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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49화 (49/133)

049.

“저도 방 하나 좀…….”

김솔도 이현의 다리에 달라붙어 한수호를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더욱 고된 일정이었다. 이현과 같이 푹신한 침대에서 푹 자면 소원이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이쪽으로 와요.”

한수호가 웃음을 참고 이현과 김솔을 더욱 안쪽에 있는 문으로 이끌었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공간에 이현과 김솔의 눈이 쌍둥이처럼 동그래졌다.

“안에 욕실도 있는 방이니까 더 지내기 편할 거예요.”

특혜였다. 잠시 김민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현은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이현이 한수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솔도 이현의 뒤를 아기 오리처럼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솔아, 여기 진짜 좋다. 그치?”

“네에. 엄청 좋아요.”

김솔이 양 볼이 봉긋 솟아오르도록 활짝 웃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평소보다 거친 동작으로 쓰다듬은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도 살펴봤다.

객관적으로 넓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성인 남자 한 명은 너끈히 들어갈 만한 욕조가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배스 밤도 있어…….”

욕조에는 먼지가 옅게 쌓여 있었다. 샴푸와 린스, 보디 워시에 배스 밤까지. 이현이 감격에 젖어 욕조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우리 여기에서 같이 씻어요, 아저씨.”

김솔이 이현의 손을 잡고 살랑살랑 앞뒤로 흔들었다. 목욕 시간은 김솔이 가장 좋아하던 시간 중 하나였다. 엄마가 죽은 이후로는 갖지 못했으나 현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현과 목욕할 생각을 하니 발을 동동거릴 정도로 신이 났다.

“그럴까?”

이현이 수전을 돌려 봤다. 차가운 물이 흘러나오다가 이내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녹아내릴 듯한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우와…….”

마시는 물도 아끼다가 콸콸 쏟아지는 물을 마주하자 신기한 모양이었다. 김솔이 욕조의 턱에 가슴을 붙이고 손을 뻗어 차오르는 물을 손으로 휘저었다.

“솔아, 잠시만.”

이현이 욕조의 마개를 열었다. 욕조에 묻어 있던 먼지들을 쓸어 흘려보낸 후에 다시 닫았다.

“어떤 색이 좋아?”

“으음……. 하늘색이요.”

배스 밤은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김솔이 고른 배스 밤이 욕조 안에 툭 던져졌다. 이현이 샤워기를 들어 물줄기를 배스 밤 위로 흩뿌렸다.

“너무 예뻐요…….”

“옷 벗고 들어갈까?”

“네에.”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이현이 손으로 온도를 확인한 후에 김솔을 먼저 욕조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먼지와 땀에 찌든 옷을 벗고는 욕조 안에 들어가 앉았다.

“하아…….”

나른하게 퍼지는 감각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현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느른한 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가이드, 아직도 방 구경 안 끝난…….”

“…….”

욕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진표성이 등장했다. 이현이 놀란 눈으로 진표성을 올려다봤다. 한수호도 방을 알려 주고 바로 나갔기에 누군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한 건 진표성도 마찬가지였다. 떨리는 시선이 평소보다도 발그레한 이현의 얼굴을 지나 가느다란 목선 아래까지 이어졌다.

욕조의 물은 아직 이현의 배꼽 언저리까지만 차오른 상태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가 고스란히 진표성에게도 보였다.

보글보글 거품이 솟아올라 하반신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진표성은 색소가 옅은 상체를 본 것만으로도 굳어 버렸다. 한군데에 못 박힌 시선이 도통 떨어질 줄 몰랐다.

“얼른 나가요……!”

“아, 미안…….”

진표성이 정신을 차린 건 김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현의 앞을 가리고 소리친 직후였다. 김솔은 양팔을 활짝 벌린 상태로 이현의 상체를 가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제야 이현도 정신을 차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몸을 거품 속에 푸욱 담갔다. 진표성이 삐걱거리는 발걸음으로 나간 후에도 한동안 욕실에는 김솔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으응……. 괘, 괜찮아…….”

