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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107)화 (107/133)
  • 107.

    정강필은 원래 지니고 있는 것들만 잘 유지하고 살아도 되는 난놈 팔자였다.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깟 젊음에 눈이 멀어서 이런 일들을 벌였다는 게 참 욕심 많은 전형적인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제가 그동안 겪어야만 했던 고생이 떠오르자 눈앞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먼.”

    정강필이 보인 빈틈은 찰나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짧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 보고 있던 서동연만 눈치챘을 정도로.

    그 때문에 정강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을 때 뒤쪽에 서 있던 이들도 그를 따라 입꼬리를 비틀었다.

    불로불사.

    과거 그 대단했다는 진시황조차 얻지 못한 거였다. 세상에 몬스터가 나타나고, 좀비가 창궐했음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해답은 미지의 영역이나 마찬가지다.

    “불로불사라니. 나는 그저 하프 좀비들과 능력자들이 지금보다 더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라네.”

    양팔을 좌우로 벌려 어깨를 으쓱이는 동작이 무대 위에 선 연극배우처럼 작위적이었다. 정강필이 뒤에 선 자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전투태세를 갖춰 가는 무리에 서동연이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S급 에스퍼를 필두로 A급 에스퍼와 실력 좋은 하프 좀비들이 다수 포진된 무리를 다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이거, 잘못하면 좆 된다.

    서동연이 슬그머니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척하면서 오른쪽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수호와 그의 일행을 부를 생각이었다. S급 에스퍼들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니까.

    “한수호!”

    통신 아티팩트를 활성화하고 곧바로 한수호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피잇―.

    “나한테는 하프 좀비와 능력자들 사이에 화합을 이뤄 냈다고 극찬하더니.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야.”

    서동연을 예의 주시하던 정강필이 능력을 사용해 통신 아티팩트를 망가뜨려 버렸다. 섬광 같은 전류가 스쳤을 뿐인데 통신 아티팩트는 새까만 고물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찌릿한 감각이 남은 귀를 손으로 감싸 쥐며 서동연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다구리는 내 전문인데.”

    그동안 했던 제 행동들이 업보가 되어 돌아온 건가 싶을 만큼 자신을 둘러싼 적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수호를 부를 수 없다면 소란을 일으키면 된다. 이쪽에서 큰 소음이 발생하면 무슨 이변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한수호가 곧바로 달려올 테니까.

    “대가리부터 따야지.”

    “크윽…….”

    서동연이 폭발적으로 하반신의 근육을 움직여 정강필에게 달려들었다. 날아오는 꽉 쥔 주먹을 교차한 팔로 막아 낸 정강필이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서동연의 몸놀림이 얼마나 잽싼지 가드부터 올려야만 했다. 팔 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보아 뼈에 금이 간 듯했다.

    그러나 이 정도 부상은 수없이 겪어 봤다. 오히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강자와 맞붙으니 웬만한 일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심장이 격한 고동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능력을 끌어올리자 손안에 모든 것을 터트릴 수 있을 듯한 힘이 모였다. 다소 어둑한 실내에서 정강필의 능력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윽…….”

    지척에서 터진 뇌전에 서동연이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인 순간 배 쪽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콰아앙―.

    정강필의 주먹 한 방에 서동연이 벽까지 달아가 처박혔다. 그 전에 있었던 서동연과 이건오의 전투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았던 벽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으으…….”

    아직 부상을 회복하지 못한 이건오가 온몸으로 떨어지는 잔해에 앓는 소리를 냈다. 떨어져 나간 턱이 아물고 있었으나 워낙 상처가 심한 탓에 그는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서동연과 정강필의 전투에 휘말려 버렸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이건오의 상태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대장을 구해야 하나?”

    그때 하프 좀비들 쪽에서 소란이 일었으나 잠시뿐이었다.

    하프 좀비들 세계는 인간 세계보다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강하게 적용된다. 이건오가 급진파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지금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 전투가 끝났을 때도 숨을 쉬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건오가 서동연을 밀어 내면서 하프 좀비 측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건오는 아직 서동연만큼 하프 좀비들을 규합하지 못한 상태였다.

