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88)화 (88/133)

088.

“내가 정강필 그놈을 찾아서 산 채로 찢어 죽이고 싶은 이유야.”

공간 하나를 지났을 뿐이다. 코끝을 찌를 듯이 파고드는 피 냄새에 한수호가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내리눌렀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한수호도 충격을 쉬이 갈무리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피바다였다.

점액질처럼 응고되기 시작한 피가 역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핏자국만 가득하다고 한수호가 충격에 빠졌을 리는 없었다.

“……하프 좀비들이군.”

공간 안은 하프 좀비들의 사체로 가득했다. 아니, 사체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조각난 육편 덩어리에 가까웠다.

강준이 그랬던 것처럼 벽마다 여지없이 하프 좀비였을 덩어리가 걸려 있었다. 가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건 머리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마저도 무슨 짓을 한 건지 하나같이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안쪽의 장기를 내보이고 있었다. 한수호도 하프 좀비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일반 좀비였을 때 이미 인육을 탐한 자들이고, 하프 좀비로 돌아와 이성을 갖췄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에게는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대화가 통하고 자신들처럼 사고가 가능한 존재지만 한수호는 그들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일반 좀비나 몬스터를 처리하듯이 죄책감 없이 죽였다.

하지만 이 안에 드러난 광경은…… 그런 한수호조차 참담한 심정이 들 만큼 무자비하게 행해진 실험의 흔적이 가득했다.

하프 좀비를 죽이는 것과 그를 데리고 실험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하프 좀비 또한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렇기에 협회에서도 하프 좀비를 실험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달랐다.

한수호가 알기로 이현은 적극적으로 하프 좀비를 실험체로 두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좀비 치료제에 필요한 부분이니 어쩔 수 없이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에는 동의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실험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게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했다.

한수호의 예리한 시선이 공간에 남은 흔적들을 샅샅이 살폈다. 철제 침대에는 그들이 반항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철제 위에 박혀 있는 손가락은 마디가 잘린 채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철제를 움켜쥔 손을 그대로 잘라 낸 것이리라.

“우리 쪽도 인간들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까 할 말은 없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이건……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야.”

동료들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부하들이 하나씩 죽어 나갈 때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테지.

서동연이 화가 나는 건 이곳에서 실험체로 쓰인 하프 좀비들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 갔다는 거다.

전투 중에 죽은 것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실험을 당하다 죽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제 발로 실험대 위에 올랐을 리는 없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급진파 쪽에도 뒤통수를 맞은 상황에서 한배를 탔다고 생각한 협회장 측에서도 이변이 일어나니 말 그대로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서동연은 무리에서 쫓겨난 후 급진파 쪽에 접근한 협회 측 인사가 누구인지 뒤를 밟았다. 하프 좀비 전부가 급진파에게 넘어간 건 아니었다. 급진파의 수는 오히려 온건파나 중립을 취하는 쪽보다 적었다.

다만 급진파가 무력으로 세력을 장악해 다들 숨을 죽이고 있을 뿐. 그렇기에 서동연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급진파 수장에게 처형되기 직전에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협회장 쪽에서 급진파 무리에 딜을 건 줄 알았다.

‘나는 저, 정말 모르는 일이네…….’

하지만 협회장은 생각보다도 심약한 인물이었다. 연기를 하는 건가 의심해 봐도 제 위협에 오줌까지 지린 협회장이 급진파 쪽 수장과 만나 거래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후 미지의 인물에 대해 꼬리를 밟다가 배후의 인물이 오래전 죽은 걸로 알려진 정강필이라는 걸 알아냈다. 협회장과 반대쪽에 서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살아나 일련의 일들의 배후자로 지목되는지 의아했지만 추격을 계속했다.

협회장을 협박해 알아낸 정보로 협회장실이 있는 건물의 지하까지 오게 됐다. 정강필을 발견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현이 그의 손에 죽기 직전까지 몰려 있을 줄은 몰랐다.

‘신부……?’

‘이런.’

간신히 이현을 구해 내고 정강필이 도망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때 나타난 공간이 이곳이었다.

안쪽에는 분쇄기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분쇄기 안에 가득 들어찬 육편이 모두 하프 좀비의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에는 정강필에 대한 분노로 머릿속이 끓어올랐다.

