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54화 (54/133)

054.

뒤를 쳐다본 김하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적극적으로 구하려고 노력하지는 못했어도 목적지에 같이 다다르고 싶었다. 새하얀 셔츠가 순식간에 피로 젖어 가는 걸 보며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줬다.

“크햐아―!”

좀비 몬스터와 다른 일반 좀비의 괴성이 등 뒤에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김하은은 앞만 보고 달렸다.

등 쪽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발소리에 집중하다가는 바닥을 뒹굴 것만 같았다. 김하은의 예상대로 가이드 센터 주변에는 에스퍼 정복을 입은 이들이 다수 몰려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였다. 에스퍼들이 하나같이 센터 안쪽을 바라보며 능력을 끌어올렸다. 김하은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몰고 온 좀비 떼들을 발견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에스퍼들도 있었지만 일부였다.

다들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에 사그라들던 불안감이 되살아나는 불꽃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하프 좀비들이 어떻게…….”

협회 소속 에스퍼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쪽 눈만 회색빛으로 물든 이들이 가이드들을 인질로 붙잡고 있었다.

게다가 가이드 중 몇몇은 부상을 입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새하얀 정복이 유독 피에 젖어 검붉었다.

에스퍼들의 눈 또한 분노로 새빨갰다. 심각한 분위기와 달리 하프 좀비들의 선두에 선 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순순히 투항하라고. 이러다 한 명은 골로 간다?”

놈이 뒤에 있는 하프 좀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부상을 당한 채 쓰러져 있는 가이드 한 명의 목이 하프 좀비의 손에 우악스럽게 잡혔다.

“으윽…….”

“준우야!”

에스퍼 한 명이 앞으로 뛰쳐나가다가 곁에 있는 동료에게 팔이 붙들렸다. 김하은도 아는 이들이었다. 전담 가이드 계약을 맺은 협회 내 유명 커플이었다.

준우라 불린 가이드가 선두에 서 있는 하프 좀비의 앞에 툭 떨어졌다. 가이드의 얼굴 한쪽이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하프 좀비가 바닥에 쭈그려 앉아 가이드의 머리채를 쥐어 들어 올렸다. 실눈을 뜬 가이드가 그대로 하프 좀비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맞는 게 취미인 것 같네.”

“아흑…….”

“이거 놔요……!”

그나마 멀쩡하던 가이드의 다른 쪽 얼굴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코피가 얼굴 하관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연인인 에스퍼가 울부짖는 소리가 구슬프게 퍼져 나갔다. 고함에 영향을 받은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가서 상황 좀 정리해.”

“네.”

무리의 리더가 내린 명령에 하프 좀비들 중 일부가 좀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김하은이 하나씩 힘겹게 해치웠던 좀비들이 일반 좀비나 좀비 몬스터 할 것 없이 하프 좀비들의 손에 무자비하게 머리통이 꿰뚫렸다.

“커윽…….”

“다들 무기 내리고 무릎 꿇어. 진짜로 이 새끼 눈깔 뒤집어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가이드의 가느다란 목은 하프 좀비의 손아귀에 손쉽게 잡혔다. 머리를 울리는 통증에 가이드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침을 뱉었던 패기는 희미해지는 정신에 사라져 버렸다.

목이 졸려 입 안 가득 차오른 핏물이 역류하는 소리가 났다. 부어오른 눈꺼풀 아래 드러나는 눈동자에서 빠른 속도로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항복할 테니까 제발 놔줘…….”

가장 먼저 무기를 바닥에 던진 건 가이드의 연인인 에스퍼였다. 죽어 가는 연인을 눈앞에서 지켜만 보는 건 차라리 제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에스퍼들도 할 수 없이 무기를 내려놨다. 하프 좀비들의 이목을 피해서 몸을 움직일 만한 상급 능력자가 있다면 모를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높은 에스퍼의 등급은 A급이었다.

하프 좀비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놈은 S급 에스퍼와 능력이 비슷해 보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일부 에스퍼들은 안색이 희게 질린 상태였다.

두려워도 그들과 싸우는 건 괜찮다. 문제는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가이드들의 안위였다.

“한 명씩 내 앞으로 와.”

