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김태진의 몸이 한수호가 있는 방향으로 푹 숙어졌다. 한수호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김태진의 목뒤로 둘렀다.
“이거 안 놔?”
졸지에 한수호에게 상체가 속박된 김태진이 소리 지르며 몸을 뒤틀었으나 한수호는 몸이 흔들리면서도 꿋꿋이 버텼다.
“……도망가.”
한수호가 고개를 뒤로 돌려 겁에 질려 있는 이현에게 속삭였다. 김태진이 들어오면서 문이 열렸다. 오유화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이 기회다.
“같이 가요, 형…….”
그러나 이현은 한수호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이현이 고개를 젓자 한수호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어 보였다. 이현을 담아내는 눈동자에 따스한 빛마저 어리자 평소 표정 없는 그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바로 뒤따라갈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김태진은 몸부림을 멈추지 않았다. 손을 아래로 내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걸 보니 한수호를 제압할 다른 무기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얼른.”
이어 한수호가 강하게 말하자 이현은 결국 먼저 케이지 안에서 벗어났다. 바깥에서 김태진을 묶어 둘 만한 걸 찾아 올 생각이었다.
고작 케이지 안을 벗어난 것뿐인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실험에 시달리고 영양 성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터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실험이 끝날 때마다 오유화가 이현에게 회복 포션을 먹였지만 회복 포션은 만능이 아니었다. 회복 포션을 마셔 다쳤던 신체가 순식간에 회복되더라도 휴식할 시간은 필요했다.
그런데 김태진과 오유화는 이현의 모습이 겉으로나마 멀쩡해지면 연이어 다른 실험을 했으니 이현의 몸은 현재 깨지기 쉬운 유리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흐으…….”
이현이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몇십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200미터는 전력 질주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뭐라도 무기를…….”
불안한 시선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케이지 안에 닿았다. 한수호가 아직은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그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거였다.
이현이 쓰러져 있는 오유화에게 다가갔다. 오유화의 가운 주머니 안에서 김태진을 제압할 만한 무기를 찾을 생각이었다.
잠시 그녀의 안위가 걱정됐으나 이현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이현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은 한수호였다. 한수호와 함께 이곳을 탈출하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캬흐으…….”
오유화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가운 주머니 안을 뒤적거릴 때였다. 이질적인 소리가 이현의 귓가에 잡혔다.
앓는 듯한 울음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다른 케이지 안에 가득 잡혀 있는 좀비들이 내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는 떨어진 곳에서만 들려왔을 뿐이다. 좀비들은 여전히 케이지 안에 동물원 원숭이처럼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방금 들린 소리는 누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또렷했다.
“설마…….”
이현의 고개가 고장 난 기계처럼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움직였다. 철제 침대 위에 눕혀져 있던 시체가 어느새 두 눈을 부릅뜨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회색빛 눈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시체였던 이가 어느새 일반 좀비가 되어 깨어났다.
이현은 실험당하면서 부모님이 어떤 실험을 하는지 귀동냥으로 들었다. 두 분은 현재 개발하고 있는 좀비 치료제를 보통 사람에게 주입한 후 좀비 바이러스에 노출시켰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들이 실험한 사람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렸다. 일반 좀비로 변화하지도 않고 그대로 심장이 멎은 거였다.
실험체 중 일부는 검은 핏줄이 온몸을 뒤덮은 증상을 보이면서도 숨을 이어 갔으나 그마저도 만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발견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모두 좀비들에게 물리면 그들 중 하나로 변했으니까.
하지만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다른 연구소에서도 이 정도 효과를 보이는 치료제는 이미 만들어 냈다. 협회와 정부는 확실한 좀비 치료제를 원했다.
좀비에게 물려도 그들처럼 변하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는 치료제.
완벽한 치료제를 위해 김태진과 오유화는 이현을 계속해서 실험했다. 완성된 약은 비밀리에 제공받은 다른 실험체들에게 주사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실험체가 좀비로 변한 적이 없기에 김태진과 오유화는 실험체의 입을 막아 두지 않았다. 허리와 팔다리를 묶어 두기는 했지만 일반 좀비의 몸부림에 끈이 점점 헐거워지고 있었다.
