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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89)화 (89/133)

089.

하프 좀비가 된 이후 처음 느껴 보는 공포에 서동연은 본능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제가 짠 판대로 잘만 움직이던 것들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게.

아니, 균열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짐을 보였지만 서동연이 그걸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그러나 서동연이 이상을 감지했을 땐 너무 늦은 뒤였다. 급진파 놈들도 다 같은 하프 좀비라 안심하고 있었던 게 실책이었다.

수가 적기도 했고 급진파를 이끌고 있던 수장이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서동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기에 알아차리는 게 더 늦었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의 희생으로 서동연은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었다. 핏값은 제대로 받아 낼 생각이었다.

“빚은 이자까지 쳐서 갚아 줘야지.”

서동연이 가뿐하게 몸을 움직여 통로를 따라 이동했다. 아직 해결된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지만 일단은 위험에 처해 있던 이현을 구해 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의 능력이 제게 위협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서동연은 진심으로 이현이 잘못되는 건 바라지 않았으니까.

“피비린내가 진동하네.”

통로 곳곳에는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정강필은 걸치고 있던 하얀색 가운이 피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달려드는 자신을 피해 곧장 몸을 움직였으니 옷을 갈아입을 시간 따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움직이면서 묻힌 핏자국일 게 분명했다.

“도망치면서 폭탄도 터트린 것 같고.”

폭발음은 사방에서 울려 왔다. 서동연이 이현의 상태를 확인한 후 산 채로 찢어 죽였던 이들도 폭탄을 던져 마지막까지 반항했다.

정강필이 이 안에 있던 연구원들에게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협회 내 소속돼 있는 연구원들이 이 안에 즐비했으니까.

“좀비 웨이브도 예상한 눈치고.”

좀비 웨이브를 협회 쪽으로 틀어 공격하는 건 서동연이 짠 시나리오였다. 협회에 소속된 에스퍼들을 무력화한 후 장악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가이드를 인질로 삼아 에스퍼들을 굴복시킨다고 해도 변수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게 틀어졌다.

“그 새끼는 정말 제 뜻대로 일이 될 거라고 믿는 건가.”

서동연의 이가 까드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급진파 수장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멀쩡하던 머리카락 다 밀고 이상한 문신 새길 때부터 눈치채야 했어.”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이건오의 모든 게 다 수상쩍게 느껴졌다. 그가 머리를 박박 밀고 해골 모양의 문신을 새기고 나타났을 때 서동연은 개성이 넘친다며 박수를 쳐 줬다.

그게 자신의 등 뒤에서 들이밀 칼을 가는 행위를 은연중에 드러냈던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누군가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게 이렇게 좆같을 줄 몰랐단 말이지.”

남을 가지고 놀 줄만 알았지, 놀아나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하기도 했다. 제게 그런 기분을 겪게 해 준 놈들을 산 채로 찢어발기고 싶은 마음이 들끓을 정도로.

“통로는 여기에서 끊겼는데…….”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던 통로가 막혀 버렸다. 서동연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밀 통로를 찾은 건 제 능력이 아니라 한수호의 마력 덕분이었다.

기감을 움직여 이상한 곳이 있는지 살폈지만 통로는 계속해서 이어지기만 했다. 끝까지 가면 무언가 있을 거라 생각해 통로를 따라 이동한 건데. 이런 식으로 막혀 있을 줄은 몰랐다.

서동연이 팔과 다리를 움직여 통로 전체를 퍼억, 퍽 치기 시작했다. 통로가 이곳까지 이어진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질적인 느낌이 든 건 힘을 잔뜩 주고 통로 곳곳을 두어 번씩 주먹과 발로 쳤을 때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거라고 해도…….”

어두컴컴했던 통로 안으로 빛이 스며들어 왔다. 어렵게 만들어 낸 틈을 서동연이 비집어 통로를 이룬 골조를 뜯어냈다.

“이건 또 뭐야.”