하프 좀비는 철두철미했다. 에스퍼들이 무기를 버렸어도 방심하지 않았다. 묵직한 자루 안에서 에스퍼들의 능력을 봉인하는 아티팩트가 쏟아져 나왔다.

수갑 모양처럼 생긴 아티팩트는 B급 에스퍼들까지는 일반인처럼 만들 수 있는 종류였다.

“A급들은 이쪽에 따로 서.”

전쟁 포로처럼 에스퍼들이 하프 좀비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구속구가 팔목에 채워진 에스퍼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 연인을 안아 들었다.

“준우야,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하프 좀비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 그런지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걸 떼어 놓지는 않았다. 다른 에스퍼들도 구속구로 능력이 봉인되자마자 가이드들을 살폈다.

다행히 가이드 중에서 좀비로 변한 이는 없었다. 다만 가이드 센터를 지키고 있던 에스퍼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쓰레기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C급이랑 D급 에스퍼들은 어떡할까요?”

구속 아티팩트는 구하기 힘들었다. 최대한 많은 양을 구해 왔지만 하급 에스퍼들한테까지 사용하기에는 아까운 게 사실이었다.

“사지 결박해서 한쪽에 처박아 둬. 주변에 감시하는 인력 충분하게 배치해 놓고.”

“네.”

현재 이곳에 있는 하프 좀비를 이끌고 있는 리더, 이찬혁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일대의 좀비들을 다 처리하고 모인 하프 좀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으읏…….”

우악스럽게 팔을 뒤로 잡아당기는 힘에 김하은이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힘겹게 가이드 센터로 도망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졸지에 하프 좀비들에게 붙잡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프 좀비들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문제는…… 하프 좀비들의 입김이 어디까지 닿아 있냐는 점이었다.

“가만히 있어.”

하프 좀비는 팔을 결박한 것에 이어 두 발목도 꽁꽁 묶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묶는 바람에 다리 쪽에서부터 아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하프 좀비들은 대체적으로 성격이 포악하니까.

“아……!”

하프 좀비는 김하은의 다리까지 다 묶고 나자 목덜미를 잡아채 한쪽으로 던졌다. 졸지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김하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김하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묶인 채 짐짝처럼 던져졌다.

“하은 씨, 무사했네.”

“송 비서님…….”

하은의 옆에 떨어진 남자가 김하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협회장 비서실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일전에 김하은에게 협회 상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경고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온 길이 평탄치 않았던 건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른쪽 눈썹 위에 찢어진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한쪽 얼굴 위로 굳어 버린 핏자국이 선명했다.

“가이드 센터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서 온 거지……?”

“……네.”

지금은 차라리 다른 곳에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란 후회가 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미래를 모르는 이상 김하은은 같은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협회장님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셨어요?”

김하은의 질문에 송민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김하은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초창기부터 앞장서서 뛴 그를 존경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는 협회의 머리였다.

현재 협회 내에 하프 좀비들이 쳐들어온 상황이었다. 전시 체제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협회장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지휘 체계가 혼잡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게…… 협회장님이 분명 안에 계신 걸 봤는데…… 후문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들어가니까 이미 안 계시더라고.”

“다른 일정이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야. 10분 전만 해도 분명 안에 계셨어. 내가 보고드릴 자료 들고 들어갔기 때문에 확실해.”

“그럼 도대체…….”

협회장도 S급 에스퍼다. 그런 만큼 비서들 모르게 빠져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녔을 터. 문제는 협회장이 왜 갑자기 사라졌냐는 거다.

게다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협회장이 사라진 게 자의인지 타의인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우리 이러다…… 다 죽겠지?”

“그런 소리 마요.”

송민후의 눈동자에는 희망이 없었다. 근처에 서 있는 하프 좀비들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는 공포심만이 가득했다.

“하은 씨는 몰라. 이놈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러고 보니 송민후는 협회에 들어오기 전 하프 좀비들에게 붙잡혔던 적이 있다고 했다.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김하은에게도 그가 느끼는 공포가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김하은이 주변을 둘러봤다. 하프 좀비들과 싸울 수 있는 A급 에스퍼들도 하프 좀비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놈에게 한 명씩 제압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가 반항할 기미라도 보이면 하프 좀비들이 가이드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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