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하프 좀비들이 빠져나가고 김하은이 등을 바닥에 댄 채 다친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회복 포션을 마시게 하기가 힘들었다. 다친 이도, 김하은도 몸이 꽁꽁 묶인 상태라 더 그랬다.
회복 포션을 구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제는 어떻게 먹여야 하나 고민에 빠져들었다. 회복 포션의 양은 적었다. 색깔로 보아 상급도 아니었다.
반은 마시게 한 다음에 나머지 반은 상처가 난 부위에 직접 바르는 게 좋을 듯했다.
“끈을 어떻게 해서든지 풀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회복 포션의 뚜껑을 여는 것도 힘들었다. 힘겹게 연다고 하더라도 자칫하면 바닥에 다 쏟게 생겼다.
“이거…… 찾았어요.”
심혜연이 침대 바닥에서 찾은 것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칼이었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김하은이 몸을 움직여 심혜연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아까처럼 등을 붙이고 앉았다. 유리 조각으로는 흠집만 나던 끈이 칼날이 닿자 조금씩 잘리기 시작했다.
칼에서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가이드도 사용할 수 있는 하급 아티팩트 같았다. 김하은이 자유로워진 두 팔목을 돌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하얀 살결 위에 줄 모양대로 자국이 났다.
두 발목을 묶고 있던 줄까지 끊어 내자 다리에 찌르르한 통증이 번졌다.
“하은 씨, 나도 풀어 줘.”
“잠시만요.”
급한 건 회복 포션을 다친 가이드에게 먹이는 일이었다. 김하은은 눈짓으로 심혜연에게도 양해를 구한 후 회복 포션을 들고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가이드 이름이 뭔지 알아요?”
“……김유진이요.”
“유진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심혜연이 알려 준 이름을 부르며 김하은이 김유진의 어깨를 쥐고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다행히 이름을 부른 효과가 있었다. 속눈썹이 떨리며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여기, 가 어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얘기해 줄게요. 일단은 회복 포션부터 마셔요.”
김유진도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살기 위해 김하은이 주는 회복 포션을 받아 마셨다.
식도를 타고 번져 가는 화한 느낌에 잠시나마 들었던 의식이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김하은은 이어 김유진의 머리 상처에도 남은 회복 포션을 꼼꼼하게 발랐다. 김유진의 안색이 회복 포션을 먹이기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
그제야 김하은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혹시라도 김유진이 죽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은 씨.”
“알았어요.”
재촉하는 송민후의 목소리에 김하은이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송민후의 몸을 결박한 끈을 풀어 주고 힘을 주면 금방 풀리도록 다시 묶었다.
“왜 다시 묶어?”
“하프 좀비가 다시 들어와서 보면 안 되잖아요. 지금 당장 다른 데로 도망칠 수도 없는데 일단은 얌전히 묶여 있는 척해야죠.”
틀린 말이 아니기에 송민후가 순순히 김하은에게 제 몸을 맡겼다. 김하은은 이어 심혜연과 김유진을 묶고 있는 끈도 잘라 낸 후 다시 묶었다.
“이름이 뭐예요?”
“……심혜연이요.”
“나랑 이름이 비슷하네.”
심혜연이 엷게 미소 지었다. 김하은과 같은 곳에 갇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차분한 행동 덕분에 패닉에 빠졌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파견 나갔던 에스퍼들이…… 구하러 오겠죠?”
전담 가이드 계약을 맺은 에스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심혜연은 에스퍼들과 대체적으로 매칭률이 높았다. 그동안 가이딩을 했던 에스퍼들의 면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요. 다른 팀은 몰라도 알파 1팀은 꼭 돌아올 거예요. 다들 강한 사람들이니까.”
알파 1팀은 서울 지부,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팀이다. 다른 지부에서도 서울 지부에 생긴 이변을 알게 되면 도움의 손길을 뻗어 올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연구원님도 이번에 알파 1팀이랑 같이 파견됐는데.”
김하은이 불현듯 떠오른 얼굴에 침음을 삼켰다. 알파 1팀이 어떤 임무를 받았는지는 극비여서 김하은도 몰랐다. 다만 이현이 가이드로서 알파 1팀과 함께 파견됐다는 건 행정실 소속 직원으로서 알게 됐다.
“차라리 다행인 건가.”
