* * *

“다행히 필요한 도구들은 있어요.”

종로구에 있는 사설 연구소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협회가 무너진 후 인간들의 영역에도 좀비들이 침범했다.

그 때문에 원래는 좀비 한 마리도 없던 곳이 온갖 좀비들로 들끓었으나 한수호와 진표성이 능력을 아낌없이 사용한 덕분에 금방 처리할 수 있었다.

이현이 중간중간 두 사람에게 방사 가이딩까지 해 준 터라 몸의 피로감도 덜했다.

마침내 멀쩡한 실험실 하나를 찾았다. 연구소도 좀비 떼의 습격을 받아 엉망이었으나 실험실이 두꺼운 문으로 보호되고 있어 다행이었다.

보안장치가 있기는 했지만 진표성이 아예 문을 부숴 버렸다.

이현은 한수호가 바닥에 내려 주자마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필요한 것들을 찾았다.

“얼마나 걸릴까?”

“……최소 30분이요.”

배합 방법도 알고, 필요한 약물도 있지만 혹시 모를 오차를 줄이기 위해 여러 번 실험하는 게 나으리라.

“흐으, 아……!”

“조금 더 빨리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은데.”

오랜 시간 버텼다. 그런데 이제 정말 한계가 오는 건지 김진수의 얼굴 위로 새까만 핏줄이 불룩불룩 튀어 올랐다.

눈가를 비집고 핏줄기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현이 식은땀이 배어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해독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

“아니에요. 제가 혼자 하는 게 더 빨라요.”

힘을 쓰는 일이 필요했다면 한수호와 진표성에게 부탁했겠지만 실험 도구들만 사용하는 일이었다.

해독약에 들어가는 약물이 단 1그램만 잘못되어도 약의 효과가 아예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혼자 움직여야 했다.

이현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최대한 빨리, 실수 없이 해독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손끝마저 가늘게 경련했다.

“으으아……!”

“진수 형, 조금만 더 버텨 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입 안이 바짝 메말라 갔다. 실수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약을 다시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시간 동안 김진수가 잘못될 가능성도 존재했다.

“끄윽…….”

결국 김진수의 숨소리가 끊겼다. 입가에 피 섞인 거품 침까지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진표성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견디면 이현이 해독약을 만들어 줄 텐데. 지금껏 잘 버텨 왔으니 아주 조금만 더 버티면 됐을 텐데.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닦을 겨를도 없었다.

“진짜 이대로 떠나가면 나 형 죽어서도 안 볼 거야……!”

진표성이 김진수의 위에 올라탔다. 양손을 깍지 껴 심장께에 올려놨다.

체중을 실어 압박하기 시작하자 갈비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났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제발, 제발……!”

이현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장 핵심적인 약물인 코드 넘버 45619를 스포이트로 한 방울 플라스크 안에 넣었다.

아버지의 USB와 함께 있던 약물이 정말 이현이 찾던 약물이 맞는지 확인하느라 시간이 더 소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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