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연구소장이 무의식중에 사라진 왼손을 움직였다가 뻐근한 통증만 일어 침음을 삼켰다. 급박한 상황인데 손이 하나밖에 없으니 움직임이 더디게 이어졌다.
핏물에 푹 젖은 천을 떼어 내고 상처를 제대로 살피고 싶었으나 세 쌍의 시선이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가까이에 있는 이낙균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는 오금에 힘이 풀릴 정도였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몸에 힘이 없었다. 순간 제 처지가 서러웠으나 연구소장은 항상 강한 자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끼던 이현이 실험체가 되어 나타난 상황에서도 반항하는 대신 정강필의 명령에 순종했던 거다. 태어나 처음 보는 존재인 이현에 대한 실험 욕구도 치솟기는 했지만.
“……수혈 완료했습니다.”
연구원 중 하나가 에스퍼들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연구소장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본격적으로 해독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낙균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김진수의 상태를 살폈다. 검은 피를 토해 낸 후 김진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길게 늘어졌다가도 짧게 끊어지는 숨이 당장이라도 멎을 듯이 위태로웠다.
한수호도 김진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처음 알파 1팀으로 발령 와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개성 강한 팀원들이 부딪칠 때마다 항상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던 착한 성정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을 테다. 제 몸 생각하지 않고 팀원을 위해 몸을 내던졌겠지.
김진수를 바라볼 때는 걱정으로 얼룩졌던 시선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움직이는 연구소장에게 닿은 순간에는 날카롭게 벼려졌다.
한수호가 연구소장을 살려 두는 건 어디까지나 김진수가 회복할 때까지만이었다.
지금 잘려 나간 건 왼손뿐이지만 김진수가 괜찮아지고, 그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를 다 얻어 내고 나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그에게 이현이 겪었던 고통을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품 안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이현의 몸이 움찔 떨린 건 그때였다.
“……이현아.”
한수호가 시선을 돌려 이현의 얼굴을 살폈다. 입술이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벌어지고 있었다. 이어 기다란 속눈썹도 파르르 떨렸다.
조금씩 드러나는 새까만 눈동자에 한수호는 심장이 명치까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완전히 모습을 나타낸 눈동자는 한수호를 바라보면서도 먼 곳을 응시하듯 초점이 흐릿했다.
혹 실험의 부작용으로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걸까.
한수호는 초조한 심정으로 이현이 무슨 말이라도 꺼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허옇게 부르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좀처럼 말소리를 내지 못했다.
고개를 숙여 이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현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찾아 가는 모습을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지켜봤다.
마침내 초점이 제대로 잡힌 순간 이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눈물로 얼룩졌다. 습막에 감싸인 새까만 눈동자는 구슬처럼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맑았다.
“형…….”
탁하게 쉰 목소리가 간절히 한 음절을 뱉어 냈다. 이현의 관자놀이를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현이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해 보이던 사람이 이현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한수호는 이현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걸 깨달았다. ‘형’이라는 단어에 담긴 울림이 한수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현은 기억을 잃기 전 꼭 지금처럼 한수호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했다.
이번 임무에 같이 파견된 후 서로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이현은 무의식 속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 혼란스러워했다.
당시 한수호는 이현이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랐다. 이현이 기억을 되찾으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잃어버린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현이 제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제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고 울부짖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제 과거는 핏빛으로 얼룩졌다.
그런데…… 이현이 저를 보고 한 말은…… 보고 싶었다는 애틋한 말이었다. 죄스러워 상상 속에서도 꿈꾸지 못했던 일이다.
“미안해요…….”
오히려 이현은 한수호에게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한수호인데도. 이현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잊으면, 안 되는데…….”
이현의 눈가에서도 기어코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의 눈물이 한데 얽혀 이현의 옆머리를 흠뻑 적셨다.
