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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78)화 (78/133)

078.

다른 에스퍼들에 비해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강준은 가끔씩 정강필이 자신을 기이한 눈빛으로 살피는 걸 놓치지 않았다.

몸은 자꾸만 이상해지고, 에스퍼들이 언제 자신을 죽일지 몰라 불안에 떨다 보니 저절로 생존 본능이 강해졌다.

정강필은 진표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강준에게 위험한 대상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을 구하러 왔을 때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귀한 실험체인데 죽으면 안 되지.’

실험체.

그 단어가 귓가에 박혀 들어 떨어지지 않았다. 좀비들한테 물어뜯기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험체라는 단어에 심장이 불길하게 펄떡거렸다.

비록 발에 밟혀서 죽어 가는 벌레 같은 처지여도 그에게서 달아나기 위해 사지를 꿈틀거렸을 때 암전이 찾아들었다.

다시 눈을 뜬 장소는 ‘실험체’라는 단어와 연관이 깊어 보이는 곳이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철제 침대 위에 눕혀졌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현을 보자 순간적으로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이현은 진표성과 한수호가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까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어 묶여 있는 걸 보니 더욱더 깊은 절망감이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강준의 몸이 추욱 늘어지는 걸 보면서 이현도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생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사람 같았다.

가판대에 올려져 팔리기를 기다리는 생선 눈처럼 탁한 눈동자를 보며 이현이 몸속의 가이딩 마력이라도 가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다행히 마력은 이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가이딩 마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고민에 빠져들 무렵 문이 열리고 사라졌던 정강필이 들어왔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전문가시니까 실험에도 속도가 붙겠죠.”

“……네. 알겠습니다.”

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강필과 대화를 나누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익숙한 탓이다.

“김이현 연구원, 오랜만이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이지적인 외모의 중년 남성은 이현의 상사였다. 최소 일주일에 두 번은 함께 연구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알파 1팀에 파견되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현의 실험실을 드나들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안면이 있겠군요.”

연구소장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지 않았다. 실험체로 전락한 이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또한 자발적으로 들어온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어떤 실험을…… 하면 됩니까.”

“으…….”

연구소장은 이현과 오래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이현이 말하기 위해 혀를 움직였지만 목 밖으로 흘러나온 거라고는 말이 되지 못한 신음뿐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주십시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실험체일지도 모르니 목숨은 최대한 붙여 주시고요. 저는 옆에서 보조하겠습니다.”

정강필의 목소리만 들으면 지인끼리 나누는 평범한 담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에 이현이 힘없이 눈을 감았다.

어렵게 가이딩 마력을 모았지만 에스퍼인 정강필이나 일반인인 연구소장에게는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오히려 정강필은 폭주 위험 수치가 내려갔다면서 좋아할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실험 도구들을 준비하면서 연구소장이 이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미안함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연구소장 자리에 올랐다는 건 그 또한 연구에 미친 자라는 의미였다.

주름진 눈가가 굳었다. 실험 도구를 만지는 손길에서도 서서히 망설임이 사라져 갔다.

혈관에 주삿바늘이 꽂힌 게 시작이었다. 이현은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지독한 감각에 눈을 부릅뜨고 몸을 떨어야만 했다.

* * *

“쥐새끼처럼 언제 기어들어 왔대.”

가이드 센터를 장악한 하프 좀비 중 리더 격인 이수천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협회는 장악했지만 언제든지 파견 나갔던 협회 소속 에스퍼들이 돌아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보초를 섰다.

“S급 에스퍼는 한 번쯤 상대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이수천은 임태한의 싸늘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전혀 주눅 든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대일로 맞붙으면 죽겠지만 그에게는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다. 복도의 양옆으로 하프 좀비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가이드 하나 데리고 와.”

“네.”

그리고 에스퍼들을 무력화할 아주 좋은 수단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프 좀비의 손에 가이드 한 명이 멱살을 잡힌 채 끌려왔다.

“흐으…….”

“저 새끼들이……!”

김진수가 이를 갈았다. 가이드는 한쪽 팔이 기이한 각도로 뒤틀린 상태였다. 치료도 제대로 해 주지 않은 건지 하얀 가이드 정복이 온통 핏빛이었다.

