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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15)화 (115/133)
  • 115.

    한수호가 진표성이 가리킨 건물의 외벽에 발끝을 박아 넣으며 순식간에 건물 위로 올라갔다.

    “캬하아……!”

    옥상 위에는 썩다 못해 말라비틀어져 가는 일반 좀비 하나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무릎 위까지 돌돌 말린 바지 밑으로 살점을 뜯어 먹혀 너덜너덜한 다리가 보였다.

    옥상 문 앞에는 널브러져 있었을 자재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피죽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얼굴을 보니 좀비에게 물린 후 이 안에 숨어들었던 모양이다. 입 주변이 깨끗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이마 아래 희번덕거리는 눈알이 이상하게도 죽고 싶어 아우성치는 걸로 보였다.

    “이제 편히 눈 감으세요.”

    그림자를 움직여 좀비의 턱 아래를 꿰뚫었다.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던 인영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저쪽 옥상에는 좀비가 꽤 많아.”

    건물들 높이가 엇비슷하고 건물 사이의 거리가 채 2미터도 되지 않을 만큼 좁았다. 한수호와 진표성의 능력이라면 가벼운 발돋움 한 번에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문제는 지금 일행이 서 있는 옥상과 달리 이현의 아지트가 있는 건물과 그 옆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는 좀비들이 열댓은 모여 있다는 것.

    “아무래도 옥상으로 피신했다가 그중에서 감염자가 나와 다 감염된 것 같지?”

    당시 상황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서대문구가 좀비들 영역으로 넘어가고 난 후 협회에서는 생존자 구출을 진행했다.

    에스퍼들이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으면 저들 중 몇 명쯤은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진표성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한수호가 능력을 사용했다.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진표성과 달리 한수호는 지금 거리에서도 수십의 좀비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으니까.

    “좀비들이 쓰러지고 난 뒤 바로 움직일 거야.”

    “알겠어, 팀장.”

    좀비들의 그림자가 일어나 제 주인의 머리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끄르륵…….”

    소음이 울려 퍼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한수호는 좀비들의 수만큼 그림자를 일으켜 한 번에 움직였다.

    동시다발적으로 바닥에 쓰러지는 놈들의 몸뚱이도 그림자로 받아 내 소음을 최대한 죽였다.

    이현의 시선이 한수호가 차고 있는 팔찌에 닿았다. 이곳에 오면서도 능력을 계속해서 사용했기에 폭주 위험 수치는 또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옅은 고통을 느낄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한수호의 얼굴 위에는 희미한 고통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알파 1팀의 팀장이라 경험이 많아 그렇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잃어버렸던 기억을 완전히 되찾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한수호는 이현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갖은 실험에 시달렸다. 실험은 대부분 고통을 수반했다.

    과거 수없이 고통에 시달린 탓에 작은 고통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이현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한수호에게 죄인, 그 자체였으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마. 좀비 치료제 완성하는 것만 생각해. 해독제랑.”

    한수호가 이현의 귓바퀴에 입술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 위에도 입술이 스치듯이 닿았다 떨어졌다.

    “두 사람, 임무 중에는 그런 애정 표현은 자제해 주는 게 어때?”

    옥상 난간에 올라 건너편 건물로 이동하던 진표성에게도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은 잘 보였다.

    이현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표성 말대로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진표성의 등에 업혀 있는 김진수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다.

    한수호가 얼굴을 못 드는 이현을 다독이며 진표성의 옆에 가 섰다. 진표성은 이미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물쇠를 끊어 냈다.

    “진수 형 데리고 있어. 내가 아래 내려가서 정리하고 올 테니까.”

    마침내 아지트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진표성이 문을 열기 전에 한수호에게 김진수를 맡겼다.

    “3층까지만 정리하면 돼.”

    이현의 아지트는 3층에 있었다. 진표성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수호가 이현도 바닥에 내려 줬다. 이현이 낯선 기분에 발을 굴려 봤다. 오랜만에 땅을 제 발로 딛는 기분이었다. 구해지고 난 후 한수호가 내내 이현을 안고 다녀서였다.

    “조심해요, 진표성 에스퍼.”

    이현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진표성에게 걱정을 내비쳤다. 그의 능력이라면 건물 안에 있는 좀비들쯤 금방 해치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혹시 모를 위험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그래.”

