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A급 에스퍼가 지독한 살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S급 몬스터를 지척에서 마주쳤을 때보다도 더한 살기가 느껴져 순간이지만 숨통이 꽉 조여들었다.
“별 거지 같은 것들까지 죄다…….”
일대일의 상황이었다면 이런 공격 따위 제 몸에 닿기도 전에 피했을 거다. 그러나 제 몸은 하나뿐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놈들은 수십이었다.
가장 강한 정강필은 어느새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놈의 목을 산 채로 뜯어내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충동과는 달리 강지우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두기 위해 발을 재빨리 놀려야만 하는 현실에 이가 저절로 갈렸다.
“한수호, 이놈은 왜 이렇게 늦어.”
“죽어……!”
제 등을 공격한 놈에게 다가서려고 할 때였다. 측면에서 하프 좀비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얼굴이 익숙한 놈이었다. 서동연이 부리는 하프 좀비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그 때문에 서동연은 모든 이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이 정도로 낯이 익다는 건 최소 일 년은 동고동락한 사이라는 뜻이리라.
“커흑…….”
“미안하다, 야. 네 손에 못 죽어 줘서.”
서동연이 하프 좀비를 바짝 끌어당겼다. 귓바퀴에 입술이 스칠 정도로 고개를 숙여 여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프 좀비의 등 뒤를 뚫고 나온 손에는 여전히 펄떡거리는 심장이 담겨 있었다.
“큭…….”
심장을 터트려 버린 서동연이 이어서 하프 좀비의 턱 밑을 쑤셔 머릿속까지 헤집어 놨다. 바르르 경련하던 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아……. 윽…….”
그러나 하프 좀비 하나를 쓰러뜨리기 무섭게 양쪽에서 달려드는 A급 에스퍼 하나와 하프 좀비 두 놈 때문에 서동연은 팔 한쪽을 내어 주고 말았다.
이미 서동연이 걸치고 있던 옷은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근육의 경계가 뚜렷한 몸이 새롭게 흘러나온 피로 흠뻑 젖어 들어갔다.
아직 정강필에게 당한 상처가 몸에 잔뜩 남아 있었다. 몸 구석구석에 새겨진 지독한 화상 자국이 원래대로 회복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거기에 더해 왼쪽 팔 위로 뼈가 드러날 정도의 상처가 생겨났다. 놈들 중 하나가 서동연이 데리고 있는 강지우가 약점이라는 걸 알고 강지우의 정수리에 칼을 내리꽂았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공격을 그대로 받아 냈더니 단번에 피부가 갈라지고, 근육과 힘줄까지 끊어졌다.
그나마 뼈는 부서지지 않았지만 힘줄이 끊어진 탓에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기분 느끼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요즘따라 계속해서 느끼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치밀어오르는 감정.
정강필 때문에 서동연은 하프 좀비가 된 이후 몇 번이고 답답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무리들 너머에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놈의 얼굴을 보자 뿌득 소리가 날 만큼 턱에 힘이 들어갔다.
“……주인공처럼 나타나기는.”
그러다 정강필의 등 뒤에서 치솟는 새까만 그림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강필의 여유롭던 표정이 단번에 깨어지고 그림자와 뇌전의 힘이 맞붙었다.
한수호의 등장으로 공간에 정적이 일었다. 한수호가 정강필을 공격한 것뿐만 아니라 일대의 그림자들을 일으켜 에스퍼들과 하프 좀비들 또한 동시에 공격했기 때문이다.
“나도 저런 광범위 공격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심지어 한수호는 품 안에 이현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십의 적을 상대하는 모습에 서동연은 처음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신부도 정신을 차렸고.”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이현의 새까만 눈동자가 분주하게 주변을 살피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마침내 제게도 시선이 닿았을 때 서동연이 상황도 잊고 오른손을 들어 붕붕 흔들어 보였다.
“나 여기 있어! 신부야!”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이현이 제 인사를 받아 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던 모양이다.
이현이 오른손을 들어 마주 흔들어 보인 순간 서동연은 얼이 빠졌다.
