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한수호가 이불을 끌어와 이현과 김솔의 위에 덮었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은 김솔이 조금 더 편하게 이현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부팀장한테서는 아직도 연락 없어?”
“……응.”
임태한의 능력이라면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헤쳐 나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직 두 무리로 나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다만 흘러가는 상황이 묘했다. 하프 좀비들에게 본부가 완전히 장악당한 상황이라면 아무리 임태한과 팀원들이라도 위험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우리도 본부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진표성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의견을 냈다.
“다른 팀원들이랑 합류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서 그래. 가이드 말고도 생존자가 여러 명 있고.”
한수호가 깊게 잠든 이현의 이목구비를 눈길로 덧그리듯 살폈다.
“위험해. 가이드 능력에 관한 소식이 하프 좀비들에게 퍼졌다면. 일단은 상황을 좀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아.”
잠시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진표성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당시의 기억은 다시 떠올려도 등골에 소름이 일 정도로 놀라웠다. 말캉한 감촉에 눌렸지만 이현의 능력은 분명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좀비들의 능력을…… 원래대로 돌리는 거겠지?”
“아마도.”
하프 좀비들은 능력을 잃고 일반인으로 돌아왔고, 일반 좀비와 좀비 몬스터들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사체가 됐다.
서동연이 이현을 피해 도망갔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이현에게 보였던 집착을 생각한다면 근시일 내에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본거지는?”
“인천 쪽 같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인천이라…….”
한수호가 하프 좀비들에 관한 정보를 되짚어 봤다. 서동연과 이현이 처음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에는 집중적으로 서동연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뒤졌다.
한수호의 정보 열람 등급으로도 접근하지 못한 정보가 있었다. 그때는 상부의 의심을 살까 봐 깊게 파고들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후회가 됐다.
“거의 맞을 것 같군.”
그래도 서동연이 이동하는 주 경로지에 대한 정보는 찾아서 살펴봤다. 이번에 알파 1팀이 잠입하기로 한 하프 좀비 본거지들의 위치 다음으로 서동연과 그의 측근이 가장 많이 들른 곳이 인천이었다.
진표성이 살려 둔 하프 좀비에게서 얻은 정보 또한 인천이라면 정보의 신뢰성은 높아진다.
한수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협회 내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확실하게 제 편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한동안 버틸 수는 있어.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진표성이 찾아온 물건들을 꺼내 보였다. 다양한 등급의 회복 포션부터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료품에, 침낭까지 다양했다.
아티팩트의 수도 적지 않았다. 공격용 아티팩트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
누구를 위해 챙겨 온 건지 모르기도 힘들었다. 에스퍼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물건들이 대다수였다. 한수호는 한 번도 진표성과 연적 관계에 놓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현에 대한 서로의 감정을 자각했어도 한수호는 여전히 진표성을 믿을 수 있다. 그건 진표성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너도 좀 쉬어.”
“사돈 남 말은. 팀장, 가이드 납치된 후로 제대로 잔 시간 다 합쳐도 열 시간도 안 될 텐데.”
한수호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이현을 향해 있었다. 진표성은 쉬게 하고 자신이 불침번을 설 겸 이현의 상태를 계속해서 살필 생각이었다.
약을 먹였다고는 해도 이현의 얼굴은 아직도 붉었다. 이현이 사용한 능력이 비밀스러운 것처럼 그 능력이 이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앓아누운 걸 보면 신체에 무리가 가는 게 분명했다. 다만 이현이 좀비들에게 사용한 능력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라는 점도 원인으로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이현의 수척해진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 한쪽이 욱신거렸다. 언제든지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인데 안일하게 있던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멱살을 쥐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먼저 불침번 설 테니까 팀장은 쉬…….”
진표성이 말하다 말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바깥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 * *
“짜증 나네, 진짜.”
최철희가 닫힌 문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한눈에 봐도 자신을 귀찮아하는 게 역력한 에스퍼들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오랫동안 감지 못해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뭉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룸 안에 있는 물병을 찾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 안에서 물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샴푸와 린스, 보디 워시 같은 청결 제품은 있었다.
머리를 대충 적시고 샴푸를 한가득 짜 정수리에 대고 비볐다. 생각보다 거품이 잘 나지 않자 인상은 더욱 구겨졌다.
“이제 별게 다 문제네.”