“캬하아아―!”
여전히 오유화의 찢어진 이마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처가 꽤 깊기에 그녀의 얼굴 주변으로는 동그란 피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였다.
좀비로 각성한 후 지척에서 맡아지는 신선한 피 냄새에 일반 좀비가 철제 침대가 요란하게 흔들릴 만큼 몸을 뒤틀어 댔다. 하필 일반 좀비가 누워 있는 침대는 바퀴가 달린 형태였다.
이번에도 죽어 버리면 시체를 처리하기 용이하도록 이동형 침대 위에 눕혀서 실험했기 때문이다.
오유화의 주머니는 샅샅이 뒤져 봤으나 빈 사탕 껍질과 볼펜, 핸드폰이 다였다. 이현은 혹시 몰라 핸드폰은 챙기고 카트 위에 놓여 있던 메스를 손에 쥐었다. 식은땀 흐르는 피부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크히이!”
이현이 오유화의 가운 자락을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훨씬 작은 몸이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어 무거웠다.
팔이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녀를 일반 좀비의 먹잇감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이현이 간신히 오유화를 끌어 뒤로 물러났을 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철제 침대가 기우뚱 기울었다.
칵, 칵, 칵, 칵―.
일반 좀비의 얼굴이 오유화의 피가 가득한 바닥에 처박혔다. 입질을 하는 짐승처럼 일반 좀비가 미친 듯이 바닥을 씹으려고 했다.
이빨이 단단하다고는 해도 바닥만큼은 아니었다. 좀비 몬스터도 아닌 일반 좀비의 이빨은 바닥과 강하게 부딪치는 순간 금이 가고 깨져 나갔다.
제가 원하는 먹잇감이 아니자 일반 좀비가 바닥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깨진 이빨 조각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과 한데 뒤섞였다.
“캬하아악!”
상어의 것처럼 날카로워진 이빨을 한껏 드러내며 일반 좀비가 포효했다. 사지가 뒤틀리도록 몸을 움직이자 끈이 실시간으로 풀리는 게 이현의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현은 잠시 망설였다. 아직 일반 좀비는 묶여 있는 상태니까 메스의 날을 눈알에 박아 넣기만 하면 움직임을 멈출 터였다.
하지만 이현은 살면서 누군가를 때려 본 기억도 없었다. 자신을 실험체로 전락시킨 부모에게조차 원망은 했을지언정 살의를 느끼지는 않았다.
이현의 손에 들린 메스가 계속해서 흔들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끈을 풀어낸 일반 좀비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반 좀비는 하필 팔 쪽에 좀비에게 물린 상처가 남아 있었다. 두 다리는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이현의 지금 몸 상태로는 일반 좀비보다 더 빨리 뛰지 못할 수도 있었다.
“흐윽…….”
이현이 무릎걸음으로 일반 좀비를 향해 기어갔다. 흘러나오는 눈물에 시야가 자꾸만 뿌예졌다.
메스를 두 손으로 쥐고 가까이 다가온 먹잇감을 씹어 먹기 위해 이를 딱딱거리는 일반 좀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날카로운 이빨에 짓씹힌 아랫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일반 좀비의 하관을 온통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반 좀비가 턱만 움직일 뿐 고개는 크게 흔들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죄송해요.”
자신의 부모님이 실험체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사람이었다. 이미 좀비가 되어 버렸지만 이현은 살인이라도 하는 듯한 참담함에 휩싸여야 했다.
푸욱―. 손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감각에 이현이 이를 악물었다. 메스가 일반 좀비의 눈을 파고들어 갔다.
이현이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한쪽 눈에 메스가 박힌 채로도 이빨을 몇 번 딱딱거리던 좀비의 머리통이 바닥을 향해 추욱 늘어졌다.
메스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이현의 손바닥도 붉게 물들였다. 발작 난 사람처럼 이현이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기 위해 제 옷 위로 문질렀다.
“우윽…….”
이현이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신물이 섞인 침을 뱉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