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50화 (50/133)

050.

착각이 아니었다. 이현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진표성은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물러나더니 시간이 흐르자 슬금슬금 이현의 옆으로 다가와 붙었다.

“크흠, 도와줄 거면 이것 좀 썰어 줘.”

김치 반 포기가 떡하니 도마 위에 놓여 있었다. 새콤하면서 입맛을 자극하는 냄새가 확 풍겼다. 한수호가 어떻게 찾은 곳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일상생활이 가능한 벙커라고 봐도 좋을 듯싶었다.

이현이 손에 묻은 물기를 떨어내고 식칼을 쥐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김치에 닿는 순간이었다.

“잠깐.”

“왜요?”

“너 칼질할 줄 아는 거 맞아?”

진표성의 안색이 심각했다. 여전히 이현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서 손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당연히 할 줄 알죠.”

할 줄 아는 사람이 김치 위에 올려진 손가락을 곧게 펴고 있었다. 칼질을 할 때는 혹시라도 칼날에 베이지 않도록 손가락을 적당히 둥글게 마는 게 기본이었다.

이현의 칼질은 한눈에도 서툴러 보였다. 저러다 손가락을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현은 왜 진표성이 이렇게 반응하지는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덩달아 안색을 굳힌 이현이 진표성의 눈치를 보면서 김치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잘리는 김치의 단면은 깔끔했다. 그만큼 칼날이 손을 살짝만 대도 베일 만큼 날카로워서였다.

“……그냥 나가 있어. 꼬맹이랑 놀고 있든지.”

“혼자 하면 힘들잖아요.”

아직 다른 사람들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현을 부르러 왔던 한수호도 보이지 않았다. 진표성 혼자 하기에는 일이 많아 보였다.

“요리 몇 가지 하는 거예요? 김치로는…… 찌개?”

“어. 찌개랑 볶음밥 하려고. 꼬맹이한테는 찌개가 매울 수도 있으니까.”

이현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진표성은 할 수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이현을 살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현의 손에서 칼을 뺏어 들 수 있도록 긴장한 상태였다.

등근육이 선명한 상태로 진표성이 자신을 관찰하는지도 모르고 이현은 김치를 써는 데 집중했다. 적당히 도톰한 입술이 새 부리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따금 붉은 혀가 빼꼼히 튀어나와 아랫입술을 핥기도 했다. 이현이 재료를 손질하는 데 집중하는 것과 반대로 진표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재료 손질은 뒷전이었다.

이미 도마 위 햄은 죽에 넣어도 될 정도로 잘게 다져진 상태였다. 칼날은 썰 재료가 없자 어느새 무방비하게 펴져 있는 진표성이 손가락에 닿았다.

“진표성 에스퍼!”

“아…….”

생각보다 깊게 베인 상처 위로 피가 송골송골 맺히더니 곧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표성이 햄에 피가 닿기 전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현이 칼을 놓고 진표성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김치 양념이 잔뜩 묻은 걸 발견했다. 개수대에서 물을 틀어 손을 씻으면서 그가 진표성을 향해 눈짓했다.

“이쪽으로 와요. 지혈해야 되니까.”

이현은 놀랐지만 진표성에게는 별거 아닌 상처였다. 살짝 따끔한 게 다였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현이 크게 놀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이토록 달콤한 기분이 드는지 처음 알았다.

이현의 손에 이끌려 피 흐르는 손가락을 물줄기 아래에 가져다 댔다. 피가 씻겨 내려가자 살이 양쪽으로 벌어져 있는 게 보였다.

“……따갑다. 호― 해 줘.”

“나한테 조심하라고 하더니.”

혀를 쯧쯧 차면서도 이현은 한구석에 놓여 있는 키친타월을 몇 장 뜯어 진표성의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상처 부위가 압박되도록 꾸욱 누르자 하얀 타월이 금세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이현이 타월을 떼어 내고 상처 부위를 유심히 관찰했다. 호오, 호― 진표성이 원하는 대로 상처 위에 입바람을 불기도 했다.

손끝에서부터 번진 열기가 심장을 자극했다. 심장에 머무른 열기는 금세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특히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게 느껴졌다.

턱 아래에서 살랑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씻은 지 얼마 안 되는 이현에게서는 달큼한 냄새가 났다.

원래의 체향에 이현이 씻으면서 사용한 제품의 향이 더해졌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귓불을 보자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핥으면 피부에서마저도 단맛이 날 것만 같았다.

