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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98)화 (98/133)

098.

엉망인 바닥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이현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고 있을 여유 따위 없었다. 이현이 거친 손길로 안정제가 든 주사기를 손에 쥐었다.

이걸로라도 김태진의 몸을 찔러 그를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이현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이 갇혀 있던 케이지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을 지르는 김태진의 모습이 망막에 박혀 들었다.

창백해진 표정의 한수호 또한. 한수호의 얼굴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안색인데도 그는 고집스럽게 김태진을 온몸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이거 놓으라고, 새끼야……!”

비속어를 입에 올리는 자들을 비웃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김태진이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린 채 오른손을 전기충격기가 있는 방향을 향해 쭉 뻗었다. 제압 봉은 한수호의 손에 들려 꼼짝도 하지 않으니 그를 제압하기 더 쉬운 무기 쪽으로 시선이 갔다.

이현이 케이지 가까이에 당도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이현이 주삿바늘을 감싸고 있던 고무 뚜껑을 열었다. 김태진이 제게 다시 다가오는 이현을 발견했다.

한수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자신을 두고 가도 좋으니 이현이 먼저 이 지옥 같은 실험실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했는데. 착한 아이는 곧 죽어도 자신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주사기를 손에 든 이현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 경직돼 있었다. 한수호는 할 수 없이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김태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이현아, 우리 아들……. 아빠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아빠 좀 풀어 줄래?”

김태진은 그 순간까지도 이현이 자신이 아니라 한수호를 제압하기 위해 다가오는 거라고 착각했다. 모진 실험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이현의 눈동자를 아직도 기억하는 탓이다.

이현은 여전히 자신과 오유화를 부모라고 생각한다. 살려 달라고, 풀어 달라고 애원은 해도 원망하는 소리는 한 적이 없었다. 자신도, 오유화도 닮지 않은 아이다.

두 사람은 이현과 같은 처지에 처하는 순간 어떻게 해서든 제 부모를 먼저 죽일 생각부터 했을 테니까.

“아빠도…… 똑같이 느껴 봐요.”

김태진이 눈을 부릅떴다. 목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너…….”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현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한수호가 힘을 풀었는데도 김태진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제가 언제까지고 착한 아들일 줄 알았어요?”

이현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자신을 향한 김태진의 원망 어린 눈초리에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으나 진즉에 이렇게 해야 했다.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실험체로 삼을까. 이미 자신과 부모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형, 괜찮아요?”

이현이 손에 들고 있던 주사기를 내팽개쳤다. 정신을 잃어 가는 김태진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지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수호가 더 중요했으니까.

“……도망갔어야지.”

“제가 형만 두고 어떻게 혼자 가요.”

한수호를 부축해 일으켰다. 부자연스럽게 흔들리는 왼팔과 평소보다 두 배는 부풀어 오른 듯한 오른손에 이현의 눈매가 아프게 일그러졌다.

“제가 부축해 줄게요. 우리 같이 나가요.”

이현이 주사기만 챙겨 오는 게 아니라 회복 포션도 가져와야 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했다. 빨리 한수호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기가 될 만한 것만 챙겼다.

주사기가 있던 카트에는 회복 포션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이현의 몫으로 항상 챙겨 두었으니까.

이현이 한수호의 오른팔을 제 어깨 위에 걸쳤다. 자신보다 훨씬 큰 그를 부축하자니 쉽지 않았지만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회복 포션을 챙겨서 실험실 문만 열고 나가면 된다.

오유화의 핸드폰을 챙겼다. 안전한 곳으로 가 바깥쪽에 연락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부모를 제 손으로 직접 신고해야 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동안 이 안에서 죽어 나간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듯했다. 방금 전에 제 손으로 죽인 이를 포함해서 그들 모두 원한이 깊게 남아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크윽…….”

“회복 포션 금방 발라 줄게요. 조금만 참아요.”