힘에 부치는 듯 이현이 색색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새까만 눈동자는 한수호의 얼굴을 제 눈에 담아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그리워한 이를 만난 것처럼 이현의 눈빛이 세밀하게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을 훑어 내렸다.
숱이 빼곡한 눈썹을 지나 오뚝한 콧대와 모양 좋은 입술로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뺨을 맴돌아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검녹색 눈동자였다.
눈물에 젖어 엉망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이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환한 미소를 짓고 싶었지만 미세하게 올린 게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한수호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고마워요. 계속 내 곁에 함께해 줘서.”
기억을 되찾은 후에야 이현은 한수호가 한 번도 제 곁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연구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모두 한수호의 뒷받침 덕분이었을 거다.
자신이 공부를 잘하고 뛰어난 재능을 보였어도 이 세계는 본신의 능력만으로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천애 고아가 됐고, 아무런 뒷배경도 없었다.
그런데 이현은 협회 권력자들을 뒷배경으로 둔 이들과의 경쟁에서 항상 선두를 달렸다. 그게 과연 이현의 능력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무엇보다 이현이 아는 한수호는 절대 이현을 홀로 둘 사람이 아니다. 제가 끔찍한 고통을 겪는 건 인내해도 이현이 조금이라도 아파하면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사람이다.
이현을 지키기 위해…… 제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이현은 정강필에게 납치된 후 아주 긴 꿈을 꾸었다. 반쯤 정신을 놓았다는 게 정확하리라. 정강필이 이현에게 한 실험은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예상은 했지만 처음부터 정강필은 이현의 온 감각을 한계 이상으로 각성시키는 약물부터 주입했다. 주사기의 날카로운 끝이 연약한 피부를 꿰뚫은 순간부터 이현은 준비도 없이 끔찍한 고통 속에 내던져졌다.
‘으아아……!’
목에서 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소리를 질러 봐도 온몸을 강타한 고통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제가 내지른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하나하나 눈에 박힐 듯이 보였다. 눈동자로 쏟아지는 빛에 눈이 따끔거렸다. 입고 있는 옷에 피부가 닿는 느낌은 너무나 선명해 차라리 피부를 뜯어내고 싶었다.
실험실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어 뇌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듯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제 반응을 관찰하는 정강필의 차분한 얼굴은 영영 잊히지 않을 듯이 시야에 각인됐다.
강제로 각성당한 뇌는 현재 받아들이는 정보뿐만 아니라 기억 공간에 감춰져 있던 것들까지 무작위로 끄집어냈다.
누군가 이현의 머리를 붙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는 듯한 어지럼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몸속의 장기가 온통 꼬여 들어가는 듯한 아픔이었다.
‘커흑…….’
‘이런.’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몸이 이상 반응을 보였다. 기도가 막힐 정도로 피를 토해 내는 자신을 보면서 정강필은 차분하게 기도를 확보했다.
이현이 고통스러워해도 정강필은 다음 실험을 이어 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마주 웃던 시간들이 모두 허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실험은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졌다. 정강필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연구소장이 빈자리를 채웠고, 이후에는 다른 연구원들도 동참했다.
다들 같은 연구소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다. 그들의 표정 위로 죄책감이 떠오른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옆에서 강준 또한 이현처럼 연구욕에 미친 연구원들에게 여지없이 몸을 내어 줘야만 했다.
어떨 때는 자신이 지르는 비명인지, 강준이 내지르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이 이어졌다.
처음에 떠오른 기억은 제 앞에서 피를 쏟아 내며 쓰러지는 누군가의 형상이었다. 이현보다 키 큰 이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 이목구비를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현이 피를 본 후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떠오르던 기억이었다. 항상 기억의 시작과 끝은 온통 피에 물든 것처럼 새빨갛고 흐릿했다.
그러나 실험이 이어지면서 똑같은 기억이 되풀이될 때마다 이현은 제 앞에서 쓰러지는 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아빠…….’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이현의 정신이 무의식 속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