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 말을 할 때 연구소장의 눈빛은 엘리트 의식에 찌든 사람 특유의 오만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결과를 내지 못하면 실적으로 연구원들을 들들 볶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과거 자신이 가장 경멸하던 말을 입에 올리자 짙은 혐오감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제 말에 그때와 달리 비굴함으로 가득 찬 눈이 일그러졌다. 그 꼴을 보자 가슴속을 가득 메운 혐오감이 짙은 한숨이 되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연구소장님도 이제 증명할 차례네요. 저한테 알고 있는 지식 다 전해 주세요. 지금 당장.”
이현이 식은땀으로 젖어 드는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그에게 명령했다.
잠시 연구소장의 입매가 우그러졌으나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살기에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현이 그가 전해 주는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귀담아들었다. 에스퍼 전용 독을 개발했다는 이야기에 기가 찼다.
이 나라에 에스퍼들과 그들의 폭주를 막아 주는 가이드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아직 좀비들에게 완전히 영역을 빼앗기지 않은 거였다.
특히 에스퍼는 직접적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가이드보다 더 인류의 존망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의문에 빠진 그는 금세 그에 걸맞은 답을 찾아냈다. 연구소장은 일반인이다. 뛰어난 머리와 더불어 그를 연구소장의 자리에 앉혀 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신의 능력은 보잘것없다는 말이었다.
‘제 힘만 믿고 날뛰는 놈들이 너무 많단 말이지.’
연구소장은 가끔 이현 앞에서 깊은 속내를 언뜻 드러낼 때가 있었다. 주로 협회에 가 회의를 하고 오면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에스퍼들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니 에스퍼에게 치명적인 독에 대해서 실험도 진행했겠지. 수석 연구원이었던 이현도 모르던 일이었다.
그 말인즉슨 연구소장이 정강필에게 의뢰받아 일부 연구원들만 데리고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핵심적인 약물이 없어요.”
연구소장이 말해 주는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질서 없이 퍼져 있던 정보가 조금씩 정립되어 갔다.
그러나 이현이 내린 결론은 지금으로서는 완벽한 해독약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임태한이 초조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이현의 어깨를 붙들어 왔다. 실시간으로 안색이 나빠지는 김진수를 보니 참기 힘든 무력감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이현이 나섰기에 연구소장도 완성하지 못했던 해독약을 어쩌면 그가 뚝딱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인내한 시간이 불안함으로 뒤바뀌어 밀물처럼 가슴속에 밀려들어 왔다.
“코드 넘버 45619. 해독약에 꼭 필요한 약물 넘버예요. 독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고요.”
“그 약물이 지금 어디 있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이낙균도 목소리를 높였다.
“연구소장이 지금 해독약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건…….”
이현이 침묵하자 연구소장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자신이 해독약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이들이 알면 바로 죽일까 봐 숨겨 놨던 이야기다.
있는 재료들로 어떻게든 해독약의 효능을 낼 수 있는 걸 만들어 봤으나 확실히 이현의 말대로 그 약물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맞네. 정강필한테 있어. 애초에 독약을 만들 때도 그놈이 주는 그 약물을 기초로 만들었고.”
이현도 말로만 들었던 약물이다.
상급 에스퍼에게도 치명적일 정도로 워낙 위험한 약물이었다. 지금까지는 연구소장이 홀로 개인 연구실에 보관하는 줄 알았다.
“결론은 정강필을 찾아내야 한다는 소리네.”
이낙균의 손에 잡힌 철제 침대가 포일처럼 우그러졌다. 연구소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핏방울과 지린내가 피어오르는 흔적을 마주하자 주름진 목이 발개졌다.
“알파 1팀 소속 에스퍼들을 전원 소환한다.”
한수호가 재빠른 결정을 내렸다. 정강필을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김진수도 살릴 수 있고,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도 치르게 할 수 있으니까.
“통신 아티팩트가 원활히 움직여야 하는데…….”
이낙균도 한수호의 명령에 동의하지만 이대로 떨어지게 된다면 서로 연락할 길이 요원하다. 그렇기에 지금 진표성도, 이나리도, 황두학도 다른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거였다.
“이것들 받아.”