    누군가 걱정해 주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상대가 이현이라면. 이현이 한수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지만, 아직 제대로 표현도 못 한 감정이었다.

    상황이 여의찮아 제 감정을 자각한 이후에도 숨기듯이 꾹꾹 눌러 담아야만 했다.

    진표성이 문을 열고 계단에 발을 디디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제게도 기회가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캬하악!”

    “크히이…….”

    옥상에 우글거리던 수만큼 좀비들이 건물 내에 많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갈 수준도 아니기에 진표성은 민첩한 동작으로 좀비들 사이를 지나가며 머리를 꿰뚫었다.

    썩은 피가 손톱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불쾌했다.

    손을 털어 핏물을 떨어내면서 4층에 이어 3층 복도를 오가는 좀비들을 빠르게 해치웠다.

    1층에 좀비들이 몰린 영향인지 2층에는 좀비가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아래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표성이 올라오는 좀비가 보이지 않자 옥상으로 향했다.

    “3층 몇 호야?”

    “306호예요.”

    “이제 내려와도 돼.”

    진표성이 김진수를 어깨에 둘러메고 먼저 내려갔다. 이현이 맨발로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자 한수호가 재빠르게 그를 품에 안아 들었다.

    이현이 땅을 딛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잠시 내려놨던 것뿐이다. 바닥에 질척한 피와 날카로운 물체들이 가득한데 맨발로 걷게 할 수는 없었다.

    몸의 무게중심이 뒤바뀌어 놀란 것도 잠시. 이현이 익숙하게 한수호의 목뒤로 팔을 둘렀다.

    “비밀번호가 뭐야?”

    “아, 잠시만요. 제가 결계석도 설치해 놔서 그냥은 안 열려요.”

    먼저 도착해 있던 진표성이 잠금장치를 앞에 두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이현이 한수호의 팔을 두들겼다. 지문에 홍채까지 인식시키고 비밀번호 여덟 자리를 눌러야 열리는 문이었다.

    “이런 데다 아지트까지 만들어 놓고. 샌님이 의외로 강단이 있어.”

    이현이 진표성의 말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었다. 부모님의 유품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면 정강필에게 붙잡힌 순간 분명 다 빼앗겼을 테니.

    “그런데 이곳은 정강필한테 발각되지 않은 거야?”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현관문 안쪽은 평범한 자취방처럼 보였다.

    “저도 그 걱정을 하지 않은 건 아닌데…….”

    정강필은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었다. 이현도 내심 이곳까지 오면서 정강필이 제 아지트에 이미 다녀갔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했다.

    한수호도 아는 장소였다. 정강필의 정보력이라면 이현이 이 아지트를 언제, 얼마를 주고 샀는지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제 생각에는 그때 정강필이 부모님 연구소에 있는 자료들 중 자신한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다 쓸어 갔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안쪽 공간은 침입의 흔적 없이 깨끗했다. 거금을 들여 결계석까지 설치한 보람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의 침입이 있었다면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이현이 마지막으로 아지트에 들렀던 모습 그대로였다.

    혼자서 생활하기에 딱 필요한 가구들만 깔끔하게 놓여 있는 원룸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이 방문하지 않아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을 뿐 멀쩡했다.

    “그러니 제 아지트를 뒤질 생각은 하지 않았겠죠.”

    이현은 연구소에서 구출된 후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을뿐더러 부모님이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상황이었으니까.

    이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이현이 연구소에 갔을 때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미친 사람처럼 연구소 안을 뒤지고 다녔다. 지하 실험실부터 부모님의 개인 연구실 안까지.

    정강필과 협회 측에서 연구소 내에 있는 자료를 다 가져가며 보안 장치를 해제해 둔 덕분에 둘러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가 놓친 건…….”

    이현이 아지트 안에 들어가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대 아래쪽 바닥에 금괴와 아티팩트 들이 놓여 있기는 하지만 그건 지금 이현에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부모님의 버릇을 제일 잘 아는 건 저였다는 거예요.”

    이현이 샤워기 헤드를 분리했다. 길쭉한 공간 안에 투명한 비닐로 감싸 놓은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뭐야?”

    “부모님 연구 핵심 자료들이요.”

    비닐로 꽁꽁 싸 놓은 건 자그마한 약병들과 새끼손톱 크기만 한 USB 두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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