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저 좀 먼저 저쪽으로 보내 주세요!”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는 벽을 보는 강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처음부터 힘이 없었다면 모를까. 강자였다가 약자의 위치로 내려오자 살고자 하는 본능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강준은 진표성에게 달려가다가 중간에 낙오되고 말았다. 다리 힘이 풀려 넘어진 거였다. 생존자들은 강준을 도와주는 대신 그를 지나쳐 갔다.
“크르르르…….”
“키에엑―!”
“크이이이익!”
기기괴괴한 소리들이 빠르게 공간 안에 퍼져 나갔다. 결국 벽 일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만들어진 틈새는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안으로 악귀같이 일그러진 형상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좀비들은 서로가 밀쳐 내는 손길에 썩어 가는 몸뚱이가 뭉그러져도 인간들을 향해 이를 딱딱거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희번덕거리는 회색 눈알이 불을 쫓는 부나방처럼 생존자들에게 달라붙었다.
“흐으…….”
“솔아, 아저씨 여기 있어. 괜찮아, 괜찮아.”
좀비들의 괴성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짙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원초적인 살기에 김솔이 정신을 차렸다.
이현이 김솔을 품에 안아 얼렀다. 이현을 내려다본 한수호가 발걸음을 서둘렀다.
김민지를 비롯한 생존자들도 한수호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어, 어어……?”
걸음을 옮기면서도 벽이 무너져 내리는 방향을 연신 힐끔거리던 생존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다 눈 감고 있어요.”
한수호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진표성도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사다리가 건너편 건물에 제대로 안착한 걸 확인하자마자 김민지를 향해 달려왔다.
“허리 좀 잡는다.”
“……네.”
진표성이 김민지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 상황에서 김민지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시야가 휙 바뀌었다.
“억…….”
짐짝처럼 진표성의 옆구리에 끼워졌다. 머리가 앞쪽으로 쏠리면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강하게 조여 오는 허리 쪽에서 통증이 일었다.
“한 사람은 내 등 뒤에 매달리고, 한 명은 얘처럼 옆구리에 끼여 있어야 해.”
진표성이 남은 생존자 두 명에게 선택권을 줬다. 남자 두 명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 쪽이 더 나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크햐악―!”
좀비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일반 좀비가 휘두르는 팔에 상체가 닿을 뻔한 생존자가 먼저 진표성의 등에 달라붙었다.
“얼른. 3초 안에 결정 못 하면 그냥 두고 갈 거야.”
“제, 제가 매달릴게요!”
“이쪽으로 와.”
진표성이 나머지 생존자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생존자가 별수 없이 진표성에게 다가간 순간 그의 시야도 김민지처럼 순식간에 바닥을 향하게 됐다.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눈알 하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같이 잡혀 있던 사람의 것인지, 아니면 일반 좀비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핏물에 지독할 정도로 절여져 있어 눈동자의 색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우윽…….”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내리누르며 눈을 감았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놀이 기구를 타는 것처럼 몸이 어디론가 홱 끌려갔다.
시야가 휙휙 바뀌었다. 진표성이 벽을 타고 창턱에 올라갔을 때는 혀를 잘못 씹어서 입 안에 비린 맛까지 났다.
“캬악! 캭!”
“키야악……!”
진표성이 창턱 위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좀비 무리 중 다리가 멀쩡한 것들이 바로 아래까지 따라붙었다.
동족의 아우성에 건물 바깥에 있는 놈들도 먹잇감의 존재를 인식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한수호가 이현과 김솔을 데리고 건너편 건물 위에 무사히 올라갔다는 거다.
원래 몸 상태였다면 가볍게 움직였겠지만 문제는 현재 진표성이 몸에 매달고 있는 사람이 세 명이나 된다는 거였다.
철근으로 사다리를 최대한 튼튼하게 만들기는 했다. 다만 자신까지 포함해서 네 명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얼른! 얼른 움직여요……! 제발……!”
진표성이 고민에 빠진 사이 아래에 우글우글 모인 좀비들이 서로의 몸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진표성의 옆구리에 매달린 상태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좀비들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생존자가 울부짖었다.
좀비 몬스터와 일반 좀비의 눈 모양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희뿌옜다.
“캬하악……!”
일반 좀비 하나가 팔을 뻗었다. 좀비가 되기 전에 물어뜯긴 건지 손가락 한두 마디가 사라진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뒤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얇은 면바지만 입고 있는 터라 한 겹의 천 위로 끈적한 진액이 묻는 듯했다.
“으흑, 저리 가……!”