그때 한수호가 서동연에게 건네받은 통신 아티팩트를 임태한과 이낙균에게 건넸다. 녹색 점이 깜박이는 검은색 이어폰을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거 맞죠, 이거?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서동연이 준 거야. 지금 바로 채널 연결하지.”
서동연이 준 물건이라는 말에 임태한과 이낙균 모두 찝찝한 눈치였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세 사람의 귀에 같은 모양의 이어폰이 자리를 잡았다.
―팀장님.
“잘 들려.”
―제 목소리도 들리십니까?
서동연이 호언장담한 대로 통신 아티팩트는 잘 작동됐다. 한수호의 귀에 이질적인 소음이 잡힌 건 그때였다.
―……호!
다른 신호가 한수호가 낀 통신 아티팩트에 날아왔다. 제 이름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정강필의 뒤를 추격한다고 헤어졌던 서동연의 목소리였다.
한수호가 채널을 바꿔 서동연과 연결한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찢어질 듯한 굉음이 들려오며 공간 전체가 진동했다. 안 그래도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던 연구소장과 연구원들이 자리에 주저앉아 비명을 질러 댔다.
“아아악!”
“사, 살려 줘…….”
바닥에 엎드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몰골이 신발 밑창에 밟힌 벌레보다도 같잖아 보였다.
“이현아, 이리 와.”
한수호가 서둘러 이현을 품에 안아 들었다. 이낙균도 김진수를 등에 업었다.
“흐으, 으…….”
“조금만 참아.”
다행히 김진수는 계속된 발작에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간간이 앓는 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임태한이 능력을 사용해 천장에서 떨어지는 잔해물들을 모두 한쪽으로 치웠다. 그런데도 잔해물들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팀장님, 아무래도 공간이 붕괴하려는 것 같습니다.”
날카롭게 벼려진 한수호의 눈이 소란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채널을 바꿔 서동연과 연결을 시도했지만 이어폰 너머 들려오는 건 지지직거리는 듣기 싫은 소음뿐이었다.
이변이 일어났다.
방금 전에 일어난 폭발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천장에서 잔해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 이용했던 자그마한 통로는 이 정도 폭발의 여파면 무너져 내렸으리라.
“움직인다.”
한수호가 이현을 품에 안고 먼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임태한도, 김진수를 등에 업은 이낙균도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이, 이보게!”
“저희는요?”
“이대로 가면 어떡해요……?”
버려진 짐짝처럼 남은 이들이 손을 휘저어 그들을 불러 봤지만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쫓아가려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으아악! 내 다리……!”
가장 먼저 움직이던 연구원이 제 다리를 붙들고 비명을 질러 댔다. 천장에서 떨어진 묵직한 잔해물이 그의 다리 한쪽을 으깨 놨다.
다리가 뭉개진 연구원을 시발점으로 여기저기서 고통 어린 신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임태한이 빠져나가면서 그가 능력으로 막아 주고 있던 잔해물들이 실험실 안에 와르르 내려앉았다.
“크헉…….”
연구소장이 머리를 붙들고 비틀거렸다. 손바닥에 진득하게 묻어나는 피가 느껴졌지만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 탈출구가 있는 방향으로 기어갔다. 으깨진 다리를 붙들고 울부짖는 연구원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열쇠 꾸러미도 강탈하듯이 잡아챘다.
“연구소장님, 저 좀 살려 주…….”
퍼억―.
연구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위에서 떨어진 잔해물이 이번에는 그의 머리통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제 앞으로 터지는 핏물과 뇌수에도 연구소장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난리 통에도 살아남은 이들이 연구소장의 뒤로 줄줄이 이어졌다. 다들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남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제 안위를 지킨 자들이었다. 선두에서 기어가는 연구소장이 이를 뿌득 갈았다.
“내가 여기서, 살아 나가기만 하면……!”
제게 이런 수모를 준 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다짐했다. 이번에 자신이 개발한 독약이 에스퍼에게도 효과가 톡톡히 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예 대량으로 생산해 놈들의 목에 목줄을 채워 버릴 생각이었다.
“후우, 드디어…….”
마침내 연구소장이 문 앞에 도달했다. 정강필이 열쇠 꾸러미를 줄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홍채와 지문으로 인식되는 최첨단 기계가 널려 있는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