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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86)화 (86/133)

086.

한수호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대신 어깨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리는데도 몸을 집어넣는 데 집중했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그걸 또 찾아내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림자를 움직여 앞쪽에서는 제 몸을 끌고, 뒤쪽에서는 밀도록 조종하자 몸이 통로를 따라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수호의 뒤를 이어 임태한도 제 몸을 비좁은 통로에 욱여넣었다. 그다음에 이낙균이 김진수를 먼저 통로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김진수를 바깥쪽에 놓고 들어가는 게 안전할 수도 있지만, 김진수의 상태가 해독제를 발견하면 바로 투약해야 될 정도로 좋지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낙균이 몸을 집어넣은 후 임태한을 도와 김진수의 몸을 밀었다.

“콜록, 콜록……. 연기가 장난 아닌데요…….”

통로 양쪽에 창문 같은 장치가 없었기에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온 연기가 금세 통로를 가득 메웠다. 이낙균의 기침 소리에 임태한이 연기를 모아 뒤쪽으로 흘려 보냈다.

한수호는 연기가 시야를 가린 순간 마력을 눈 쪽에 집중하고 아예 숨을 참아 버렸다.

“통로가 이렇게 긴 걸 보면 미로처럼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들어온 지 꽤 됐는데도 여전히 앞쪽에는 통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길을 따라 만든 것처럼 통로는 곡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점점 폭발음이 가까워지고 있어. 다들 마력 끌어올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통로의 끝이 보이는 듯하자 한수호가 앞쪽에 그림자로 된 방패를 형성했다. 어깨가 탈골된 상태로 움직이고 있어 상체에서 끔찍한 통증이 일었지만 한수호는 도리어 속도를 높였다.

신체적 고통 따위 이현을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사, 살려 줘요……!”

마침내 통로의 끝에 도달했을 때 한수호는 철망을 떼어 내는 대신 바깥쪽의 동태를 살폈다. 통로가 끝나는 부근에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어둑하던 통로로 빛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한수호가 철망을 사이에 두고 안쪽 공간을 살폈다. 새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연구소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살려 주기는 개뿔.”

그림자 방패의 끝으로 철망을 툭툭 건드려 보며 나갈 타이밍을 잴 때였다.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한수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수호가 그림자 방패를 움직여 통로 끝을 막고 있던 걸 단숨에 치워 냈다.

“……서동연.”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으로 통로 윗부분을 잡고 그대로 몸을 바깥쪽으로 빼냈다. 이현의 능력을 피해 서동연이 도망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였다.

언젠가는 서동연을 다시 만나 그가 다시는 이현에게 위험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야 했지만, 당장은 그럴 여력이 없어 잠시 미뤄 뒀던 것뿐이다.

그런데…… 서동연의 품에 익숙한 인영이 피에 젖은 상태로 추욱 늘어져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이를 한수호가 못 알아볼 리가.

“한수호 팀장.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우리가 지금 그럴 때가 아닌……!”

서동연이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몸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날아와 박힌 검회색빛의 방패가 땅을 무른 두부처럼 파낸 후 스르륵 흩어지고 있었다.

“너, 이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말할 기회를 줘야 설명을 할 게 아닌가. 서동연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한수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던 탓이다. 자세히 보니 오른팔이 축 늘어진 채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달랑거리고 있었다.

“너도 좀비화된 거 아니야? 팔 안 아픈가 보지?”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돌아 버린 눈동자는 자신과 제 품에 안긴 이에게 못 박히듯 고정된 채였다. 서동연이 할 수 없이 이현의 몸을 한수호에게 던졌다.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몸이 날아오자 한수호가 모든 공격을 멈췄다.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아 재빨리 그림자를 움직여 이현을 받아 냈다.

“……이현아.”

티끌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던 살결이 터져 나간 실핏줄 때문에 엉망이었다. 굳게 닫힌 눈은 이름을 불러도 미동조차 없었다. 여리게 흘러나오는 숨이 아니었다면 죽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초췌한 안색이었다.

얼마나 짓씹은 건지 성한 곳이 보이지 않는 입술에 시선이 닿은 순간 한수호의 주변 그림자들이 위험스레 들썩이기 시작했다.

“진정하라고 안겨 준 거야. 또 이성 잃고 날뛸 거면 내놔. 나도 지금 머리꼭지 돌아 버리기 직전이니까.”

