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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62)화 (62/133)

062.

“그때는 그게…… 인류를 구원하는 길인 줄 알았다.”

회한에 잠긴 정강필의 얼굴은 10년은 더 늙어 보일 정도였다. 정강필을 따라 한수호도 기억 속에 묻어 뒀던 것들이 떠오르려 했다.

눈을 감은 그가 찌르르한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곱씹어서 좋을 게 없는 기억들이었다. 다시 눈을 뜬 한수호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했다.

이미 그 당시에 죄를 지었던 이들은 유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정강필이 남아 있지만, 아직 한수호는 그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알지 못한다.

한수호는 정강필에 대한 의문을 마음 깊숙한 곳으로 내리눌렀다. 언젠가 때가 되면 꺼낼 수 있도록. 지금은 헤어졌던 팀원들과 재회하고 생존하는 데 집중해야 했으니까.

오히려 무덤덤한 표정의 한수호를 보는 정강필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한수호를 구한 후 죄책감에 젖어 살았다.

살아 있으면서 그에게 연락하지 못했던 것 또한 그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협회 쪽과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 거지?”

한수호와 진표성은 현재 임태한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몇 번 이쪽에서도 연락을 넣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될지 모른다.

여전히 근방은 좀비들로 우글거리고 있었고, 하프 좀비들이 이후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예상하신 겁니까.”

정강필은 사라지기 전에 한수호에게 전국 곳곳에 있는 은신처에 대해서 알려 줬다.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혼자서만 알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이용하라고 알려 준 정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강필은 꼭 미래를 예측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번 경우만 해도 그렇다. 마치 한수호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그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사라지기 3년 전부터.”

그렇다면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정강필이 죽은 줄 알고 산 세월 또한 3년이었다. 그제야 한수호는 정강필이 준비해 놨던 은신처 안에 있던 무기와 물건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강필이 수년 동안 준비한 것들이었다. 당장 지금 있는 벙커만 하더라도 협회의 웬만한 지부 못지않은 시설을 갖췄다.

식량도 많았던 걸 보면 그는 사라진 이후에도 은신처에 필요한 물품들을 채워 넣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저한테는 왜 귀띔해 주시지 않았던 거예요. 저도 알았다면 대부님과 함께 준비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정강필이 이현의 부모와 관련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 한수호는 정강필의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했을 거다.

“너무 위험한 일이었어. 나 한 명은 죽은 걸로 처리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협회의 이목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다른 등급도 아니고 무려 S급 에스퍼 둘이야. 협회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지. 게다가 너는 절대 이현이를 놔두고 떠나지 못했을 테고.”

그 말까지 듣자 한수호는 더는 정강필에게 과거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이현과 함께 떠나는 게 아닌 이상 이현을 홀로 두고 정강필을 따라나설 수 없었을 테니까.

“이제 와서야…… 나타나신 이유는요.”

처음에 한수호가 정강필을 벙커 안쪽에서 발견했을 때 정강필은 상황 설명을 해 주는 대신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못다 한 이야기는 이후에 하자면서.

이현이 정강필을 보고 이상 반응을 보이자 한수호 또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잃어버린 이현의 기억 속에 자신뿐만 아니라 정강필도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기억을 찾지 못해도 계속해서 이현의 곁을 지켜 주면 되는 일이라고 여겼다. 안일하게 생각하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듯이 휘몰아치는 상황에 한수호마저도 대책 없이 휩쓸리고 있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까지 왔으니까.”

정강필이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던 수심은 마음 깊은 곳으로 갈무리한 표정이었다.

“협회장이 하프 좀비들과 손잡은 겁니까?”

“……맞아.”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도대체 왜…….”

세상이 이렇게 변했어도 협회장의 위치에 있다 보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 협회장도 S급 에스퍼지만 그는 전투에 나서는 대신 주로 협회 안에서 업무를 봤다.

대통령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협회장은 몬스터가 등장하고, 좀비가 나타나기 전 세대의 대통령보다 훨씬 더 높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권력과 부만큼은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그의 아내와 자식이 하프 좀비가 되어 버렸어.”

