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하지만 이현은 항상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잠식돼서 살았다. 한수호와 가깝게 지내고, 정강필까지 만나게 되자 이제는 정말로 기억을 찾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단순한 사고로 돌아가신 거라면 이현도 평생 잊고 살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현은 장례를 치르고 정부 기관에 찾아갔을 때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왜 자신의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는지 알아봐 달라고 정부 기관에 부탁했다. 연구소는 이미 불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어서였다.
정부의 후원으로 연구하다 돌아가신 분들이니 그래 줄 거라 여긴 건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이현은 문전박대당하듯이 쫓겨나야만 했다. 그길로 연구소로 돌아와 미친 듯이 부모님의 흔적을 뒤졌다.
대부분의 자료들은 불에 탄 건지, 아니면 정부 측에서 수거해 간 건지 사라진 뒤였다.
이현이 아지트에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은 모두 지하에서 찾은 것들이었다. 지금 일행이 지내고 있는 벙커처럼 연구소에도 지하에 널찍한 공간이 존재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지상과 달리 지하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처럼 멀끔한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연구소에 지하공간이 있었어요.”
이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늘 꿈을 꾸기 전에는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스무 살의 기억이 사라지면서 이전의 기억에도 군데군데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분명 지하는 이현이 출입할 수 없던 장소였다. 이현이 자신이 봤던 지하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기억력이 좋은 덕분에 어떤 장면들은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실험체들이 갇혀 있던 우리가…… 다 파손되어 있었고…….”
드문드문 말을 이어 가는 이현을 보는 한수호의 얼굴 위로 수심이 내려앉았다. 뺨과 턱을 한 번에 감싼 채 붉어진 눈가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물이 묻어날 것 같았다.
지하공간을 떠올리던 이현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배어났다. 한수호가 손에 살짝 힘을 줘 이현의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과거 어딘가를 유영하듯 흐릿해졌던 초점이 한수호에게 박혀 들었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떠오를 거야.”
이현은 아직도 한수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라고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다였다.
지척에서 들여다보이는 눈동자에 이현이 급작스레 찾아왔던 두통도 잊고 숨을 멈췄다.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안전한 직장이라고 생각했던 협회에는 일이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알파 1팀에서는 배신자가 나왔으며 이현에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힘이 발현됐다.
아직 서동연과의 악연도 끝난 게 아니었다. 제 능력을 알게 된 하프 좀비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가능성도 존재했다.
하지만 이현은 눈앞의 사람과 함께라면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떨어지면 즉사할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에서도 그의 온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처럼.
먼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건 이현이었다. 입술에 닿는 감촉에 흔들리던 검녹색 눈동자도 곧 내려앉는 눈꺼풀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좀비들의 하울링이 들려오는 공간에서도 서로의 숨결을 탐하는 시간은 한없이 달기만 했다.
* * *
“얘기 좀 해요.”
“어, 그래.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정강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현재 거실에는 정강필과 진표성만 있었다. 김민지는 일찌감치 잠든 김솔과 함께 방에 들어갔고, 꽤 늦게까지 버티던 신민우도 들어간 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가이드는 잠든 거야?”
“응.”
“이리 줘. 두 사람 얘기할 거면.”
이현은 아이처럼 한수호의 품에 안겨 잠든 상태였다.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둥지를 찾은 것 같은 표정에 진표성은 입맛이 씁쓸했다.
한수호는 별다른 말 없이 진표성에게 이현을 건넸다. 가뿐하게 이현을 안아 든 진표성이 거실에서 사라지고, 한수호가 정강필에게 벙커 안쪽을 눈짓했다.
한수호가 정강필을 발견한 장소였다.
부엌을 지나면 나오는 안쪽의 공간에는 언뜻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벽이 있었다. 정강필이 벽의 한구석에 제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희미하던 선이 뚜렷해지면서 안쪽으로 연결되는 문이 열렸다. 문의 크기는 작았다. 성인 남성이라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정강필이 먼저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수호도 이어 그를 따라 들어간 후 허리를 폈다.
“표성이는 여전하더구나. 밝고, 정의롭고, 긍정적이야.”