아이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 사실 남자 간에 알몸을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서는 동성 간에도 성적인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터라 조금 더 조심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이현이 자신처럼 놀란 김솔의 뺨을 쓰다듬었다. 김솔은 이후로도 이현이 괜찮은지 살피기 바빴다. 어른과 아이의 위치가 뒤바뀐 듯한 상황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현이 제 볼을 짝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김솔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현을 부를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손끝 쪼글쪼글해졌다. 얼른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이며 이현이 먼저 욕조에서 일어났다. 욕실 안에는 수건도 있었다. 제 몸은 대충 닦고 가운도 하나 꺼내 입었다. 김솔도 일으켜 자신과 달리 꼼꼼히 물기를 닦아 줬다.

“솔아, 조금 크기는 해도 이거 입고 있을까? 아무래도 옷을 빨아야 할 것 같아서.”

“네에.”

김솔이 얌전히 이현이 입혀 주는 가운에 팔을 끼워 넣었다. 이현이 소매를 돌돌 말아 봤지만 김솔의 팔이 가운의 반 정도 올까 말까 한 터라 큰 소용은 없었다.

게다가 발아래 질질 끌리는 건 접는 것도 힘들었다. 이현이 김솔을 침대 위에 앉히고 욕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 들었다.

옷을 들고 방을 나서기 전에 가운을 꼼꼼하게 여몄다. 진표성이 욕실에 들이닥쳤을 때에는 가릴 겨를도 없었다. 또 한 번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선 안 되기에 허리끈도 꽉 조여 맬 때였다.

“김이현 가이드.”

이번에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려서 큰 의미는 없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을 것 같아서요.”

한수호의 손에는 이현이 입을 만한 옷과 아이 옷까지 있었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물기에 젖어 촉촉한 머리카락과 살결을 보는 눈빛이 한차례 떨렸다.

“감사합니다…….”

이현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진표성이 욕실에 들어왔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때보다 부끄러운 기분이 더 강하게 들었다.

훨씬 가리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도 그랬다. 이현이 떨리는 손을 뻗어 옷을 받아 들었다. 이제 한수호가 나가기를 기다리는데 그는 움직일 생각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실내에서 한수호의 눈동자는 이현만큼 새까맣게 보였다.

이 세상에 자신만 존재하는 것처럼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이현도 숨소리를 죽여 나갔다. 숨 쉬는 것마저 의식될 만큼 둘 사이의 공기가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한수호 에스퍼……?”

“……갈아입고 나와요.”

마법에 걸려 있다 풀린 사람처럼 한수호가 방을 나섰다. 들어올 때와 달리 문 닫히는 소리가 컸다. 이현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김솔에게 다가갔다.

“솔아, 이거 입자. 많이 춥지?”

김솔에게 말을 걸면서도 이현의 정신은 딴 데 가 있었다. 김솔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했다. 환청이 들리던 때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감각이 이현을 잠식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거 위에 입는 건데…….”

“……미안.”

이현이 헛숨을 들이켜며 사과했다. 김솔이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으나 방금 제가 한 짓에 낯이 뜨거워졌다. 아이에게 속옷을 입힌 후 바지에 다리를 하나씩 넣던 중이었다.

그런데 김솔의 말을 듣고 나니 정말 제가 티셔츠의 팔 부분에 아이의 다리를 욱여넣고 있었다.

욕조에 이어 한수호와 부딪친 게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이현이 김솔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서둘러 옷을 제대로 입혀 줬다.

아이의 옷을 다 입히고 난 후 제 옷도 입었다. 보송보송한 옷을 입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당황했던 감정도 순간 잊을 만큼 미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많이 배고프지?”

때마침 김솔의 배에서 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김솔의 볼이 붉어졌다. 이현의 다정한 물음에 김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현이 김솔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김솔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이현이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소파에 김솔을 앉힌 이현이 부엌으로 향했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요리할 줄 알아?”

“자취한 생활이 길어서 웬만한 건 할 수 있어요.”

진표성이 앞치마를 맨 상태로 부엌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이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진표성이 이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걸었다.

항상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빤히 보던 사람이 지금은 부자연스럽다고 느낄 만큼 이현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도마 위에서 썰리고 있는 햄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이현이 진표성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진표성이 어깨를 움찔 떨며 반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이현의 한쪽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손을 씻기 위해 개수대로 향했다. 그러면서 진표성과 어깨가 맞닿을 만한 간격까지 다가갔다.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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