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팀장.”
한수호도 이미 강준에게 일어난 이변을 눈치채고 있었다. 김민지와 달리 김솔은 눈을 감고서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가도 실눈을 뜨고 이현의 안색을 살피거나 조그마한 손을 뻗어 이현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한수호는 그런 김솔의 곁에 앉아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던 아이는 금세 한수호의 손길에 적응했다.
느릿하게 깜박이던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면서 한수호가 강준이 일으킨 소란에 대해 언급했다.
“위험한 상황 오면 망설이지 말고 죽여.”
한수호의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동고동락했던 김종현도 그가 배신한 이후에는 인정사정없이 반 죽여 놓은 한수호였다.
강준에게 연민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진표성은 어느 때보다 이번 임무를 통해서 한수호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한수호는 배부른 맹수처럼 굴었었다.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누군가 시비를 걸어도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이현을 만난 이후부터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띠더니 잔인함마저 배가됐다. 원래 잔인한 성격인 건지, 이현을 지키기 위해 본능대로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럴 거야.”
하지만 진표성은 지금의 한수호가 더 마음에 들었다. 자그마한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매한 동정심은 소중한 이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었다.
진표성이 어느새 전투식량을 다 먹고 침낭 속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가는 강준을 흘낏 살폈다. 그의 눈동자 또한 한수호 못지않게 차가운 건 마찬가지였다.
* * *
“…….”
이현이 눈을 뜬 상태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깊은 잠을 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기억나지 않는 어딘가를 유령처럼 배회한 기분도 들었다.
온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느껴진 건 가슴께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였다. 아이 특유의 내음도 났다.
이현이 김솔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차렷 자세로 따스한 무언가에 감싸여 있어 손이 들리지 않았다.
“일어났습니까. 몸은 좀 어때요?”
달라진 이현의 숨소리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한수호였다. 한수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진표성이 자신이 불침번을 설 테니 한수호에게는 자라고 했지만, 한수호는 그럴 수 없었다.
복잡한 상황들을 하나씩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두어 번 권유하던 진표성도 한수호가 거듭 거절하자 잘됐다며 침낭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목이…… 말라요.”
이현이 심한 갈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이 들 만큼 목이 말랐다.
“잠시만요.”
한수호가 물병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현에게 물을 먹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현재 이현은 누워 있는 상태였고 김솔이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였다.
이현도 그걸 알았는지 한수호에게 물을 달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아저씨?”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처럼 김솔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아이가 이현의 얼굴부터 바라봤다.
“이제 괜찮아요?”
“……응.”
김솔이 고사리손을 뻗어 이현의 이마를 짚었다. 다른 손으로는 제 이마를 짚는 행동에 이현이 자그맣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현이 김솔을 만난 건 천운일지도 모른다. 이현은 김솔 덕분에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기절하지 않고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지금도 잠시 힘든 상황을 잊을 만큼 미소를 띨 수 있어 감사했다.
“일어나는 거 도와줄게요.”
한수호가 이현을 부축한 상태로 침낭의 지퍼를 내렸다. 김솔이 꼬물거리며 이현의 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앉아서도 김솔은 이현의 곁에 붙어 앉았다.
“솔이도 물 마실래? 목마르지?”
“아저씨 먼저요.”
아이의 눈동자가 허옇게 부르튼 이현의 입술에 닿았다. 이현은 호되게 앓은 흔적이 얼굴에 역력했다. 원래도 마른 사람이 지금은 턱선이 손을 대면 베일 듯했다.
한수호가 이현에게 물병을 건넸다. 이현이 김솔의 머리카락을 스치듯이 쓰다듬고는 먼저 목을 축였다.
“이제 솔이도 마시자.”
“네에.”
김솔도 목이 말랐는지 이현이 먹여 주는 물을 거절하지 않았다. 꼴딱꼴딱 맛있게도 물을 마시는 김솔을 보며 이현이 희미하게 미소 지을 때였다.
“거기에 계속 있으라고요!”
“나 지금은 멀쩡하다니까? 아까부터 왜 자꾸 사람을 괴물 취급하냐고. 기분 더럽게.”