드러난 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에 서동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주하기 위한 통로이니 바깥쪽으로 연결됐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통로 끝에 이어진 공간은 처음 통로가 시작된 곳이었다. 피비린내가 현기증이 일 정도로 진동하는 비밀 실험실.

서동연이 통로에서 뛰어내려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서 한수호와 헤어져 자신은 정강필의 흔적을 쫓아 통로를 기어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처음 들어갔던 통로의 입구가 뻥 뚫린 채로 있었다. 방금 서동연이 뛰어내린 곳과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통로 끝까지 피가 묻어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서동연이 무작정 통로를 기어 움직인 건 아니었다. 계속해서 정강필의 몸에서 묻어났을 거라고 예상되는 핏자국이 이어져 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흔적을 쫓아 이동한 거였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머리를 굴려 봐도 정강필에게 또 한 번 놀아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독하게도 머리 좋은 새끼.”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지?

이현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이곳에 또 다른 함정이 있는 건…….

서동연이 굳어 버린 머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이면서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벽 한쪽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환영이 아니라 정말 벽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녹아내렸다. 이어 나타난 이를 본 서동연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 * *

“부팀장님, 저쪽에 연구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낙균이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들은 현재 한쪽에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넓은 공간이었다. 실험 장비가 즐비한 곳은 폭발의 여파에 휩싸여 바닥이 온통 깨진 유리 조각과 알 수 없는 액체로 엉망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도 두 명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이 실험 가운인 걸로 보아 그들과 같은 연구원일 터. 폭발에 휘말린 건지 한 사람은 온몸에 폭탄의 파편으로 보이는 것들이 박혀 있었고, 다른 이는 팔 한쪽과 다리 한쪽이 날아간 상태로 눈을 부릅뜬 채 굳어 있었다.

임태한은 생존한 이들이 닫힌 문을 열려고 한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문은 열리기는커녕 덜컥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문을 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세 명. 그들 주변을 둘러싸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자들이 다섯 명이었다.

“저, 저기…….”

“흐이익―!”

무리의 가장 외곽에 있던 연구원이 임태한과 이낙균을 발견했다. 알파 1팀의 얼굴은 유명하다. 자신들이 잘못한 게 있기에 지금으로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기도 했다.

이현에게 했던 짓이 떠오른 뒤에는 더더욱. 이현은 알파 1팀과 함께 임무에 파견 나갔다 실험체가 되어 돌아왔다. 이현과 에스퍼들 사이에 충분히 친분이 생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 연구소장님! 지금 알파 1팀 에스퍼들이……!”

문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이들 중 가장 연륜이 있어 보이는 이의 어깨를 연구원 하나가 뒤흔들었다.

그제야 연구소장이 하던 행위를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서슬 퍼런 임태한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오금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임태한 에스퍼…….”

나이 든 목소리가 연륜이 무색하게도 덜덜 떨렸다. 열쇠를 쥔 오른손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사시나무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연구소장님.”

항상 연구소장을 만날 때는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던 사람이, 지금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연구소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리 가세요!”

연구원들 중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폭탄을 임태한을 향해 던진 건 그때였다.

평소처럼 연구에 몰두하던 중 갑작스럽게 대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무리를 이끌던 연구소장조차 혼비백산해서 도주로를 찾았다.

비밀 연구소에 하프 좀비 하나가 난입해 보이는 족족 연구원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연구원들은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때 연구원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폭탄들이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이 폭탄을 사용해요. 다들 자신의 몸을 지킬 비장의 무기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턱수염이 수북한 남자가 연구원들에게 건넨 물건이었다. 비밀 연구소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도 일찌감치 폭탄을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가 동료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들 전투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된 폭탄 사용법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연구원은 동료가 폭탄을 잘못 터트려 죽는 걸 목격한 후 충격에 빠진 나머지 들고 있는 폭탄을 도로 내려놓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손에 들고 있었다.

식은땀에 표면이 반질거리는 폭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임태한의 몸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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