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었다. 이미 연구소장이 그가 시킨 일이라고 자백했다.
그가 거짓말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죽을 위기에 처하면서까지 비밀을 지킬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잃었던 기억마저 떠올리고 싶게끔 해 드려야겠네요.”
한수호의 무감한 눈이 정강필의 얼굴 위를 배회하다 그의 품속으로 향했다. 그가 정말로 해독약을 가지고 있다면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서 뺏으면 될 일이었다.
“이런.”
정강필의 그림자가 일어나 그의 팔을 뒤로 꺾어 고정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도 정강필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능력을 일으켰다.
파지직―.
그를 붙잡고 있던 그림자가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인데도 정강필의 공격에는 타격을 입었다. 그림자를 움직이는 한수호에게도 공격의 여파가 미쳤다.
“형…….”
신음을 억눌러도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은 숨길 수 없었다. 이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한수호를 살폈다.
한수호가 상대하는 이가 하프 좀비라면 가이딩 마력이라도 사용할 텐데 그는 에스퍼라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폭주 위험 수치를 낮추는 결과를 낳아 도와주는 꼴이 돼 버리고 말 테니까.
“괜찮아, 이현아. 눈 감고 있어. 금방 끝낼게.”
한수호가 이현을 품에 추슬러 안으며 그를 다독였다. 오랜 시간 실험에 혹사당한 몸을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찮았다.
이현은 제가 불안한 티를 내지 않아야 한수호가 전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도움은 되지 못할지언정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이현의 숨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자 한수호가 본격적으로 정강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잘하는구나.”
정강필은 한수호의 곁에서 대부로 있는 동안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한수호는 오랜 시간 실험체로 갇혀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상식부터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한 명의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식부터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냉정해질 땐 한없이 냉정해져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자신과 그 사이에 쌓여 있는 애틋한 추억이 많은데도 자신을 공격하는 손속에는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안배해 둔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다.”
일렁이는 그림자와 정강필의 능력이 격돌하는 모습은 새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내리치는 벼락 같았다.
두 사람의 전투 때문에 근처에 있던 다른 이들이 피해를 봤다. 그림자의 힘에 사지가 잘려 나가거나 정강필의 능력에 통구이가 되어 갔다.
한수호가 정강필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주변에 나뒹구는 이들의 그림자까지 끌어당겨 그를 옥죌 감옥을 만들었을 때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뭐, 뭐야?”
지금까지 일어났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굉음이 사방에서 울렸다. 단순히 폭탄 한 개가 터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공간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천장과 지반 전체가 뒤흔들렸다.
“또 보자, 수호야.”
당황한 이들 속에서 정강필만이 태연했다. 한수호가 그를 붙잡기 위해 그림자를 일으켰으나 천장이 무너지는 상황이라 자신과 이현을 보호하기 위한 힘으로 돌려야만 했다.
“아아악!”
“살려 줘……!”
아수라장이었다. 하프 좀비들 중 능력이 약한 이들은 무더기로 쏟아지는 잔해에 말 그대로 육편이 되어 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건 익숙했다. 그러나 한수호도 지하에 있다가 무너져 내리는 건물 아래 깔릴 위험에 처한 건 처음이었다.
“팀장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수호가 이현을 보호하며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필 때였다. 임태한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잔해 더미를 그림자로 밀어 내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임태한이 거대한 콘크리트 하나를 지탱한 채 알파 1팀과 서동연, 강지우를 보호하고 있었다.
“우리도 사, 살려 줘……!”
“어딜.”
근처에 있던 다른 하프 좀비들이 그 안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서동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서동연은 하프 좀비가 근처에 오기만 하면 머리통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잔해에 깔려 죽느냐, 아니면 서동연에게 머리가 터져 죽느냐의 선택이었다.
서동연 근처에 가면 죽을 확률이 100퍼센트지만 어떻게든 무너져 내리는 잔해를 헤치고 지상으로 올라가면 살 가능성이 있었다.
서동연 덕분에 임태한이 만든 공간에는 아군만 남게 됐다.
“크윽…….”
임태한의 관자놀이에 새파란 핏줄이 튀어 올랐다.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건지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부팀장님, 잠시만요!”
황두학도 서둘러 얼음 기둥을 만들어 내 임태한이 바람의 힘을 움직여 받치고 있는 콘크리트를 지탱했다.
진표성도 중간 쪽으로 가 힘을 보탰다. 팔과 다리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치 산 하나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무게감에 근육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무게도 무게지만…… 공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빨리 지상으로 나가는 활로를 뚫어야 할 것 같습니다.”
황두학의 도움으로 잠시 숨을 돌린 임태한이 한수호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이거 진짜 쉽지 않겠는데?”
서동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다가 손에 묻은 피가 얼굴에 잔뜩 발라진 걸 알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프 좀비들의 비명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걸로 보아 아직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미 문 앞까지 가는 공간은 건물 잔해에 꽉 막혀 있었다.
수십 층의 건물이 무너져 내려 쌓인 무게는 아무리 S급 에스퍼라고 해도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곳에 모인 이들의 능력이 하나같이 대단하다는 거였다.
그 때문에 아직 버티고 있는 거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힘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으으…….”
“진수야!”
산소까지 부족해지자 김진수의 상태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낙균이 김진수의 볼을 두들기며 그를 깨워 보려고 했으나 점점 숨소리가 희미해져만 갔다.
“씨이발…….”
이낙균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눈두덩이를 거칠게 문질렀다. 에스퍼로 각성한 후 이토록 무력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결국 정강필에게서 해독약을 얻지 못했다.
알파 1팀이 다 모였는데도 그놈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서.
“이쪽 방향으로 내가 먼저 길을 내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한수호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팀장이라면 팀원들의 안위를 지켜 줘야만 한다. 김종현이 배신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해 황두학이 위험에 처했고, 이제는 김진수마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정강필의 야욕을 눈치채 그를 막아 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후회한다고 한들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자신과 동료들을 생매장하려는 건물 잔해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한수호가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쐐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그림자가 잔해 더미를 가르고 위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공간이 만들어지고는 있었으나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힘이 요구됐다.
한수호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수 미터가량 위로 쑤욱 올라갔으나 그다음부터는 50센티미터씩 움직이는 데만도 처음과 같은 힘이 필요했다.
“최소 지상까지는 뚫려야 빠져나갈 수 있는 건데…….”
도와주고 싶으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서동연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묵직하게 내려앉는 공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주변을 얼릴게요.”
한수호가 위쪽으로 공간을 만들어도 흙이 다시 뚫린 공간을 막으면 소용없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황두학이 능력을 사용해 통로 양옆을 얼려 갔다. 위에서 내려앉는 무게를 버티는 건 아니지만 양쪽에서도 잔해의 무게가 가중됐다.
황두학의 얼굴도 빠르게 창백한 빛으로 물들어 갔다.
“나도 저런 능력을 가져야 했어.”
이나리의 눈에 황두학은 아직 병상에 누워 요양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런 애가 폭주 위험 수치가 빠르게 올라가는 게 보일 정도로 능력을 사용하니 심정이 말이 아니었다.
“내 말이.”
제 능력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는 건 진표성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처럼 콘크리트를 받치는 건 할 수 있지만 저 위를 날아오르는 건 불가능……한가?
“두학아. 옆에 발판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지?”
“발판이요?”
“응. 내가 저 위로 올라가서 밀어 올리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본래 그림자는 만질 수 없지만 한수호가 마력을 흘려 넣은 그림자는 다른 이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큼 만지는 것도 가능했다.
“해 볼게요.”
황두학이 진표성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했다. 어느새 한수호가 뚫은 통로는 5미터를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