“기억 못한 채로 저지르면 그게 없었던 일이 돼요? 저는 지금도 손가락이 욱신거린다고요!”
“야. 내가 물었냐? 잇자국도 없잖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현의 기억에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지만. 잠에서 깨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어제의 일도 모두 한참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이거 같이 먹고 있어요. 소란은 신경 쓰지 말고요.”
한수호가 죽 하나와 빵 두 개를 꺼냈다. 어느새 김민지도 잠에서 깨 침낭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도 한 병 더 꺼내 놓고 나서야 한수호가 강준과 신민우를 향해 걸어갔다.
“둘 다 조용히 해. 그냥 사이좋게 좀비 밥 될래?”
진표성이 먼저 두 사람 사이에 다가가 싸움을 중재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자꾸 줄을 풀려고 하잖아요……. 무섭게.”
신민우가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강준을 죽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득 차올랐다.
“밤새 아무런 일도 없었잖아. 이제 풀어 줘도 되지 않아요?”
억울한 건 강준도 마찬가지였다. 강준이 손목을 들어 보였다. 입마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지를 결박한 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묶어 놓은 것까지는 이해했다. 자신도 밤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선잠만 자느라 피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이동해야 하니까 손목이랑 팔목에 채운 건 풀어 줄 거야. 대신 입마개는 계속하고 있어야 돼.”
“그럼 밥은……!”
“내가 보는 앞에서 먹어. 밥 먹을 때는 풀어 줄 테니까.”
“……알았어요.”
강준이 한발 물러났다. 더 고집을 부려 봐야 제게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들과 같이 다니지 못하면 어차피 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좀비들에게 물어뜯길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기적이 일어나 하프 좀비로 변이되면 좋겠지만 기적이 연달아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간단하게 먹어.”
진표성이 빵을 꺼내 두 사람에게 나눠 줬다. 공간 확장형 아티팩트 안에 넣어 두면 음식의 부패도 실온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빵은 전투식량보다 훨씬 유통기한이 짧았다. 하루 세끼 중에 한두 끼 정도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걸로 해치우는 게 나았다.
“물은 안 줘요?”
빵을 받아 들고 신민우가 마실 것도 요구했다. 진표성이 한숨을 깊게 내쉬며 물도 두 병을 꺼냈다.
“물은 하루에 한 병이니까 들고 다니면서 아껴 마셔. 잃어버려도 추가로 안 줄 거야.”
“……치사하게.”
“말할 거면 차라리 크게 말해. 작게 말해도 다 들려.”
“…….”
속삭이듯이 말한 건데 눈앞의 사람이 에스퍼라는 걸 순간 잊었다. 이후 신민우는 빵 하나를 최대한 아껴 먹었다. 그러다 강준의 존재를 떠올리고 두려운 눈길로 그를 흘낏거렸다.
“오늘은 어제처럼 배가 안 고픈가 보네.”
“어제만 그랬던 거라니까요.”
강준은 어제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울상 짓지도 않았고, 아귀처럼 음식을 허겁지겁 먹지도 않았다.
지금도 오히려 신민우보다 여유롭게 빵을 먹고 있었다. 진표성이 자신도 물을 한 병 꺼내 목을 축이며 그런 강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다.
진표성의 곁에 다가온 한수호의 시선도 그 못지않았다. 강준도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빵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이거야 원. 동물원 안의 동물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부드럽게 넘어가던 빵이 목에 걸린 듯해 급하게 물을 마시다 사레들렸다.
“콜록, 콜록…….”
아직 입 안에 남아 있던 빵이 기침을 하는 바람에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순간적으로 빵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기세로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쿨럭…….”
누군가 가슴속에 손을 집어넣어 심장을 터트릴 기세로 움켜쥐는 감각이 느껴졌다. 끔찍한 감각이었다. 기침이 격해지자 목 안쪽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피 맛을 인식한 순간 강준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갔다. 강준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제 피인데도 방금 전에 먹었던 빵보다 훨씬 더 달콤한 맛이 났다.
참기 힘든 갈증이 치밀었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고 싶은 게 당연할 텐데 사라진 피의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