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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87)화 (87/133)

087.

헤어진 시간이 오래된 것도 아닌데. 이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확연히 말라 있었다. 얼마나 고초를 당한 건지 언뜻 드러나는 살결마다 성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손톱마저 떨어져 나가 피가 말라붙어 있는 걸 보는 한수호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침잠했다. 따끔거리는 살기에 서동연이 혀를 쯧, 찬 후 한수호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정신 차려. 너 계속 이렇게 불안한 상태면 신부 다시 내가 데려간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지나치게 흥분한 한수호를 가라앉히기 위해 이현을 건넸을 뿐이다.

서동연 또한 재회한 후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현의 곁에 서 있던 놈들의 목을 죄다 산 채로 뜯어 놨다. 가장 죽이고 싶었던 이는 발 빠르게 도망가서 문제였지만.

그 순간에는 이현의 의뭉스러운 능력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오로지 이현을 이렇게 만든 놈들을 다 찢어발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

“이쪽이야.”

임태한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쪽이었다. 서동연이 이끄는 곳으로 향할수록 복도에 가득했던 연기는 차츰 사라져 갔다. 폭발음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으나 이곳에서도 폭탄이 터졌던 것은 확실했다.

서동연이 멈춰 선 곳 앞의 복도는 처참한 상태였다. 핏자국과 시신들이 즐비해 있었고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폭발의 여파로 움푹 파인 채 검게 그을린 흔적이 상흔처럼 남았다.

“내가 신부를 발견한 곳이지.”

원래는 닫혀 있었을 문이 지금은 활짝 열린 채로 안쪽의 공간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서동연이 먼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뒤이어 한수호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워커 바닥 아래에서 짓밟히는 유리 조각들은 모두 깨져 버린 실험 도구의 일부분이었다.

누군가를 가둬 두는 용도로 사용했을 우리와 차가운 철제 침대를 마주한 순간 한수호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침대 위에 말라붙은 피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기도 힘들었다. 제 품에 안겨 있는 이현 아니면 한쪽 벽에 푸줏간의 고기처럼 걸려 있는 강준일 터.

“이놈은 내 밑에 있던 놈이야. 신부의 가이딩에 당해 하프 좀비의 능력을 잃었던 놈인데 이곳에 와 보니 이미 죽어 있더군.”

한수호가 이현을 안은 채로 강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곳이 실험실이 아니라 고기를 사고파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강준의 몸 곳곳이 해부되어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저지른 죄악이 여과 없이 한수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강준은 이미 하프 좀비의 능력을 잃은 자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렇게 끔찍한 짓을 당한 채 죽을 이유 또한 없었다.

활짝 열린 가슴 사이로 드러난 심장은 이미 괴사가 진행되어 더 이상 뛰지 않고 있었다. 강준은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채였다.

강준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다. 한수호도 강준을 이용해 이현의 능력에 얽힌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고, 진표성이 강준을 미끼처럼 사용하자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어쩌면 강준처럼 벽에 걸려 있는 이가 제 품에 있는 이현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까매지는 듯했다.

“신부도 내가 조금만 늦었다면 죽었을지도 몰라. 정강필이 어떤 약을 투입하기 직전에 막아 냈거든.”

한수호가 손을 뻗어 부릅뜬 채로 굳어 있는 강준의 눈을 감겨 줬다. 그림자를 움직여 그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도 풀어냈다.

강준의 시신이 바닥에 눕혀졌다. 한수호는 이어 헤집어진 시신의 몸 위로 주변에 있던 흰 천을 끌어와 덮었다.

“누가 보면 이놈 알파 1팀인 줄 알겠다.”

그만큼 한수호는 망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듯 강준의 시신 앞에서 묵념했다. 이어 한수호는 연구실 안에 남은 흔적을 쫓았다. 철제 침대 아래에서 피가 말라붙은 손톱을 발견했을 때는 품에 안은 이현을 제 품으로 바투 끌어안았다.

여린 숨결이 느껴지고 나서야 분노로 멈췄던 머릿속이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연구 자료는 정강필이 모두 들고 튀었을 거야. 내가 한번 뒤져 봤는데 눈에 띄는 자료는 없었거든. 그 새끼를 다시 찾아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지.”

서동연이 연구실 안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정강필이 폭탄을 서동연이 있는 복도 방향으로 던졌다. 건물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력이 있는 폭탄은 아니었다.

다만 서동연의 움직임을 잠시 동안 묶을 정도는 충분히 됐다. 몸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서동연은 곧바로 연기를 헤치고 이현이 있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도망가는 정강필과 침대 위에 남겨진 이현을 보면서 서동연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결정은 빨랐다. 서동연은 시체처럼 늘어진 이현을 품에 안고 폭발의 여파에서 잠시 몸을 피했다.

