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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34화 (34/133)

034.

“야.”

가볍게 무언가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함께 몸을 내리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얼굴부터 상체까지 뜨끈한 액으로 뒤덮였다.

사나운 목소리에 강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제 목을 물어뜯으려 했던 일반 좀비가 목 없는 사체가 되어 있었다.

역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무너져 내리는 좀비의 몸뚱이를 가볍게 치워 낸 이는 강준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너밖에 살아남은 놈이 없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지, 안 그래?”

에스퍼들 중 은빛 머리를 한 남자였다. 자신이 사용하던 도끼의 날보다 더욱 날카로운 손톱을 타고 검은색에 가까운 피가 뚜욱, 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서로 죽이기 위해 다투던 상대였다. 그런 이에게 목숨이 구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자신을 훑어 내리는 눈초리가 목 없는 사체가 된 좀비 못지않게 흉포했다.

“흐윽…….”

“뭐야? 질질 짜는 거야?”

그런데 눈치 없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한번 터진 눈물은 이를 악물어도 멎기는커녕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얼굴에 쏟아졌던 좀비의 피가 입 안에 스며들어 역한 맛이 났다. 실없이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감각도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거였다.

“우윽, 흑…….”

“이 새끼도 미친놈인가.”

진표성이 강준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프 좀비들 중 제정신인 놈이 없다더니. 눈앞의 놈도 마찬가지였다.

안에 들어온 좀비들을 하나씩 해치우다 눈에 들어온 게 강준이었다.

서동연이 도망간 상황이라 하프 좀비였던 이들 중 하나는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상대했을 때 S급 에스퍼에 근접하는 힘을 냈던 놈이다.

놈에게 당한 등의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능력이 강하다면 그만큼 무리 안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계속 질질 짜면 그냥 좀비 밥으로 던져 줄 거니까.”

“후윽…….”

하프 좀비였던 놈에게 잘해 줄 필요는 없었다. 진표성의 차가운 말에 강준이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울음을 억눌렀다.

덩치도 큰 놈이 끅끅대는 모습은 불쌍해 보이는 게 아니라 추잡했다.

“따라와.”

“네…….”

강준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진표성을 뒤따라갔다. 어차피 이곳에 혼자 남아 있어 봐야 좀비에게 잡아먹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능력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고작 일반 좀비 한 마리와 대치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능력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품었던 독기마저 증발해 버린 기분이었다.

“저 사람은…….”

이현이 다가오는 강준을 힐끔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이현의 불안을 눈치챈 진표성이 강준의 뒤통수를 뻑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어억…….”

강준이 바닥에 엎어졌다. 안 그래도 다리에 힘이 없는 상황에서 혹이 생길 정도로 강한 타격이 뒤통수에 가해지자 버틸 힘이 없었다.

팔도 부딪친 탓에 어깨에서 끔찍한 통증까지 일었다. 강준은 반사적으로 진표성을 흘겨볼 뻔하던 시선을 애써 바닥에 고정했다.

“걱정하지 마. 능력도 못 쓰고, 이제는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으니까. 오히려 제 안위부터 걱정해야 할걸.”

진표성이 생존자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쇠기둥 위에 있던 이들 중 살아남은 건 이현과 김솔, 김민지를 포함한 다섯 명뿐이었다.

강준을 바라보는 생존자들의 눈초리가 살벌했다. 자신들을 틈만 나면 괴롭혔던 강준의 얼굴이 낯익어서였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강준이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놀라 슬그머니 진표성의 뒤쪽으로 다가와 섰다. 하지만 진표성은 강준의 의도를 알고는 순식간에 한수호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진표성, 탈출할 준비 해.”

“두 명이서 하려니까 진짜 쉴 틈이 없고만.”

한수호가 바깥의 동향을 살피며 진표성에게 지시를 내렸다. 진표성은 툴툴거리면서도 한수호를 도와 탈출로를 만들었다.

“가이드랑 솔이만 있으면 한 명씩 안고 가면 되는데. 생존자가 세 명에 저 새끼까지 총 네 명이라. 이거 골치 아프네.”

안에 들어온 좀비들은 다 처리했지만 여전히 주변은 쉽게 볼 수 없는 수의 좀비들이 배회하는 중이었다.

폭탄을 터트려 하프 좀비들의 이목을 분산하고 근처에 있던 좀비들을 다수 처리한 건 좋았다. 다만 폭발음이 근방에 있던 좀비들을 불러 모았다는 게 문제다.

당시에는 이현과 김솔을 구할 생각만 했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거 가능할까?”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두 사람은 현재 옆 건물의 옥상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이현이 갇혀 있던 장소는 창고로 4층 정도의 높이였다.