이현은 서동연을 볼 때마다 항상 두려운 모습을 내비쳤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옅게 미소까지 띠는 얼굴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서동연이 들고 있던 강지우까지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도록 눈을 벅벅 문질렀다.
“……방금 내가 헛것을 본 건가?”
다시 이현을 봤을 때 입가에 띠어져 있던 엷은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현은 한수호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로 힘없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와, 나 갑자기 힘이 막 나.”
지친다는 감각을 잘 못 느꼈지만 끝도 없이 몰아치는 상황에 가슴은 꽉 막힌 듯 답답했었다.
그랬는데 이현의 미소를 마주한 순간 돌덩이라도 얹힌 듯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으으…….”
“이제 정신이 좀 드냐?”
“몸이, 흐윽, 너무 아파요…….”
때마침 강지우도 의식을 차렸다. 이건오가 인정사정없이 가슴을 꿰뚫은 탓에 회복 속도가 더뎠다.
가슴 쪽 상처뿐만 아니라 사지도 다 뜯겨 나간 상태라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기는 했지만.
“너 이 안에서 좀 버티고 있어.”
아파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헐떡이는 강지우를 서동연이 어린아이 옮기듯 가볍게 들어 구석진 곳에다 데려다 놨다.
한수호가 나타나 잠시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근처에서 나뒹구는 잔해물들도 끌어모아 강지우의 모습을 가린 뒤 곧바로 몸을 움직여 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힘이 넘쳐나니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다 쓸어 버릴 생각이었다. 한수호와 힘을 합치면 놈들을 다 해치우고 얼굴을 보기만 해도 이가 갈리는 정강필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다 들어오는 거야?”
이낙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능력을 일으켜 주변에 다가오는 이들을 공격했다. 폭발의 여파로 공간 안에는 분진이 가득했다.
이 상황에서는 제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게 낫다. 잘못하면 연쇄 폭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상층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과 벽 중 일부가 무너져 내려 공간 자체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흐으…….”
“김진수, 조금만 더 버텨. 해독약 바로 구해 줄 테니까.”
속이 타들어 갔다. 정강필에게 해독약이 있다는 걸 알아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하프 좀비와 능력자들이 끝도 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제 능력의 위험성 때문에 불꽃조차 제대로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몸이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김진수를 보호해야 돼서 그조차 쉽지 않았다.
이낙균이 답답한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으아아아! 이 새끼들이 진짜!”
제 속마음이 대신 터져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시선이 괴성을 지르고 있는 인영에게 닿았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적들이 서동연에게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푹 젖도록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여도 도통 줄어들지 않는 적의 숫자에 포효했다.
“부팀장님!”
그때 서동연의 뒤편으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임태한이 합류했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한수호가 대단하다지만 그에게도 서동연 못지않게 많은 수의 적들이 붙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많은 수가 붙어 있는 듯했다. 도와주고 싶어도 지금 자신의 처지로는 달려드는 적들을 해치우는 것만 해도 벅찬 터라 답답했는데.
이제 임태한도 나타났으니 상황은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눈이 안 보여.”
이낙균의 예상대로 임태한이 합류하자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 임태한은 전장을 두 눈으로 훑어본 후 곧장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나부끼듯이 흩날리다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순간 적들이 손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적들의 얼굴 주변이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일반적인 안개가 아닌 듯 그들은 시신경이 망가진 것처럼 탁한 안개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차 당황한 숨소리를 냈다.
“으아악!”
“아악!”
“쿨럭, 쿨럭…….”
시력을 빼앗긴 대가는 컸다. 서동연이 물 만난 고기처럼 그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여지없이 피 분수가 치솟았다.
꾸물꾸물 바닥에서 피어오른 그림자들도 모두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무기가 되어 움직임이 제한된 이들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강필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정강필이 지금과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알고 있는 서동연이 한수호를 불렀다.
“한수호! 저 새끼 막아!”
이곳은 정강필의 영역이었다. 한수호도, 서동연도 정강필이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공간에 침입자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 알 길 없는 폭탄을 설치해 놓은 놈이었다. 에스퍼에게 치명적인 독약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했으니 전세를 뒤엎을 만한 무기를 또 보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수호의 능력은 한발 늦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