정강필이 이현에게 사용하려고 했던 주사기가 서동연의 발밑에서 바스러졌다. 폭발이 가라앉고 이현을 제대로 살핀 순간 서동연은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느끼게 됐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연구실 안에 있던 연구원들이 모두 목이 뜯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으니까.

“너는 정강필을 왜 찾으려고 하는 거지? 너희 쪽에서는 협회장과 손을 잡았을 텐데.”

한수호가 연구실을 뒤져 회복 포션을 찾아냈다. 은밀한 곳을 뒤져 볼 필요도 없었다. 이현에게 사용했던 건지 철제 침대 주변에 있는 카트 안에 최상급 회복 포션이 새것과 빈 것이 한데 놓여 있었다.

한수호는 혹시 몰라 제 몸에 먼저 회복 포션을 사용한 후에야 이현의 상처 위로 조심스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흐으…….”

손톱이 떨어져 나간 부위에 회복 포션을 발랐을 때는 이현이 정신을 잃은 와중에서도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서동연은 한수호가 질문을 던진 이후로 무언가를 고민하듯이 팔짱 낀 채 혀를 입 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한쪽 볼이 혀가 움직이는 모양대로 불뚝 튀어나왔다. 볼 안쪽에 상처라도 있는 것처럼 핥던 서동연이 한수호의 곁에 다가와 섰다.

“이런 말 쪽팔려서 안 하려고 했는데.”

옷 밖에 드러난 상처에는 회복 포션을 다 발랐다. 이제는 옷 안에 감춰진 부위에 발라야 했다. 한수호가 가까이 다가온 서동연을 힐끗 바라본 후 그에게 비켜나라 눈짓했다.

“나 지금 엄청 중요한 얘기 하려는 중이거든?”

“해.”

서동연이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이자 한수호가 그림자를 일으켜 이현의 몸을 가렸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 후에야 한수호가 실험복을 들춰 이현의 상처를 살폈다.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한 팔에 살벌하게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회복 포션을 얇게 펴 바르자 이현의 살결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갔다.

“우리 쪽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나는 보기 좋게 무리에서 쫓겨난 상태고.”

한수호의 한쪽 눈썹이 의외라는 듯 들렸다. 그가 아는 서동연은 부하의 반항을 눈감아 줄 만한 놈이 아니었다. 아끼는 부하조차 버리는 패로 사용한 놈이었다.

놈은 이현을 납치할 당시 오른팔처럼 한동안 데리고 다니던 하프 좀비를 미끼로 던져 주고 사라졌다. 그렇게 놔두고 가면 한수호가 그를 죽일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아야 했는데 말이야.”

과거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서동연의 눈동자가 위험스레 번뜩였다. 그의 손 아래 놓인 철제 침대의 모서리가 포일처럼 구겨졌다.

“급진파랑 온건파가 있는데 나는 온건파 쪽이었거든. 이렇게 파를 나누는 것도 웃기지만.”

급진파 쪽은 인류의 말살이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인육을 먹는 걸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가축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린 후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동연은 하프 좀비가 된 후 인육을 끊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인육에 취한 하프 좀비들은 어렵게 되찾은 이성을 서서히 잃어 갔다.

다시 일반 좀비처럼 변하는 건 아니었지만 능력이 대체적으로 강해지는 한편 쉽게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폭력성이 가득한 이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채 몇 년도 가지 못하고 멸망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서동연은 제 무리가 된 이들에게 엄격히 인육을 금하도록 했다. 인육이 아닌 다른 가축의 피와 살을 섭취해도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내가 협회장한테 접근한 건 맞아. 인간들 영역을 다 빼앗으려고 한 것도 맞고.”

그렇지만 서동연은 인간을 가축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을 보기만 하면 죽이려고 달려드는 인간들에게 하나의 종족으로 대우받고 싶었을 뿐이다. 다소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평범한 사람은 몰라도 에스퍼는 여전히 하프 좀비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으니까. 나날이 늘어나는 좀비 몬스터들도 골칫거리였고.

“문제는 나도 모르게 우리 쪽 세력에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는 것과 핵심 키 역할을 한 게 정강필이라는 거지.”

이현의 몸에 나 있는 상처를 다 살핀 한수호가 그림자를 물리고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정강필이 한수호에게 보여 준 모습은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거짓으로 점철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수호는 정강필을 대부라고 부를 일도 없이 일찌감치 그의 야욕을 알아차렸을 테니까.

“이쪽으로 와 봐. 진짜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이거니까.”

서동연이 한수호에게 연구실 한쪽을 가리켰다. 실험 도구들이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 캐비닛이었다. 벽 안에 만들어진 공간으로 겉보기에는 특이할 게 없었다.

그러나 서동연은 캐비닛의 문을 열지 않고 캐비닛 위쪽의 벽을 그대로 밀어 버렸다. 회전문처럼 돌아가는 캐비닛 너머로 드러난 광경에 한수호가 침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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