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현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언제까지고 보듬어 주고 싶은데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간신히 몸을 숨기고 있으나 언제 들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피 냄새가 두 사람의 체취를 가려 주고 있지만 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두 사람은 현재 아슬아슬하게 표면만 얼어 버린 호수 위에 앉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신 혼자뿐이면 몰라도 이현까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심을 마친 한수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러나 막상 이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 그의 속눈썹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초점이 사라졌던 이현의 눈동자가 조금씩 맑은 빛을 되찾아 갔다. 흔들리는 시선이 코앞에서 보이는 한수호의 얼굴 위를 정신없이 배회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에 이현의 사고가 정지됐다. 서로의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거나 뺨을 어루만진 적은 있어도 입을 맞춘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잠시나마 주변의 상황을 모두 잊을 정도로 이현은 한수호가 주는 감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됐다.
“……이제 좀 괜찮아?”
이현의 호흡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 한수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에 여운이 남아 계속해서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지금은 인내해야 했다.
주먹이 쥐어지려는 손에서 애써 힘을 풀고 한수호가 이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말간 이마 위에도 입술을 붙였다 고개를 들자 이현이 멍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리는 게 보였다.
“……미안해.”
그제야 한수호는 자신이 이현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입을 맞췄다는 걸 깨달았다. 이현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입술을 훔치는 방법을 떠올린 건 제 욕심 때문이었다.
이번 일로 이현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초조해졌다. 참고 참았던 감정인데 왜 하필 이런 순간에 터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괘, 괜찮아요.”
한수호의 걱정과 달리 이현의 머릿속은 현재 혼란 그 자체였다. 이현은 학업에 충실한 학생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부모님처럼 연구원이 되고 싶었기에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현에게 좋아한다며 고백한 사람은 있었지만 이현은 한 번도 고백에 긍정으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이런 유의 접촉은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이현이 여전히 말캉한 감각이 남은 입술을 어물거렸다. 제 입술인데도 그 위에 한수호의 타액이 남아 있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은 여기서 빠져나가자.”
다행히 이현이 자신을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기에 한수호는 이현의 손을 꾸욱 쥐었다. 반드시 이현을 살려야만 한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끼히이이익―!”
이현과 한수호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가까워졌다가도 멀어지던 좀비의 울음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턱, 턱, 턱, 턱.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이현이 두 손을 들어 비명이 흘러나오려는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이 숨어 있는 천의 아래쪽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주둥이가 길쭉한 형상을 띠었다.
천 안으로 훅 끼쳐 들어오는 썩은 내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한수호가 손등뼈가 하얗게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주변을 살펴봐도 무기로 사용할 만한 게 없었다. 제 손이 물어뜯기는 한이 있더라도 좀비 몬스터의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끼히익!”
안쪽에서 맡아지는 살 내음에 좀비 몬스터가 고개를 치켜들어 천을 들춰내려는 순간이었다.
투콰콰콰콰―.
시끄러운 소리가 실험실 안쪽에서부터 강하게 공간을 울렸다. 위로 들렸던 천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고 지척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이현과 한수호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 안에 남은 생존자는 좀비들을 제외하고 한 사람뿐이었다.
“이 좀비 새끼들이―!”
두 사람의 예상은 맞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김태진이 가득 퍼져 있는 좀비들을 보며 기함하다가 실험실 내에 숨겨 둔 무기를 찾아 손에 든 거였다.
좀비들을 케이지 안에 가둬 놨다고 해도 언제든지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이현과 한수호가 빠져나가면서 케이지 문이 다시 닫힌 게 천운이었다. 좀비들은 김태진을 발견하고서도 케이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사실 이현을 가둬 둔 케이지는 뒤쪽으로도 빠져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은 김태진과 오유화의 지문으로만 열렸다.
좀비들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 무기를 손에 쥐었다.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마력 탄이 장전된 기관총이었다.
“크이익…….”
“크륵…….”
김태진의 조준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마력 탄에 머리를 꿰뚫린 일반 좀비들이 썩은 피를 허공에 흩뿌리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좀비 몬스터들은 일반 좀비들보다는 더디게 널브러졌다. 머리통만 날리면 되는 일반 좀비와 달리 놈들은 몸속에 박힌 마석을 깨트려야 했기 때문이다.
한 마리, 한 마리 마석의 위치를 조준해서 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김태진은 악을 쓰며 기관총을 난사했다.
“으아아아악―!”
김태진은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험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줘야 하는 아들은 한낱 실험체에 불과한 놈과 자취를 감췄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가 가득 들어찬 머릿속은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문 쪽으로 움직일 거야.”
천 더미의 한 부분을 들어 올려 실험실 내 동태를 살피던 한수호가 좀비들이 모두 김태진 쪽으로 몰린 걸 발견한 후 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현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한수호의 손을 붙잡았다. 한수호가 이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강하게 쥐었다.
맞닿은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두려움에 질식돼 빠르게 뛰는 이현의 심장을 다독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문 쪽을 향해 기어갔다. 이현이 잠시 김태진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김태진은 여전히 케이지 안쪽에서 몰려드는 좀비들에게 마력 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좀비들이 케이지 문을 열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저대로 둬도 안전할 것 같았다. 오유화는 이미 죽어 버렸다. 김태진만큼은 살아남아 반드시 죗값을 제대로 치르기를 바랐다.
그래야 자신도, 그동안 억울하게 죽어 간 수많은 사람들도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 테니까.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버텨.”
한수호가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이현을 다독였다. 이현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에게 입을 맞춰 정신을 차리게 했어도, 이현이 그동안 받은 충격은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있는 건 이곳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 때문이리라.
마침내 출입구에 도달한 한수호가 문을 열기 위해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타앙―.
뒤쪽에서 날아온 마력 탄이 한수호의 손 바로 옆을 강타했다. 실험실의 문은 두꺼웠다. 뚫리지 않은 대신 문 한가운데 움푹 파인 자국이 났다.
“형…….”
한수호가 자신을 부르는 이현을 다급히 제 품 안으로 당겨 안고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계속해서 날아온 마력 탄이 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사람이 맞으면 머리통이 날아갈 위력인데도 문은 우그러지기만 할 뿐 뚫리지 않았다.
“그 문, 어차피 너희는 못 열어.”
김태진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시 모습을 감춘 이현과 한수호의 흔적을 찾았다. 무한정으로 마력 탄을 쏠 수 있는 총이 아니었다.
여전히 케이지 주변에는 좀비들이 득시글댔다. 이미 수십이 썩어 빠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쪽에서도 나랑 유화만 열 수 있도록 설계해 놨으니까.”
보통 문은 바깥쪽에서만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잠금장치를 해 놓기 마련이지만 김태진과 오유화는 실험실 안쪽에서도 문을 열 수 없게끔 해 놨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실험체들이 두 사람의 손을 피해 문 쪽으로 달려 나갈 가능성이 있으니까.
지하에 만들어진 실험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은 출입구 하나뿐이었다. 출입구만 막으면 김태진과 오유화는 이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둘 다 나와.”
한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그 말인즉슨 김태진을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와야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형, 가만히 있어요.”
먼저 일어나려는 한수호의 손을 붙잡은 건 이현이었다. 김태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을 맞히기 위해 총을 연사한 것만 봐도 그는 수틀리면 곧바로 두 사람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한수호가 아니라 자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나으리라. 인정하기 싫어도…… 자신은 김태진의 하나뿐인 자식이니까.
“……아빠.”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진을 마주 봤다. 이현을 바라보는 김태진의 눈동자는 살기로 번들거렸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