한수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협회장에게는 자식이 두 명 있었다. 장남은 협회장과 함께 공식 석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하지만 아내와 차남은 거대한 저택 안에서 두문불출한다고 들었다. 두 사람 다 몸이 많이 약해 외부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라고만 알려졌다.

“협회장은 좀비 치료제 개발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강필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최초로 S급 에스퍼로 각성한 만큼 정강필을 따르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정강필은 체질적으로 정치와는 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뒤를 이어 S급 에스퍼로 각성한 이가 협회장의 자리에 오르는 걸 도와준 거였다. 당시의 그는 정강필보다 단체의 수장에 앉아 있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유달리 가정적인 모습도 정강필은 그의 장점이라고 판단했다. 그 장점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칠 줄은 몰랐지만. 미리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를 끌어내리고 다른 이를 협회장의 자리에 앉혔을 거다.

“날이 갈수록 하프 좀비들의 수는 늘어나고. 협회 내에서는 그들을 전멸해야 한다고만 주장하니 회까닥 돌아 버린 거야.”

정강필이 이상함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게 어그러진 뒤였다. 협회장은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었다.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일을 터트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정강필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려고 했다. 심지어 협회장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협회장은 정강필의 힘으로는 섣불리 건들 수 없게 자신만의 입지를 견고하게 만든 뒤였다. 다른 능력자들을 설득해 협회장을 끌어내릴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협회장의 세력이 많다고는 하나 정강필이 앞장서서 그의 계획을 들춰내면 많은 능력자들이 정강필의 편에 설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랬다가는 대한민국은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대한민국에 능력자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지금 이 정도로 버티고 있는 건 너도 알 게다.”

협회 내에서 내분이 일어나면 협회는 그대로 하프 좀비들에게 먹힐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설상가상 협회장이 정강필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가 계속해서 협회에 버티고 있었다면 너도, 이현이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정강필은 당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죽은 걸로 위장하고 언젠가 벌어질 일에 대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알파 팀 팀장들한테도 은신처에 대해 알려 줬다. 아마 대부분은 살아남았을 거야.”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그들은 협회장에게 넘어가지 않은 겁니까.”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야. 혹시 몰라서 다들 은신처 위치는 겹치지 않게 정보를 전달했고.”

협회장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어져 있는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식을 전해 줄 소식통을 협회에 심은 것까지가 정강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무사히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정강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수호에게 다가왔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수호도 팔짱을 풀고 그를 마주 안았다.

등을 두들기는 손길이 기억 속 그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팀장, 어디 있어?”

두꺼운 벽 너머 진표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어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은연중에 알 수 있었다. 한수호가 복잡한 감정을 익숙하게 속내로 감췄다.

“표성이가 너를 찾는구나. 먼저 나가 봐. 나는 감정 좀 추스르고 나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정강필이 눈물을 감추듯 고개를 돌리고 손을 휘적거렸다. 그가 손을 뻗어 닫혔던 문을 열었다. 한수호가 정강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진표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뭐야? 팀장, 그 안쪽에 있었어? 아저씨가 은신처로 사용했다는 방 안에?”

거실에 서 있던 진표성이 한수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꼭 벌레를 씹은 사람처럼.”

한수호는 진표성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저를 불러낸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내 정신 좀 봐. 부팀장한테서 연락 왔어.”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한수호가 진표성의 얼굴을 기민하게 훑어 내렸다.

“다들 무사하군.”

“그냥 물어보면 될 걸, 왜 점쟁이처럼 사람 얼굴을 훑어봐.”

진표성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싫은 소리를 했다. 한수호의 말대로 협회 쪽으로 떠났던 알파 1팀은 모두 무사했다. 진표성은 가장 먼저 황두학의 상태에 대해 임태한에게 물어봤었다.

“막내도 멀쩡하대. 문제는…….”

잠시 밝아졌던 진표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수호도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듯이 가만히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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