“기세 안 줄이면 가이드가 죽어 나갈 텐데. 괜찮겠어?”

임태한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갔다. 김진수가 화를 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살기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열받는 거 진짜 오랜만인데.”

임태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이드의 멱살을 쥐고 있던 하프 좀비의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프 좀비는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숨이 끊어졌다. 새까맣게 점멸되는 시야에 마지막으로 틀어박힌 건 반으로 갈라진 제 머리통이었다.

동시에 흉포한 바람이 불어 가이드를 임태한이 있는 방향으로 끌어왔다. 동료를 잃고 인질로 데려온 가이드를 빼앗기게 된 이수천이 가이드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이수천의 손이 가이드의 등을 파고들기 직전, 임태한이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김진수, 목숨 걸고 지켜.”

“네!”

구해 온 가이드는 김진수의 품으로 넘겼다. 하프 좀비 하나를 죽일 때 남아 있던 마지막 표창을 사용했다. 이제는 도구 없이 육탄전으로만 하프 좀비들을 상대해야 했다.

“다들 뭐 해? 정신 안 차려?”

임태한과 맞붙은 이수천이 멍하게 서 있는 하프 좀비들에게 일갈했다. 순간이지만 다들 임태한의 지독한 살기에 몸이 굳어 버렸다.

이수천의 고함을 듣고 나서야 하프 좀비들이 임태한과 김진수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아악! 내 팔!”

하지만 달려들던 놈들은 더 빠른 속도로 바람에 휘말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바람의 힘은 하프 좀비의 단단한 육신마저도 수수깡처럼 부러뜨려 버렸다.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면서 복도가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오빠…….”

“눈 감고 있어.”

김진수가 이를 악물었다. 좁은 복도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임태한의 힘에 아군까지도 휘말리게 됐다.

평소의 임태한이라면 능력을 조절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김진수가 무너져 내리는 벽의 잔해물을 이용해 자신과 생존자들 주변을 돔처럼 둘러쌌다. 흙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외부에서 흙을 끌어올 시간이 없었다.

흙을 이용할 때만큼은 아니어도 칼날 같은 바람에 휩쓸려 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돔 덕분에 김진수는 생존자들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능력을 쓴 탓에 코끝에 찡한 느낌이 들더니 새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확실히 S급은 다르네.”

“그래? 그럼 더 보여 줘야겠네. S급이 돌아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임태한이 이수천을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눈동자는 차가운 상태 그대로라 이수천은 순간적으로 뒷골이 오싹한 경험을 했다.

“크윽…….”

“아아악……!”

이수천이 아슬아슬하게 피한 바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 뒤쪽에 서 있던 하프 좀비의 몸을 사선으로 갈라 버렸다. 네 동강 난 몸뚱이가 핏물로 젖어 든 바닥 위에 떨어져 묵직한 소음을 냈다.

그러나 이수천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손을 들어 화끈한 통증이 이는 볼을 매만지자 손바닥이 핏물로 젖어 들었다.

“다른 놈들한테 전해. 이 시간부로 가이드는 보이는 족족 죽이라고.”

이수천의 명령에 하프 좀비 하나가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임태한이 바람을 움직여 그를 막았으나 이수천이 옆에 서 있던 하프 좀비를 들어 바람이 향하는 쪽으로 집어 던졌다.

“크어억…….”

하프 좀비 하나가 순식간에 바람에 갈려 육편으로 변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내가 당하기만 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잔인한 명령을 내린 이수천의 눈동자가 희열로 번들거렸다. 상부에서 가이드는 최대한 살려 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수천에게 명령이란 무시해도 그만인 것이었다.

“너, 곱게는 못 죽겠다.”

한편 이수천의 명령은 임태한을 제대로 돌아 버리게 했다.

“김진수, 길 뚫어 줄 테니까 생존자들 데리고 빠져나가.”

임태한이 자신이 서 있는 반대쪽의 복도에 폭풍 같은 바람을 만들었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바람이 달려드는 하프 좀비들을 한데 모아 밀어 냈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김진수가 기절해 버린 가이드와 여동생을 양 옆구리에 끼고 송민후와 김하은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김진수의 뒤로 따라붙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하프 좀비에게 죽거나 임태한의 능력에 휘말려 죽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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