문제는 정강필의 흔적이 비밀 실험 공간에서 끊겼다는 거다. 분명 이곳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모든 공간을 두들기고 움직여 봐도 사람이 이동했을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하프 좀비의 능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에스퍼처럼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에스퍼의 마력이 필요할 것 같아 이현을 안은 상태로 생존자를 찾아 나섰다. 그 와중에 설상가상 폭발음까지 들려왔다. 자신이 터트린 게 아니니 범인은 모습을 감춘 정강필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폭발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하며 마주친 이들에게서 정보를 캐냈다.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없으면 곧바로 죽여 버리면서.

그때 만난 게 한수호였다. 서동연은 이미 정강필이 충분히 이곳에서 몸을 피할 만한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한수호의 힘을 빌려서라도 같이 추격할 수밖에.

자신은 이제 부하들도 없는 외톨이 신세였으니까.

“이 안에서 정강필이 사라졌어. 어딘가로 이동하는 통로가 있는 건 확실한데…….”

서동연의 말에 한수호가 그림자를 움직여 공간을 하나하나씩 훑기 시작했다. 마력이 흘러들어 가는 곳이 있는지 살펴본 결과 폭발의 여파로 깜박거리는 전등 주변에 그림자가 모여들었다.

“위쪽이라고? 내가 여기도 분명 두들겼었는데.”

애초에 실험 도구가 놓여 있는 캐비닛이 비밀 실험실의 입구였다. 서동연은 안쪽에 있는 캐비닛부터 다 한 번씩 밀어 본 후에 전등도 괜스레 당겨 보고 천장도 두들겼다.

당시에는 미동도 없던 천장이 한수호가 마력을 흘려 보내자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르륵 움직였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기어서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통로가 천장 위로 드러났다.

“뱀처럼 기어서 사라진 거네. 그놈 성격이랑 아주 잘 어울려.”

서동연이 드러난 통로 위에 손을 올려 가뿐하게 상체를 통로 쪽으로 밀어 넣었다. 환풍구처럼 이어지는 통로는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떡할까? 내가 먼저 움직이는 게 낫겠지? 신부를 데리고 추격할 수는 없으니까.”

“부탁하지.”

한수호도 잠정적으로 서동연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일전에 전심전력을 다해 붙었을 때도 둘은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를 제압할 수 없는 상황이니 최대한 그의 전력을 이용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으로 느껴졌다.

무리에서 쫓겨났다는 서동연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말장난을 할 성정은 아니었다.

그가 이현을 구해 준 것도 사실이고.

이현은 구해 냈으니 이제는 김진수의 치료제를 찾아야만 했다. 한수호는 정강필의 뒤를 쫓는 걸 서동연에게 맡긴 후 임태한과 이낙균과 함께 비밀 실험실을 더 둘러볼 생각이었다.

“이거 받아.”

서동연이 통로로 몸을 완전히 욱여넣기 전 작은 물건 하나를 던졌다. 한수호가 가볍게 낚아채 물건을 살폈다. 검은색 이어폰 모양의 물체 위에서 녹색 점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통신 아티팩트야. 현재 협회 주변은 우리 쪽에서 손써서 너네 채널은 먹통일걸?”

통신이 되지 않아 얼마나 불편했던가.

한수호는 서동연이 건넨 통신 아티팩트를 살피다 한쪽 귀에 꽂았다.

“도청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내가 비밀리에 따로 준비해 놓은 거라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몇 개 더 줄 테니까 너네끼리도 채널 연결해.”

서동연이 이어 같은 모양의 통신 아티팩트 무더기를 한수호에게 건넸다. 한수호가 통신 아티팩트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통신만 제대로 돼도 지금보다 전력을 움직이는 효율성이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은 자명하니까.

“……결국 눈뜨는 거 못 보고 움직이네.”

먼저 등을 돌린 건 한수호였다. 피가 흥건한 공간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동연의 시선이 한수호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은 이현을 흘낏 살폈다.

정강필에게서 구해 내기 직전에는 이현이 눈도 뜨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이현이 기억하는 마지막 제 모습은 그의 가이딩을 피해 도망가는 모습일 게 분명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준 것 같아 입맛이 썼다.

“멋있는 모습만 보여 줘야 하는데 말이야.”

그 당시에는 자신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현의 가이딩에 휩쓸린 하프 좀비가 어떻게 됐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