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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12)화 (112/133)

112.

“저도 돕겠습니다.”

임태한도 능력을 사용해 한수호에게 힘을 보탰다. 아직 콘크리트를 지탱하고 있어 많은 힘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힘을 합쳐야만 했다.

이나리와 이낙균은 도움이 안 돼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서동연은 팔짱을 낀 상태로 진표성이 위쪽까지 올라가 직접 힘으로 밀어 내는 걸 바라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에스퍼들 능력이 편하긴 하네.”

에스퍼였던 이들도 좀비가 되면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건 일반 좀비에서 하프 좀비가 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만약 하프 좀비들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무리 서동연의 능력이 대단하다 한들 생매장당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죽기 직전에 간신히 잔해 더미를 뚫고 올라가 살든지. 이렇게 여유롭게 서서 에스퍼들이 길을 뚫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뭐라도 좀 하죠?”

그런 서동연의 모습이 이나리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적이었던 놈이 아군으로 둔갑해 있는 상황도 짜증 나는데 혼자만 외출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작게 휘파람까지 부니 기가 찼다.

“도움 안 되는 건 그쪽이나 나나 마찬가지 같은데.”

“뭐라구요?”

하지만 서동연이 이나리의 말 한마디에 주눅들 성격이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얄밉게 눈매를 접어 보이면서 방싯방싯 미소를 짓자 이나리가 들고 있는 채찍이 마력을 머금고 뻣뻣하게 위로 솟아올랐다.

“누나, 싸우지 마요.”

황두학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와중에도 이나리를 만류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했다가는 어렵게 뚫고 있는 통로가 다시 막힐지도 모른다.

제가 얼린 부분에도 충격이 간다면 잔해 더미가 빈 공간을 뚫고 터져 나올 수도 있었고.

“그래. 그러다가 이마에 주름져요. 벌써 눈가에는 주름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황두학도 이어지는 서동연의 말에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매를 버는 성격이란 무엇인지 보여 주는 듯 서동연의 입담은 사람의 신경을 살살 긁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안 그래도 이나리는 올해 들어 눈가에 주름이 좀 생긴 것 같다면서 우울해했다. 황두학을 붙들고 한참이나 제 외모가 작년과 비교해 얼마큼 달라졌는지에 대해 물어보며 들들 볶았다.

“서동연, 그만.”

한수호의 서늘한 시선이 서동연에게 닿았다.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다 쓰는 터라 심장이 욱신거릴 지경인데 한가하게 시비나 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머리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 너랑 한배를 탔다고 해서 부하가 된 거는 아니거든?”

서동연은 한수호의 명령조에 더 환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묵직한 살기에 이낙균이 김진수를 품에 안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서동연 씨, 그만해요. 그쪽 말대로 우리는 지금 같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밀폐된 공간에 흐르던 미묘한 분위기는 이현이 말을 꺼내면서 흐트러졌다. 이현이 서동연의 인사에 웃어 줬던 건 자신을 그가 구해 줬기 때문이다.

정강필이 제게 주사를 놓으려 했을 때 그가 때마침 도착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가이딩할게요. 그러니까 서동연 씨는 최대한 저한테서 멀리 물러나 주세요.”

“뭐? 가이딩?”

이어진 이현의 말에 서동연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봤자 멀어질 수 있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새까만 잔해들뿐이었다. 잔해 아래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손과 발이 제 미래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아니, 신부야. 이렇게 나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그래도 신부 목숨 구해 주기까지 했는데?”

서동연이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이현의 가이딩 마력은 제게 치명적이다. 아무리 자신이라 하더라도 이현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다른 하프 좀비들이 그랬듯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갈 텐데.

이곳에서 인간이 되어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른 하프 좀비를 마주친 순간 산 채로 목이 뜯길 게 분명했다.

“제가 잘 조절해 볼게요.”

이현도 서동연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그에게는 한수호의 안위와 다른 에스퍼들이 더 중요했다.

삐빅, 삑, 삑, 시끄럽게 울려 대는 소리가 그들이 지금 얼마나 필사적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려 줬다.