협회 내에 있는 대부분의 가이드와 에스퍼들이 하프 좀비에게 인질로 잡힌 상황이었다. 연구소 쪽도 멀쩡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그쪽에는 연구하기 위해 잡힌 좀비들도 많았다. 평소에는 철두철미한 보안장치로 안전이 유지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건물에 문제가 생겨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장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김이현 연구원 말하는 거 맞죠?”
“어? 알아요?”
“……네. 가이드들 사이에서 좀 유명해요.”
“왜요? 제가 알기로는 연구원님 B급 가이드인데. B급 가이드면서 수석 연구원이라 유명한 건가?”
“……외모가.”
“아.”
한마디로 이해됐다. 이현은 평소에 앞머리를 덥수룩하게 내린 상태에서 이상한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하지만 이목구비를 가린 와중에서도 묘하게 사람을 끄는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안경을 벗을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김하은도 이현이 안경을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세 번 정도 있었다.
“……알파 1팀 잘생긴 얼굴들 좀 보고 싶네요.”
“……저도.”
송민후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으며 코웃음 쳤다. 죽을 위기를 넘기더니 외모 얘기나 하고 있는 게 한심해서였다.
그러나 송민후는 이후 알파 1팀과 재회한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걸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 * *
“부팀장님, 저쪽에서 연기가…….”
“다들 멈춰.”
“네.”
알파 1팀이 임태한의 지시에 따라 움직임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김진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의 끝에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물이 보였다.
협회 본부 건물 중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저기 우리 숙소인데.”
에스퍼들의 숙소 건물이었다. 이미 건물의 반은 무너진 상태였다. 나머지 반은 맹렬한 불길이 넘실대며 타오르고 있었다.
황두학이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김종현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던 황두학은 회복 포션과 팀원들의 보살핌 덕에 건강을 회복한 상태였다.
다만 더 쉬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계속해서 움직인 결과 안색이 조금 창백할 뿐.
“으으읍……!”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손가락 하나 더 잘라 줄까?”
김종현이 재갈을 문 채 비명을 질러 댔다. 재갈은 핏물에 흠뻑 젖어 들어 색이 탁했다. 이나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김종현의 뒤쪽으로 가 쭈그려 앉았다.
등 뒤로 묶인 김종현의 손 위에도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손가락 하나는 마디 두 개가 사라진 상태였다.
“……저 너무 무서워요.”
“나도 무서워, 인마.”
황두학이 김진수의 곁에 달라붙었다. 김진수도 이나리의 이런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배신한 팀원인데도 김종현이 불쌍해 보일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아무래도 하프 좀비들이 가이드 센터 쪽에 몰려 있는 것 같네.”
“……가이드들이 위험한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본부와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들 안색이 어두워졌다. 특히 김진수는 눈에 띄게 초조한 모습을 보였다.
“유진이 무사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
가이드 센터에는 김진수의 여동생이 있었다. 다정한 성격의 김진수를 닮아 알파 1팀의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가이드였다. 특히 황두학은 가이딩을 받을 때마다 김유진에게 주로 받고는 했다.
매칭률도 높고 겉모습과 달리 숙맥인 그가 유일하게 편히 대할 수 있는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김진수에게 김유진이 무사할 거라고 말한 건 저의 간절한 바람과도 같았다.
“크햐아악―!”
“키이익, 킥, 킥―!”
협회 주변을 배회하던 좀비들이 알파 1팀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협회 직원들이랑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사용되던 좀비 몬스터들입니다.”
이낙균이 일반 좀비들의 목에 걸린 사원증과 좀비 몬스터들에게 표시된 표식들을 살폈다. 에스퍼 숙소에서 남동향 쪽에 있는 연구소도 한쪽 벽면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임태한이 결정을 내렸다. 협회가 하프 좀비들에게 넘어갔다는 걸 확인했다. 지금부터 할 일은 협회 내의 생존자들을 구해 협회를 다시 탈환하는 거였다.
그래야 한수호와 다시 합류해 서동연 무리와 일전을 벌일 수 있다. 알파 1팀의 힘만으로 하프 좀비 전체와 싸우는 건 무리였다.
“가이드 센터 쪽으로 이동할 거야. 다들 준비해.”
임태한이 바람으로 돌멩이를 움직여 근처까지 다가온 좀비들의 머리통을 동시에 터트린 후에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장 많은 기척이 느껴지는 게 가이드 센터였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살아남은 에스퍼들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