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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55화 (55/133)

055.

이곳에 오지 않은 에스퍼들도 있겠지만 눈대중으로 봤을 때 그 수는 많지 않을 것 같았다. 파견 나간 S급 에스퍼들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들 이쪽으로 움직여.”

모든 에스퍼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하프 좀비들이 생존자들을 가이드 센터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김하은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두 발목이 맞붙도록 묶어 놓은 탓에 잰걸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일부 생존자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기도 했다.

“얌전히 있어. 다치기 싫으면.”

김하은은 송민후를 비롯한 가이드 몇 명과 한 공간에 밀어 넣어졌다. 가이드 중 한 명은 크게 다친 건지 얼굴 한쪽이 피투성이였다.

송민후도 다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는 김하은처럼 에스퍼였다. 그렇기에 같은 고통은 느낄지언정 회복 속도는 가이드보다 훨씬 빨랐다.

“괜찮아요?”

“흐으……. 네…….”

김하은이 다친 가이드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갓 스무 살은 됐을까 싶은 어린 여자였다. 단발머리가 피에 젖은 걸로 보아 머리 쪽에 상처가 있는 것 같았다.

“어디 다친 거예요?”

“벽에…… 머리를 부딪쳤어요…….”

가이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생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출혈량이 너무 많았다. 지혈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가이드도 김하은처럼 팔목이 묶인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이드는 전투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발목은 묶지 않았다는 거다. 김하은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송 비서님, 회복 포션 가지고 있는 거 있어요?”

“없는데…….”

송민후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김하은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방향을 향해 부자연스럽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의심스러웠다.

김하은이 송민후의 몸을 구석구석 훑어봤다. 회복 포션을 숨길 만한 곳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하은 씨, 지금 뭐 해……?”

“송 비서님 표정이 회복 포션 가지고 있는데도 숨기는 사람처럼 보여서요.”

“나를 뭘로 보고……!”

뭘로 보기는. 찌질이로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C급 몬스터 열 마리도 잡아 보고, 좀비들도 다수 죽여 봤다고 자랑하듯이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위험 상황에 처하자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물론 그가 하프 좀비들에게 붙잡혔던 경험 때문에 더 공포에 시달리는 건 이해가 가지만, 약한 소리만 하는 그가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면…… 하은 씨가 가장 먼저 죽을 거야.”

김하은의 눈초리에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송민후가 작은 목소리로 악담을 했다. 김하은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송민후의 안위는 앞으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회복 포션 있는 거 맞죠?”

다친 가이드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김하은이 이번에는 말로만 묻지 않고 송민후에게 바짝 다가갔다.

“왜, 왜 이래……?”

당황한 송민후가 몸을 뒤로 물렸으나 등 뒤는 벽이었다. 김하은이 발을 들어 송민후의 몸 구석구석을 눌렀다.

“이거 뭐예요?”

“회복 포션 아니라니까……!”

그러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딱딱한 게 느껴졌다. 송민후는 기겁하면서 몸을 옆쪽으로 피하려고 했다.

“셋 셀 동안 안 보여 주면 소리 질러서 하프 좀비 부를 거예요.”

“뭐?”

“하나, 둘, 세…….”

“회복 포션이 아니라 공격용 아티팩트라고……!”

송민후가 혹여 소리가 새어 나갈세라 작은 목소리로 최대한 절실하게 얘기했다. 억울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에도 김하은은 꺼내 보라며 턱짓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걸린 거예요?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무기 다 빼앗겼는데.”

“……개조한 거야.”

소지하고 있는 게 걸리면 단순 벌금형으로 끝나지 않는 불법 개조용 아티팩트였다. 송민후가 할 수 없이 몸을 흔들어 주머니 안쪽에 들어 있던 아티팩트를 꺼냈다.

“권총형이네요.”

아티팩트는 손가락 두 마디만큼 작았다. 마력을 흘려 넣으면 아마 한 손에 적당히 잡힐 만큼 커지는 종류의 아티팩트처럼 보였다.

“저한테 줘요.”

“내가 왜……!”

“저 지금 부탁이 아니라 협박하는 거예요.”

김하은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기세에 눌린 송민후가 결국 제 무기를 김하은에게 내어 줬다. 김하은이 고개를 숙여 아티팩트를 입으로 물었다.

볼 안쪽에서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손에 쥐고 있다가는 들킬 가능성이 높다.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혹시 제 손 좀 풀어 줄 수 있어요?”

“……어떻게요?”

“저기 아래에 떨어져 있는 유리 조각 보여요?”