이현이 신음을 흘리는 한수호의 얼굴을 초조하게 응시하며 그를 다독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형, 얼른 마셔요.”

마침내 회복 포션을 손에 쥐었을 때는 이현도, 한수호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수호가 제게 내밀어진 회복 포션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이현에게 먼저 내밀었다.

“……너 먼저.”

“저는 다친 곳 없어요. 얼른요.”

누가 봐도 한수호가 크게 다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제 몸을 먼저 생각하는 한수호를 보며 이현은 눈물 젖은 눈을 휘어 보였다.

부모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보살핌을 그에게 받았다. 자신은 그에게 해 준 것도 없고, 심지어 그를 이렇게 만든 부모의 자식인데도 그는 이현을 맹목적으로 아껴 준다.

이현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내리누르고 한수호에게 먼저 회복 포션을 먹였다. 자신이 먼저 회복 포션을 마시지 않으면 이현이 고집을 꺾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한수호가 순순히 입을 벌렸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간 게 아니면 김태진과 오유화는 한수호에게 회복 포션을 먹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화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머릿속이 지끈거릴 만큼 고통이 느껴지던 팔과 오른손에서 통증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한수호는 남은 회복 포션을 이현에게도 먹였다.

눈에 띄는 외상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회복 포션을 마셨다고 체력이 금세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몸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만큼 심했던 부상이 나으니 한결 몸이 가뿐해졌다.

“가자.”

한수호가 이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일어났다.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할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아직은 굳게 닫혀 있는 실험실 문을 향해 걸어갈 때였다.

“캬하아악!”

“크르르……!”

“크히익!”

등 뒤에서 께름칙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계속해서 실험실 안에 울리던 소리지만 한쪽에서만 시끄럽게 터져 나오던 소리가 지금은 사방팔방에서 들린다는 게 달랐다.

아직 실험실 문까지는 족히 수십 걸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이현과 한수호의 고개가 뒤쪽을 향해 휙 돌아갔다.

“혀, 형…….”

일반 좀비와 좀비 몬스터를 가둬 놨던 케이지 문이 열려 있었다.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유화와 김태진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의식을 잃은 상태인 게 맞는데…….

이현의 떨리는 시선이 오유화가 누워 있던 자리를 훑었다.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좀비들이 케이지 문 앞에 우글우글 모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좀비들 사이로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이 밝은 전등 아래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팔목에 걸려 있는 손목시계가 익숙했다.

‘엄마, 이거 생일 선물이에요.’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용돈 받은 거 모아서 샀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과외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까지 합쳐 산 선물이었다. 꽤나 고가의 물건이기에 모친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까지…… 왜…….”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괴물들이 득시글대는 케이지 문을 열었는지는 모른다. 물어볼 사람은 이미 좀비들에게 파묻혀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으니까.

“이현아!”

한수호가 멍하니 서 있는 이현의 팔을 잡아끌어 옆쪽으로 피했다. 오유화의 숨이 끊어진 탓인지 좀비들은 넓은 실험실 안을 배회하며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일반 좀비는 좀비가 된 지 오래된 개체들도 많아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문제는 좀비 몬스터들이었다. 네발형 좀비 몬스터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이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히익―!”

좀비 몬스터가 짜증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간발의 차이로 좀비 몬스터의 공격을 피한 한수호가 근처에 개켜져 있던 방수천을 펼쳐 자신과 이현의 몸을 가렸다.

방수천 위에는 마른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죽어 나간 희생자들의 피가 말라붙은 거였다. 다행히 좀비들은 마른 피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캬하아……!”

“키햐아악!”

“크륵…….”

아직 문까지는 거리가 제법 남은 상황이었다. 천 아래에서 숨을 고르던 한수호가 이현의 안색을 살폈다.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자신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반짝이던 눈동자가 죽어 버린 사람의 것처럼 탁했다. 한수호가 손을 들어 이현의 뺨을 어루만져도 이현은 놓아 버린 정신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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