옆 건물은 5층으로 건물의 높이가 엇비슷했다. 그 아래 우글거리는 좀비들의 모습은 언뜻 보면 회색빛 파도로 보였다.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옆 건물로 피신하려고 하는 이유는 현재 있는 건물의 외벽이 크게 훼손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폭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건 아니지만 그 여파로 외벽에 금이 갔고, 그 틈새로 좀비들이 밀려들어 왔다.

게다가 전투가 벌어진 탓에 현재 건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사방에서 좀비들이 달려든다면 이현과 김솔은 구할 수 있지만 다른 생존자들까지 지키는 건 무리였다.

굴러다니는 철근들을 모아 사다리 형태로 만들었다. 얼추 완성되자 진표성이 사다리를 들고 창턱에 올라갔다.

“바글바글하네.”

아직은 진표성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좀비들이 우울한 하울링을 하며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진표성을 곤란에 빠트렸던 렉스터 무리도 좀비들의 발치에서 기어 다녔다.

습관처럼 이빨을 딱딱 부딪치다가 좀비들의 다리를 덥석 잘라 먹어 좀비들이 다리를 잃은 채로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리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광경이었다. 진표성은 새삼 다른 팀원들의 능력이 간절해졌다. 손에 들고 있는 사다리도 임태한의 능력이면 손대지 않고 두둥실 띄울 수 있을 텐데. 자신은 무조건 몸을 써서 움직여야만 했다.

“진표성, 서둘러.”

“알았어.”

반대쪽으로 가 바깥을 둘러보던 한수호가 심각한 목소리로 진표성을 재촉했다.

갯과 좀비 몬스터 무리가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거리가 좀 있지만 이동 속도가 빨랐다. 후각이 일반 좀비나 다른 좀비 몬스터들보다도 뛰어난 편이라 사방에 진동하는 피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생존자들이 죽어 가면서 흘린 피가 바닥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에 쩌억, 쩍 소리를 내며 달라붙을 정도로 피가 흥건했다.

좀비들은 사체를 먹잇감으로 삼지 않는다지만 그들이 흘린 피는 좀비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달려오는 좀비 몬스터의 수가 기십을 넘어갔다. 하필 그들이 오는 방향의 벽이 가장 위태로운 상태였다.

한 번에 달려와 몸통을 부딪친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벽의 모습이 상상됐다.

한수호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그림자를 움직여 커다란 돌덩이들을 벽 앞에 쌓아 뒀다. 순식간에 성인 남성의 키만 한 돌담이 완성됐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기 전에 벽이 무너져 내린다고 하더라도 잠깐의 시간은 벌어 줄 장치였다.

“김이현 가이드, 저한테 안기세요.”

한수호가 김솔을 품에 안고 있는 이현에게 다가가 몸을 굽혔다. 이현과 김솔을 먼저 이동시킨 후에 다른 이들도 구할 생각이었다. 한수호에게는 이현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혹시 다른 이들은…….”

“진표성이 도와서 움직일 겁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현이 불안한 눈빛으로 김민지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민지만큼은 구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기도 했지만 그녀 또한 이현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민지는 현재 한쪽 팔이 눈에 띄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상처였다.

사다리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만든다고 해도 팔 하나를 못 쓰는 상태에서는 움직이기 쉽지 않을 터이니.

“나머지 분들도 이쪽으로 오세요.”

강준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생존자 두 명이 한수호의 뒤에 따라붙었다. 김민지도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에서 끔찍한 통증이 일었지만 바닥이 심상치 않게 진동했다.

김민지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전에도 겪어 본 적이 있었다. 다수의 좀비 떼가 달려오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린다.

쿠우우우웅―!

한수호가 돌무더기를 쌓아 놨던 쪽의 벽이 크게 흔들렸다. 거미줄처럼 그어진 실선을 따라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옥수수 알갱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살아남은 자들의 시선이 거세게 흔들리는 벽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다들 비켜!”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강준이었다. 기가 죽어 있다가 진표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제 주변에 선 채 은근히 압박하던 생존자 두 명을 강하게 밀쳐 내기까지 했다.

“저 새끼가…….”

밀쳐진 생존자의 시선이 강준의 등 뒤로 길게 따라붙었다.

진표성은 좀비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사다리를 옆쪽 건물의 옥상으로 뻗고 있는 중이었다.

철근의 무게가 상당한 터라 양팔의 근육이 위협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강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강준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힘을 쓸 때면 욱신거렸다. 그런데 그 원흉인 놈이 저 먼저 도망가겠다고 달려오고 있었다.

정보를 얻어 내는 것과 얄미운 놈을 당장 죽이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이득일까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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