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한수호는 S급 에스퍼로 각성한 후 오로지 이현만 바라보며 살았다. 이현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과거의 아픔을 잊고 미소 짓는 모습을 볼 때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연고가 한 겹씩 발리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자신마저 잊어버렸다고 해도 제 존재가 이현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 알기에 때때로 욱신거리는 심장의 아픔은 무시했다.
과거를 떠올린 한수호의 눈동자가 한마디로 정의되기 어려운 감정을 머금고 일렁였다.
홀로만 간직했던 그간의 시간이 맞닿은 시선을 따라 서로의 기억 속에서 휘몰아쳤다.
이현이 손을 들어 올려 엄지로 눈물이 가득 고인 눈가를 훔쳐 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와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추억이라 이름 붙이기도 힘들 만큼 처절하고 피로 가득한 기억이어도, 그 시간이 있기에 지금의 이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현은 그때 한수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미 한 줌의 흙이 되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진수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깨진 건 이낙균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면서부터였다.
“으으…….”
연구소장이 만든 해독약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내 시체처럼 정신을 못 차리던 김진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
눈을 떴는데도 불구하고 김진수의 눈동자는 흐릿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얼굴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너, 독에 당해서 계속 정신 잃고 있었다고. 내가 너 잃는 줄 알고 얼마나…….”
이낙균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볼썽사납게 김진수의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아서였다.
그동안 동료를 잃는 경험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김진수만큼 동고동락했던 동료가 사경을 헤매는 걸 곁에서 지켜본 건 처음이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심장이 제 존재감을 내세우며 시끄럽게 내달리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
연구소장과 연구원들을 살벌하게 압박하고 있던 임태한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가 손을 뻗어 땀에 젖은 김진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이마 뒤로 넘겼다. 시체 같던 혈색이 이제야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돌아왔다.
독의 후유증인지 기억이 엉클어진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질 증상이었다. 지금은 김진수가 죽지 않고 살아 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한수호도 이현을 안은 상태로 김진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순간이었다.
“쿨럭…….”
“……진수야?”
이낙균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정신도 차리고, 상태도 호전된 듯 보였던 김진수의 눈자위가 하얗게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덜컹, 덜컹, 덜컹―.
“씨발, 지금 왜 이러는……!”
이어 이낙균이 김진수의 상체를 붙들고 압박했다. 임태한도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겨 김진수의 다리를 옭아맸다.
그렇게 해야만 될 정도로 김진수가 눈을 까뒤집은 상태로 온몸을 거세게 떨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사지가 정상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꺾일 것만 같았다.
한껏 벌어진 입가로 허연 거품이 섞인 타액마저 흘러나왔다.
“연구소장.”
한수호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해독약을 투입해 회복되는 건가 싶었는데, 김진수의 상태가 돌연 악화됐다.
한껏 뒤로 휘어진 목에 불거진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크윽, 저, 저는 정말로 최선을 다한…….”
연구소장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목을 감싼 그림자의 손에 얼굴이 새빨갛게 질려 갔기 때문이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연구소장을 처리하는 데 유예 기간을 둔 건 그가 김진수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런데 되레 김진수가 발작을 일으켰으니 그의 가치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보다 못한 처지였다.
“사, 살려…….”
연구소장의 목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수호가 기도를 압박하는 걸 넘어 뼈를 분지를 기세로 힘을 준 영향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소리가 애원했다. 그마저도 목을 옥죄는 힘에 사그라들더니 끅끅거리는 소리만 냈다.
“일단은…… 살려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임태한이 한수호를 만류했다.
그도 당장 연구소장과 그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연구원들을 하나같이 머리와 몸을 분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강필을 찾아 제대로 된 해독약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김진수를 살려 둬야만 한다.
자신들에게는 의료 지식이 없었다. 독과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기본적인 응급처치에 관한 것 정도였다. 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크허윽…….”
임태한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연구소장의 목을 옥죄고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막혔던 숨이 일시에 터지는 느낌은 고통스러웠다. 칼날이 식도를 파고들고, 폐부까지 찢어발기는 고통에 연구소장이 목을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고통에 바짝 힘이 들어갔던 손에서도 피가 줄줄 샜다. 지혈됐던 상처에서 피가 터진 탓이다.
그의 주변으로 지린내가 공기 중으로 퍼져 갔다. 한수호의 서늘한 시선이 그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 갔다.
“히익……!”
“딸꾹, 딸꾹…….”
“사, 살려 주세요…….”
연구소장을 놓아준 그림자는 여전히 한수호의 주변에서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연구원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사이에도 김진수의 발작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제가…… 살펴볼게요.”
이현이 제 몸을 안고 있는 한수호의 팔을 가볍게 두들겼다. 한수호가 연구소장을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사이 이현은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깜박이는 시야 사이로 김진수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들어찼다. 덩달아 괴로워하는 임태한과 이낙균의 모습 또한.
자신을 안고 있는 한수호에게서도 짙은 분노가 느껴졌다. 김진수의 증상은 독약을 먹은 사람들과 유사했다.
독약 중에서도 테트로도톡신에 중독된 사람들과 유사했다. 일반인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심정지로 죽었겠지만 에스퍼의 신체이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거였다.
무엇보다 에스퍼를 중독시킬 수 있는 독약은 흔하지 않다. 자신이 알고 있는 독약은 아니니 연구소장이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흐으…….”
한수호가 김진수가 누워 있는 실험대 앞에 이현을 조심스럽게 내려 줬다. 이현도 오랜 실험에 시달린 영향으로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는 김진수를 보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천 좀 주시겠어요?”
이현이 눈치를 보는 연구원들에게 요청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이현도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네, 네……!”
연구원 중 한 명이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새하얀 거즈를 가져왔다. 경련이 격한 만큼 혹시라도 혀를 깨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현이 거즈를 뭉쳐 김진수의 입 안으로 집어넣기 전에 입 안 가득 들어찬 거품 섞인 타액을 거둬 내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으으, 으……!”
이현이 가벼운 응급조치를 취하는 와중에도 김진수는 계속해서 몸을 뒤틀었다.
“지금처럼 사지를 계속 잡아 주세요. 너무 강하지 않게, 움직임이 과하게 튀지 않을 정도로만.”
이현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임태한과 이낙균은 지금 제대로 보게 됐다.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김진수의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된 인사는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김진수의 팔과 다리를 부드럽게 압박했다.
“독약을 사용한 거죠?”
이현의 눈동자는 이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연구소장에게 향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입술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냉정한 눈빛으로 실험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떨리는 손을 굳게 말아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에 붉은 자국을 내고 나서야 어그러지려던 호흡이 차츰 가라앉았다.
“……맞아.”
“해독약을 주사했는데 거부 반응이 일어난 건가요?”
연구소장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정말로 억울했다. 기억과 지식을 총동원해 해독약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김진수도 차도를 보였다. 그런데 이토록 격한 거부 반응을 보일 줄이야.
정강필이 해독약을 다 가져간다고 했을 때 하나라도 남겨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연구소장은 이현이 움직이는 순간 에스퍼들이 흉포한 성정을 내리누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현에게 매달려야 한다.
연구소장의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이었다.
“나,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
그가 비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이현의 눈매도 한수호를 닮아 서늘하게 굳어졌다.
“최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언제나 결과가 중요하다.”
희끗한 정수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떨어져 내렸다.
“연구소장님이 항상 저를 포함한 연구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