먼지로 뒤엉킨 머리카락 때문인 건지, 아니면 싸구려 샴푸 때문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거품조차 제 뜻대로 나지 않아 짜증이 확 치솟았을 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피에 아릿한 통증이 일 정도로 손끝을 세워 벅벅 긁어댔다. 쌓였던 이물질들이 손톱 사이에 끼는 느낌이 불쾌했다.
샴푸 통 하나를 다 비울 작정으로 머리카락 위에 샴푸를 더 짜냈다. 양으로 밀어붙이자 머리카락은 곧 하얀 거품으로 뒤덮였다.
그러다 묘한 감각이 들었다. 각질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상쾌한 기분이 드는데 몸 안쪽에서는 열기가 들끓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의 온도가 조금씩 상승하면 이런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몸살이라도 난 건가…….”
사실 아픈 건 익숙했다. 건강 체질인데도 혹독한 생활이 이어지자 밤새 끙끙 앓기 일쑤였다.
하프 좀비들이 언제 자신을 좀비들 밥으로 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심지어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했으니 몸이 축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서느런 손가락으로 척추뼈를 스르륵 훑어 올리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아, 따가워.”
머리를 뒤덮은 거품이 팔목을 타고 흘러내린 건 그때였다. 옷 속에까지 들어간 건지 팔에서 따끔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팔을 살펴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거품이 눈에도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은 채 손을 휘적거려 물병을 손에 들었다.
“하나 더 가지고 들어올걸.”
아무 생각 없이 물병 하나만 들고 들어왔다. 급한 대로 정수리에 물을 조금씩 끼얹어 거품을 거둬 낸 후 손에 물을 덜어 눈을 닦아 냈다.
잠시 동안 거품에 혹사한 눈이 새빨갰다. 한 병을 다 비웠지만 여전히 머리카락에는 거품이 한가득했다.
거품이 이제는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상체가 온통 미끈거렸다.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졌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남아 있는 물병을 가지러 갈 때였다.
“어……?”
시야가 핑 돌았다. 어지럽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몸은 바닥에 처박힌 후였다. 끔벅끔벅 눈을 깜박일 때마다 시야가 탁하게 흐려져 갔다.
불길한 예감이 이제는 아가리를 벌리고 코앞까지 당도한 것만 같았다.
“설마…….”
최철희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팔을 감싸고 있는 옷을 걷어 올렸다. 불그스름한 잇자국에 입술이 하얗게 질려 갔다.
물린 자국은 희미했다. 그렇기에 언제 물렸는지도 모르고 지나간 모양이다. 사실 최철희는 생존자들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진 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야만 했다. 에스퍼들을 만나 생명이 연장됐어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씻을 생각이 든 것도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됐다는 걸 알아 안심해서였다.
“씨이발……. 나 진짜 살고 싶다고…….”
누군가 눈 안에 이물질을 넣은 것처럼 시력이 실시간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눈시울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저질렀던 짓들이 머릿속에 난무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기어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독한 고통에 잘못 씹은 혀에서도 피가 나 입가도 온통 피범벅이 되어 갔다.
최철희의 변이는 오랜 시간 천천히 이루어졌다. 척추뼈가 하나하나 바깥을 향해 틀어졌다. 힘을 너무 준 목은 턱과 목의 경계선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는 눈동자는 눈에 고인 피 때문에 새빨갛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손가락이 반대 방향으로 휘어지도록 최철훈이 바닥에 손을 짚은 채 힘을 줬다.
관절이 비틀리는 고통은 체액이 끓어오르는 감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허리가 뒤를 향해 30도 가까이 꺾였을 때 모든 움직임이 뚝 멎었다.
붉게 물든 눈동자가 양쪽 눈 안에서 다른 방향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쿵.
손가락에 튕겨진 구슬처럼 굴러가던 눈동자가 한 방향을 향해 휙 움직였다.
“야, 너 뭐 하냐? 딸이라도 치냐? 왜 이렇게 시끄러워.”
벽을 사이에 두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최철희의 입이 기이할 정도로 광대를 향해 쭈욱 찢어졌다. 최철희가 네발짐승처럼 손과 발로 바닥을 짚으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우다다다 움직였다.
쿵.
최철희가 머리를 벽에 찧어 둔탁한 소리를 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하얀 거품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