아직 저 위에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헤쳐 나가야 하는 잔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안 될 지경이었다.

지금도 한수호와 임태한, 황두학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진표성은 저 위에 있어 제대로 살필 수 없으나 그 또한 한계까지 힘을 내고 있을 테니 폭주 위험 수치가 치솟고 있을 가능성이 크리라.

“아니, 그래도……!”

서동연이 더 만류하려고 했으나 이현이 방사 가이딩을 시작한 바람에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도 멀리 떨어질 수가 없었다. 등 뒤를 가로막은 단단한 잔해들 때문에.

“나도 참 중증이야.”

다른 놈이 이현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서동연은 정강필보다 놈을 최우선적으로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아직 하프 좀비들은 이현의 능력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지 잘 모르는 상태였다. 당시 이현의 능력을 목격했던 이들을 서동연이 죽였기 때문이다.

함부로 떠벌리지 못하도록.

이성적인 판단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만약 이현에 대한 정보를 하프 좀비들에게 풀었다면 다들 정강필과의 일보다도 이현을 죽이는 데 힘을 합쳤을 텐데.

처음에는 분명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현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동료였던 이들을 망설임 없이 죽일 정도로 마음이 커다래졌다.

“인간일 때의 마음이 살아나는 걸지도.”

하프 좀비가 되면 이성을 되찾지만 모두가 한번 말살됐던 마음까지 예전처럼 되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일반 좀비가 됐을 때의 기억 때문에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한 놈들도 많았다. 그런 놈들이 인육까지 망설임 없이 탐하는 거였다.

서동연도 하프 좀비가 된 후 인간이었을 때의 감정을 많이 잃어버렸다. 예전에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잎만 봐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신선한 피가 흩뿌려지는 장면을 봐야 잠잠했던 심장이 기분 좋은 울림을 내고는 했다.

그런 제 모습이 이런 세상에서는 살아남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사실 인간적인 마음은 살아남는 데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데 막상 이현을 알게 된 후부터 제가 변해 가는 과정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훨씬 더 세상이 다채로워 보인다고나 할까.

“일하는 모습은 더 섹시하네.”

이현이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에스퍼들을 가이딩하는 모습에 심장이 속절없이 뛰었다.

첫 만남 때 느꼈던 입술의 말캉한 감촉이 떠올라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제 본능이 위험하다고 끊임없이 경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이현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을 훔치고 싶을 만큼.

“이현아, 너무 무리하지 마.”

“……괜찮아요.”

한 번에 네 사람을 동시에 가이딩하자 이현의 안색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하게 질려 갔다.

특히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진표성에게까지 가이딩 마력을 흘려보내는 건 쉽지 않았다.

이현이 욱신거리는 가슴 부근을 부여잡고 숨을 색색거렸다. 당장 기절하고 싶을 만큼 머릿속이 아득해져 갔지만 버텨 내야만 했다.

자신보다 에스퍼들이 더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한수호의 품에 편안히 안겨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몸을 사리는 건 비겁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팀장님, 빛이 보입니다.”

이현의 가이딩 덕분에 한결 능력을 사용하기 수월해진 임태한이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 눈을 빛냈다.

진표성이 위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위로 새파란 하늘의 일부가 보였다.

“다들 올라갈 준비 해. 내가 마지막으로 올라갈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후방에 서겠습니다.”

한수호가 다른 이들을 먼저 올려보내려고 했으나 임태한이 그를 만류했다.

“저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가장 먼저 몸을 움직인 건 김진수를 등에 업은 이낙균이었다. 김진수의 상태가 제일 심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가 그다음으로 올라가.”

“네.”

이어 이나리가 다시금 정신을 잃은 김종현을 채찍으로 휘감은 뒤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워낙 빠르게 올라간 터라 금세 시야에서 벗어났다.

“나한테 등은 못 맡기겠다는 눈치네. 오케이. 그러면 내가 먼저 올라가지. 신부야, 위에서 보자.”

남아 있는 이들의 시선이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몰리자 서동연이 강지우를 한 팔에 안아 든 후 가볍게 땅을 박차고 위로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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