“네.”

“그걸 신발 사이에 끼워서 줄을 긁으면 제가 힘을 줘 볼게요.”

김하은이 다친 가이드 말고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는 가이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부상을 당한 가이드는 의식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해 볼게요.”

부탁받은 가이드도 동료 가이드가 죽어 가는 모습을 외면할 수는 없는지 힘을 냈다. 김하은이 시키는 대로 유리 조각을 발 사이에 끼워 움직였다.

“생각보다…… 잘 안되네요…….”

그러나 유리 조각이 신발 사이에서 자꾸만 헛돌았다.

“차라리 서로 등을 맞댄 상태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괜찮겠어요? 손 다칠 수도 있는데.”

김하은도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줄을 풀어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에서 다칠 수도 있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런 거라도…… 해야죠.”

심혜연은 겁이 많고 소심했다. 가이드들 중 일부가 하프 좀비들에게 반항하는데도 그녀는 그저 눈물만 흘리며 덜덜 떨었다.

지금이라도 가능한 한 용기를 내고 싶었다. 몸을 뒤로 움직여 유리 조각을 쥐었다. 날카로운 단면에 쓸린 손끝에 핏방울이 맺혀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김하은의 손을 묶고 있는 줄을 유리 조각으로 긁어 댔다. 하지만 끈은 흔적만 남을 뿐 좀처럼 끊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반 끈이 아닌 것 같아요…….”

하급 에스퍼라고는 해도 일반인과 비교하기 힘든 악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프 좀비들은 허술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일반 노끈과 다름없어 보이는데 마력이 깃든 끈인 모양이었다.

김하은이 눈동자를 굴려 내부를 살폈다. 네 사람이 갇혀 있는 곳은 가이딩실이었다. 더블 침대와 욕실이 있는 작은 호텔 룸처럼 생긴 곳이었다.

“위험하니까 유리 조각은 놓고 있어요.”

손을 풀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급한 대로 지혈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김하은이 꿈틀꿈틀 몸을 움직여 욕실에 다가갔다.

손과 발이 부자연스러운 게 이토록 힘겨운 일일 줄 몰랐다. 간신히 균형을 잡아 일어났다. 수건 하나를 입으로 물고 다시 돌아오자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 봐요. 어떻게 해서든 회복 포션 구해 올게요.”

“으으…….”

다친 가이드의 곁에 앉아 몸을 뒤로 해서 수건을 상처 부위에 올렸다. 두 손으로 지그시 상처를 압박했다.

하얗던 수건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가이드의 숨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초조했다.

“이것 좀 저 대신 눌러 줄 수 있어요?”

“……네.”

수건을 심혜연에게 맡기고 김하은이 닫힌 문 쪽으로 몸을 움직여 갔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문을 걷어찼다. 쾅, 쾅,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걷어차자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조용히 있으라는 말 못 들었어?”

“다친 사람이 있어서요. 회복 포션 하나만 주세요.”

하프 좀비의 시선이 다친 가이드에게 향했다. 신선한 피 냄새에 납작한 코가 벌름거렸다. 김하은의 인상이 굳어졌다. 방법이 없어 하프 좀비를 부른 건데 더 큰 위험을 자초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입맛을 다시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자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볼 안쪽에서 굴려지는 아티팩트를 꺼내야 할 타이밍을 쟀다.

김하은뿐만 아니라 송민후와 심혜연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프 좀비가 갑자기 눈이 돌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도륙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아, 이쪽이 소란스러워서.”

“무슨 일인데?”

“가이드가 다쳤나 봐.”

“돌발 행동 하지 말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아까 경태 새끼, 어떻게 됐는지 몰라서 그래?”

“나도 알아. 근데 얘가 먼저 시끄럽게 굴었다니까?”

새로운 하프 좀비가 하나 더 나타났다. 김하은은 부디 긍정적으로 상황이 흘러가기를 속으로 바랐다. 김하은이 혀끝으로 아티팩트의 우둘투둘한 면을 긁을 때였다.

“가이드가 다친 거면 하나 줘. 하급으로.”

“……알았어.”

아무래도 새로 등장한 하프 좀비가 처음에 들어왔던 놈보다 서열이 높은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하프 좀비가 회복 포션 하나를 꺼내 김하은의 가슴팍으로 던졌다.

“달라는 거 줬으니까 진짜로 조용히 해라. 다음부터는 안 봐줄 거니까.”

“……네. 감사합니다.”

원하는 걸 얻은 상황이었다. 김하은은 하프 좀비를 더는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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