“이제 피는 다 멎은 것 같아요. 연고도 있을까요? 아니면 상처가 심하지 않으니까 회복 포션을 소량이라도 바르는 게 좋을 것 같은…….”

이어지려던 말은 볼에 닿은 온기에 사그라들었다. 이현은 어느새 제 볼을 감싼 진표성의 손에 이끌려 고개를 들게 됐다.

어느새 이렇게 다가온 걸까.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짐승을 닮은 샛노란 눈이 흐릿했다. 시선은 이현의 얼굴 곳곳을 배회했다. 그러다 한곳에 머물렀다.

이현의 목울대가 울렸다. 진표성은 먹음직스럽게 생긴 도톰한 입술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입술의 감촉을 알기 때문에 더 갈증이 났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입술을 맛볼 수 있는 적기일지도 모른다.

서서히 틀어지는 얼굴에 이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표성을 밀어 냈다. 커다란 덩치는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이현의 손바닥에 제 몸체를 바투 붙여 왔다.

손바닥 아래에서 선명하게 맥동하는 근육을 느끼며 이현이 연이어 침을 삼킬 때였다.

“저도 도와드릴까요……?”

때마침 방에서 나온 김민지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김솔도 김민지의 뒤를 이어 이현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솔이 많이 배고파요.”

“빨리 맛있는 거 해 줄게.”

이현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치를 마저 썰었다. 피 묻은 타월은 휴지통에 버렸다.

채소도 썰려고 했지만 이미 채소들은 잘게 썰려 냉동된 상태였다.

“……분위기 좋았는데.”

진표성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금 요리하기 시작했다. 프라이팬에 적당량의 기름을 두르고 순식간에 볶음밥을 완성했다.

“꼬맹아, 먼저 먹어.”

김솔의 밥을 먼저 챙겨 주기 위해서였다. 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볶음밥을 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솔아, 이리 와.”

이현이 김솔을 이끌어 의자에 앉도록 도왔다. 유아용 의자가 없어서 김솔은 식탁 위로 코 윗부분만 보였다.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불편한 자세였다.

“이거요.”

김민지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가져왔다. 쿠션의 도움으로 김솔이 편안하게 식사하는 동안 진표성이 김치찌개도 완성했다.

“팀장은 어디 간 거야. 일단 두 사람 먹고 있어. 한 놈은 저기 오네.”

음식 냄새를 맡은 신민우도 식탁에 와서 앉았다. 진표성이 강준 몫의 식사를 챙겨 방으로 향했다. 강준은 방 하나에 감금된 상태였다.

“풀어 달라고요……. 나 이제 진짜 멀쩡하다니까…….”

강준은 며칠 새에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퀭한 눈두덩이가 검은색 섀도를 바른 것처럼 진했다. 진표성이 강준의 상태를 관찰하면서 그의 앞에 식사가 올려진 쟁반을 내려놨다.

“밥 먹어.”

강준의 눈동자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볶음밥과 찌개를 향해 굴러갔다. 오랜 시간 굶주린 사람이라면 입맛을 다실만한데 그의 눈빛은 무감하기만 했다.

음식에 닿아 있던 시선이 진표성의 손에 가 닿았다.

“피 났어요……?”

늘어지는 목소리 끝에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음식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피는 거의 멎었지만 상처 부위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진표성이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번들거리는 시선도 따라붙었다.

“저…… 한 번만 핥아 보면 안 돼요……?”

강준이 초조하게 제 입술을 핥았다. 진표성이 가장자리부터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는 강준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하프 좀비일 때는 한쪽 눈동자만 회색빛으로 물든 상태다. 그런데 지금 강준의 눈동자는 양쪽이 다 회색빛 구름에 가려지는 것처럼 뿌예졌다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피 마시고 싶어? 피 보니까 살도 씹어 먹고 싶고 그래?”

다른 종의 출현이었다. 이현이 가이딩한 일반 좀비나 좀비 몬스터들은 사체로 돌아갔다. 그런데 하프 좀비는 사람처럼 돌아왔다가 가끔씩 일반 좀비의 특성을 보였다.

일반 좀비와 다른 점은 이성을 계속 유지한다는 거였다. 본능이 강해지는 것 같지만 사람의 말을 한다는 게 큰 차이점이었다.

“네……. 한 번만…… 한 방울이라도 좋으니까……!”

강준의 두 눈동자가 완전히 회색빛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강준이 진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