서동연도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동연의 시야에 바닥을 기어 도망치려 하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벽 속으로 서동연의 손이 파고들었다. 손안에 가득 차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얻어 낸 서동연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어억…….”

바닥을 기어가던 남자의 등 한가운데에 서동연의 손에 들려 있던 덩어리가 박혀 들어갔다. 뼈가 부서지며 장기를 꿰뚫는 고통에 남자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그가 입고 있는 새하얀 가운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벽과 천장, 바닥 모두 새하얀 곳이라 붉은빛은 유독 눈에 띄었다.

“팀장님.”

임태한이 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한수호를 불렀다. 그 또한 상태가 심각한 이현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아직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 게다가 서동연까지 마주친 상황이었다. 그가 순순히 이현을 한수호에게 넘겨줬다고 하나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을지 예측되지 않는 놈이었다.

“수색 시작해.”

“네.”

임태한이 김진수를 등에 업은 이낙균에게 눈짓했다. 이현을 찾았으니 그다음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건 김진수의 상태를 되돌리는 거였다.

잠시 서동연에게 죽임을 당한 연구원의 시신에 시선이 갔다. 살아 있었다면 그에게 먼저 물어봤을 텐데. 그러나 물어볼 이들은 아직 이곳에 존재할 것이다.

폭발음이 들려오는 방향에서 한 손을 넘어가는 수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서동연.”

“이제야 나랑 대화할 마음이 생겼나 보지?”

서동연이 양어깨를 으쓱이며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수호가 처음보다는 한결 안정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흘러나오는 살기는 여전했지만.

“이현이를 이렇게 만든 놈들. 어느 쪽에 있었지?”

“뭐야. 내가 안 그랬다는 거 믿어 주는 거야? 이거 감동인데.”

서동연이 과장스럽게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울먹거리는 눈빛을 보였지만, 한수호는 냉담하기만 했다.

“재미없기는. 거의 다 골로 보냈지. 대가리 격은 놓친 것 같지만.”

“턱에 덥수룩한 수염이 있는 중년 남자도 놓친 건가?”

한수호의 질문에 서동연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맞아. 정강필이 네 대부였지.”

한수호가 서동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듯이 그건 서동연도 마찬가지였다. 하프 좀비들에게 요주의 인물이니까.

“대부를 언급하는 것치고는 눈빛이 살벌하네. 잘됐어. 나도 그 새끼한테 볼일이 아주 많거든.”

서동연에게서도 한수호 못지않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서동연이 이곳에서 이현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는 다른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다.

“우리 잠시만 페어플레이 좀 하자. 너도 그편이 낫지 않겠어? 지금 나를 적으로 돌리면 손이 모자랄 텐데.”

서동연이 먼저 살기를 몸속으로 갈무리했다. 이현을 발견한 탓에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네 목적도 정강필이랑 연관 있는 거라면. 내가 찾고 싶은 놈도 그놈이거든.”

웃고 있지만 서동연의 눈빛은 정강필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기세였다.

“좋아. 이현을 발견한 곳부터 알려 주면 협조하지.”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안내해.”

강준이 보이지 않았다. 이현의 가이딩에 영향을 받아 하프 좀비의 능력을 잃은 뒤 이상 반응을 보였던 놈이다. 정강필은 분명 강준도 이현과 함께 납치했다.

그의 안위가 궁금한 게 아니라 정강필에게 어떤 실험을 당했는지 알아낼 필요성이 있었다.

“폭발은 네가 일으킨 건가?”

“아니. 정강필이.”

폭발음은 지금도 계속해서 들려왔다. 다만 건물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다. 서동연이 안내하는 곳으로 걸어갈수록 복도에 자욱한 연기가 가득했다.

한수호가 조심스럽게 이현의 고개를 제 품에 기대게 했다. 임태한이 곁에 있었다면 연기를 흡입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을 테지만 제 능력으로는 힘들었다.

“이거 얼굴에 씌워.”

서동연이 걸치고 있던 가죽 재킷을 건넨 건 그때였다. 현재 이현은 속옷도 없이 옷 하나를 걸친 게 다였다.

어깨에서부터 허벅지 아래까지 양옆이 트인 옷은 중간중간 끈이 리본으로 묶인 채로 나신을 아슬아슬하게 가려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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