한수호까지 들어오자 정강필이 벽에 손을 가져다 대 문을 닫았다. 밀실 같은 공간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한 사람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침대 하나와 안락한 의자 두 개와 테이블. 그리고 한쪽에 쌓여 있는 식량과 작은 욕실 겸 화장실까지. 공기정화 시스템은 이곳에도 작동되고 있어 음식이 다 떨어질 때까지 나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자신이 지내던 침대 위에 걸터앉은 정강필이 한수호에게 건너편 의자에 앉으라 손짓했다. 한수호는 고개를 젓고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섰다.
“너는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가이드랑 얘기한 게 잘 안 풀린 거냐?”
과거보다 더 무뚝뚝해진 한수호를 향해 정강필이 가볍게 혀를 찼다. 한수호와는 아직 깊은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자신이 숨어 있던 공간을 찾은 후 저를 봤을 때는 그래도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짓더니만.
“이현이가 대부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
그러나 이어지는 한수호의 말에 정강필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엷은 미소가 맺혀 있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팔짱 낀 채로 그런 정강필의 표정 변화를 살피는 한수호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죽었던 그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한수호도 심장이 철렁했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던 사람이다. 연구소에서 탈출한 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라 한수호가 이현 다음으로 애틋하게 생각하는 이였다.
이현이 꿈속에서 정강필을 만난 장소는 다름아닌 연구소였다. 자신의 처절했던 과거가 잠들어 있는 곳.
“저한테 숨기고 있는 게 뭡니까.”
하지만 한수호는 정강필과 재회한 후 단순히 기쁜 감정에만 취해 있을 수는 없었다. 분명 자신이 아는 정강필이 맞는데도 그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서였다.
어쩌면 그가 죽었다고 알고 지낸 세월 동안 한수호가 수많은 경험을 해서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나무만 봤다면 이제는 숲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긴 걸 수도 있었다.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한수호에게 연락을 취했을 사람이다. 자신이 그를 잃은 후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낄지 모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정강필도 실험에 연관이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가이드 부모님을 알아. 한때는 동료였고.”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이야기인 만큼 선뜻 말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수호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동시에 가슴속에 영영 꺼지지 않을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불안할 정도로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정강필은 이현을 제외한 이는 아무도 믿지 못하던 자신을 세상으로 끌어 올려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것도 아닌, 실험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걸 여태껏 숨겼다. 그러나 한수호는 제 과거에 그가 연관되어 있었다는 절망감보다 그가 이현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면 왜 그동안 말해 주시지 않은 겁니까. 제가…… 이현이와 어떤 관계인지 잘 아시면서요.”
이현은 모르겠지만 한수호는 이현의 주변을 항상 맴돌았다. 이현도 모르던 위험이 그를 향해 다가갈 때면 온 힘을 다해 막기도 했다.
이현이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보이지 않는 한수호의 희생 덕분이었다.
한수호도 처음부터 자리를 잡았던 건 아니다. 특히 이현이 스무 살이던 시절에는 한수호의 나이도 고작 스물한 살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그 당시 한수호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능력도 발현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신적 충격을 겪어 사실상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때 한수호를 구해 주고, 한수호의 부탁에 따라 이현을 도와준 건 바로 정강필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각성한 S급 에스퍼의 영향력은 대한민국 전체를 아울렀다. 정강필의 비호 아래 있는 이현과 한수호를 건들 수 있는 사람 혹은 단체는 없었다.
이현이 부모님 죽음 이후에도 장학 단체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어떻게 말하겠니. 너를 그토록 괴롭혔던 이들과 동료였다는 걸.”
“…….”
이번에는 한수호도 선뜻 뭐라 말하지 못했다. 당시의 기억을 들춰내는 것만으로도 분노로 머릿속이 어떻게 되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한수호는 감정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손바닥이 파이도록 주먹을 쥐고 있었다.
한수호를 바라보는 정강필의 눈이 서글퍼 보였다. 아직도 한수호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멀끔한 외모지만 당시에는 사람이라기보다 상처 입은 짐승에 가까웠다.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물어뜯을 듯한 살기 어린 눈동자는 역설적으로 품에 안고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여리게 보이기도 했다.
정신을 잃은 이현을 품에 안은 채 한수호는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과 이현을 그렇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듯이.
실핏줄이 모두 터져 나가 새빨개진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정강필은 한수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