    여전히 무리 전체로 보면 서동연을 따르는 이들과 중립을 지키는 자들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이건오는 공포정치를 택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조일 땐 조이고, 풀어 줄 땐 풀어 줬던 서동연과 달리 그는 혹시라도 무리가 쫓겨난 서동연을 따라 분열될까 봐 불안에 떨었다.

    별거 아닌 이유로도 트집을 잡아 서동연과 유독 가까웠던 이들을 처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알게 모르게 이건오에 대한 불만이 쌓이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현재 서동연을 제압하지 못했을뿐더러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전 대장보다 약한 놈이 우리 대장이 될 수는 없지.”

    하프 좀비들은 이건오를 구하는 대신 서동연에게 집중했다. 서동연과 정강필이 맞붙을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피카츄도 아니고. 아파 뒤지겠네.”

    서동연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정강필에게 공격을 먹이면 반드시 살갗이 터져 나갔다. 상처가 나는 즉시 아물고는 있지만 상처가 생기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정강필의 능력이 번개를 다루는 탓에 피부가 지척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갔다.

    “아아악!”

    “커흑……!”

    여유롭게 미소를 띠고 있던 정강필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갔다. 누가 봐도 서동연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서동연은 생각보다도 불리한 상황을 오히려 역이용해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탁 트인 공간이 아니다 보니 서동연을 사방에서 압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정강필의 능력은 살상력이 높은 대신 직격당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영향을 끼친다.

    서동연은 정강필의 공격을 피할 때 교묘하게 다른 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때마다 정강필이 데려온 이들 중에서 한 명씩은 쉽게 회복하지 못할 부상을 입고 나가떨어졌다.

    “……내가 자네를 얕봤구먼.”

    정강필이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멀쩡히 서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전투가 지속되다 보면 서동연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발생할 것 같았다.

    그가 이곳에 다시 돌아온 건 이현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모은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실험을 진행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또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아예 이현을 좀비에게 물리도록 할 생각이었다. 해 볼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니 최후로 남겨 뒀던 방법을 쓸 수밖에.

    “아저씨, 눈빛이 어째 음흉하다?”

    서동연이 화상을 입어 수포가 생겼다 터지기 시작하는 손을 털면서 정강필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진짜로 정강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그의 머리통을 산 채로 열어 뇌를 끄집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놈 한 명에게 기만당한 이들의 숫자가 수천이다. 아니, 살아남은 인간들의 수까지 다 합친다고 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터.

    머리를 굴리는 듯 날카롭게 좁혀지는 정강필의 눈매가 거슬렸다. 서동연이 그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재차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러나 한발 늦고 말았다. 정강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순간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잔해에 서동연이 짜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 같이 이 안에 파묻혀서 뒈지자고?”

    “글쎄다. 너한테는 딱 어울리는 무덤이겠구나.”

    서동연조차 순간이나마 균형을 잡기 힘들 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서동연의 눈동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강지우에게 닿았다.

    하프 좀비라 하더라도 머리가 터지면 죽는다. 다들 눈치채지 못했지만 서동연은 알게 모르게 강지우에게는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몸을 움직였었다.

    “한 가지는 칭찬해 줘야겠네. 폭발음 덕분에 나도 아군이 생길 것 같거든.”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일반인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굉음이었다. 아직 이 지하에 있을 한수호의 귀에도 들렸을 게 분명하다.

    “그 전에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일세.”

    그 말을 끝으로 정강필이 아직 멀쩡히 유지되고 있는 공간의 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서동연에게 유리한 전장의 구조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다들 사정없이 몰아붙여.”

    “네!”

    정강필의 명령에 에스퍼들이 먼저 서동연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악문 서동연이 몸을 던져 강지우을 잡아챘다.

    자신이 강지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적들에게 알려서 좋을 게 없지만 그렇다고 이 난리 통에 가만히 놔뒀다가는 죽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퍼어억―.

    등 뒤에서 날아온 얼음덩어리가 서동연의 등을 강타하고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묵직한 통증에 흰자위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서동연이 공격을 날린 놈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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