남자가 발을 뒤로 뻗어 자꾸만 다가오려는 일반 좀비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마구잡이로 차는 발길질에 일반 좀비의 얼굴이 툭툭 부딪쳤다.
문드러지는 잇몸에 간신히 붙어 있던 앞니가 질질 흐르는 침과 함께 입가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진표성이 한 발을 내밀어 사다리를 건드렸다. 끼이익, 불길한 소리가 발끝을 타고 울려 퍼졌다.
“안 되겠다. 일단 두 명은 여기 붙잡고 서 있어 봐. 얘 먼저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최대한 빨리 사다리 위에 발을 딛고 움직인다고 해도 건물 사이의 거리가 5미터 이상이다. 바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진표성의 현재 몸 상태로는 요원한 일이었다.
넘어갈 수야 있었다. 하지만 이 무게로는 사다리의 중간 지점을 밟자마자 사다리가 끊어질 게 뻔했다. 다시 도약하려면 어디든 발 디딜 데가 있어야 하는데 좀비들의 머리통을 밟았다가 생존자들이 물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긴박한 상황이기는 해도 한 명씩 빠르게 이동시키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인 듯했다.
“저 먼저 가게 해 주세요!”
죽음의 위기 앞에서 사람은 이기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진표성은 여자이고, 가장 어린 김민지를 먼저 구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남은 두 명의 생존자가 진표성의 선택에 동의할 리 없었다. 한 명이 먼저 진표성에게 따지고 들자 다른 이도 진표성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으윽, 야, 힘 좀 풀어.”
“그냥 다 같이 갑시다. 당신, 에스퍼잖아요. 에스퍼는 민간인을 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잖아요……!”
발갛게 충혈된 채로 진표성을 바라보는 눈에 독기가 어렸다. 김민지만이 침묵한 채로 얌전히 진표성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녀 또한 지금 상황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자신까지 날뛰었다가는 더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으아아악! 사, 살려 줘……!”
“후우…….”
진표성이 앞머리가 휘날리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깜박 잊고 있던 강준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용케 잔해 더미가 쌓인 곳에 기어 올라가 근처로 접근한 좀비들을 쇠막대기 하나를 주워서 밀어 내는 몸짓이 필사적이었다.
그가 내지른 고함 소리에 고개를 휙휙 돌려 대던 좀비들도 그쪽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당장이라도 강준 정도는 뒤덮을 만한 무리가 바글바글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얼른! 지금 가만히 서서 뭐 해요?”
“빨리 좀 움직여요!”
강준의 상황을 지켜보던 생존자 두 명이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진표성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눈빛마저 좀비들 못지않게 흉포해졌으나 생존자들은 이미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래. 지금 바로 보내 줄게.”
진표성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생존자의 바지춤을 잡았다.
“으어어……?”
옆구리에 매달려 있을 때도 불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투둑, 툭, 허리 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하프 좀비들에게 잡혀 왔을 때 입고 있던 옷으로만 생활했다. 빨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물 묻은 옷은 금방 해졌다.
옷의 이음새가 뜯어지는 소리에 극도의 두려움과 흥분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희게 질려 갔다.
“지금 뭐 하시는……?”
“빨리 보내 달라며. 이 악물어라.”
“우아아악!”
진표성이 생존자를 건너편 옥상으로 던져 버렸다. 왜 멍청하게 다 같이 데리고 넘어갈 생각을 했을까. 어디 하나 부러지더라도 일단 안전한 장소로 보내면 그만인 것을.
건너편 바닥에 떨어진 생존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미 건너가서 다친 김솔을 이현과 함께 살피고 있던 한수호가 그림자를 움직여 생존자가 받을 충격을 완화해 줬다.
그러지 않았다면 머리부터 떨어진 생존자는 먼지가 가득한 바닥을 제 몸에서 나온 피로 적셨을 게 분명하다.
“너도 이리 와.”
“자, 잠깐……!”
진표성이 이어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생존자도 옆으로 끌어 내렸다. 방금 일어난 일에 충격에 빠진 생존자가 몸을 덜덜 떨었다.
“좀비한테 물어뜯겨 죽을래, 아니면 어디 하나 부러지더라도 살아 남을래?”
검은색 워커 아래에서 기어코 창턱 가까이 기어 온 일반 좀비의 머리통 하나가 으깨졌다. 생존자는 그제야 눈앞의 남자가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라는 걸 다시금 자각했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에스퍼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안전하게 부탁드립니다.”
생존자는 강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스타일이었다. 그가 버둥거리던 걸 멈추고 순순히 진표성의 결정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