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32화 (32/133)

032.

궁지에 몰린 이들이 내는 힘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진표성은 현재 이현을 안고 있었다. 누군가를 보호하는 상태에서 전투하는 것은 팔을 하나 잃은 채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크윽…….”

진표성의 등 뒤로 새로운 상처가 생겼다. 등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창상은 강준이 들고 있는 도끼의 날이 만든 거였다. S급 에스퍼의 피부는 몬스터 못지않게 질기고 단단하다.

그러나 강준의 힘 또한 현재 진표성에게 달려들고 있는 하프 좀비들 중 가장 강했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진표성의 살갗을 가른 것만으로도 그의 힘이 S급에 근접한다는 뜻이었다.

진표성에게 안긴 상태라 그가 부상을 입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한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걸 조심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서동연에게 납치당했을 때부터 주변인들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았다.

제게도 제대로 된 전투 능력이 있었다면 이토록 무력하게 안겨 있지 않을 텐데.

지금처럼 강한 무력감을 느끼는 건 스무 살 때 큰 사고를 당한 이후 처음이었다. 단 1년간의 기억에 공백이 생겼을 뿐인데 졸지에 고아가 됐다.

삶의 일부분이 통째로 뜯겨 나간 듯한 절망감을 극복해 내기 위해 이현은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세 시간 이상 늘리지 않았었다.

지금처럼 겉보기나마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그 시절의 이현이 피나는 노력을 한 덕분이었다.

이현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던 발작 또한 잠잠해진 상태였다. 이토록 피가 난무하는 공간 속에서 이현이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큰 발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현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진표성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진표성의 주변은 여전히 하프 좀비들로 가득했다. 일대일로 상대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을 놈들이지만, 강준의 경고에 치고 빠지는 식으로 전투 방식을 바꿨다.

진표성은 폭주 위험 수치 때문에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

아무리 진표성이더라도 전투 양상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빠르게 지칠 게 분명했다. 이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분명 이현은 좀비들과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가이딩했다.

한번 했다면 다시 또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믿고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가이딩 마력에 집중했다.

“이만 포기하는 게 어때?”

“개소리도 정성스럽게 하네.”

진표성이 결국 폭주 위험 수치가 오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손을 휘둘렀다. 마석이 달린 귀에서 뜨끈한 통증이 일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가장 근접했던 하프 좀비의 머리를 세 등분으로 갈라 버렸다.

지독한 피 냄새와 함께 진표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투박한 외양의 팔찌가 위험을 경고하는 것처럼 주홍빛 불빛이 깜박거렸다. 그와 함께 진표성은 수십 개의 송곳이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석이 달린 귀 쪽도 뜨거워졌다.

“얼마 안 남았구나. 폭주하고 싶은 거 아니면 가이드, 우리 쪽으로 넘겨.”

강준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S급 에스퍼가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이미 너무 지친 상태고, 심지어 폭주 위험 수치도 높다.

“……닥쳐.”

진표성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입술의 고통은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였다. 진표성이 늘어지려는 팔에 힘을 주고 이현의 목덜미에 고개를 스치듯이 묻었다.

향기로운 체향에 통증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이현이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지도 않고 유독 얌전하다는 걸 느꼈다.

“가이드?”

이현을 부른 순간 진표성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에 숨을 멈췄다. 전투 상황에 맞지 않게 이제는 입맞춤까지 하는 두 사람을 향해 강준이 비웃음을 흘리다 흠칫 몸을 굳혔다.

“설마…….”

이현을 중심으로 무형의 마력이 퍼져 나왔다. 맞닿은 입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이딩에 진표성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두 사람의 주변에 포진해 있는 하프 좀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표성은 세상에 이현과 자신, 단둘만이 존재하는 듯해 눈을 감지도 못했다. 멍청이처럼 굳어 눈을 감은 채 제게 입 맞추고 있는 이현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지독한 두통과 귀에서 느껴지던 열기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입맞춤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 건 흘러들어 오는 가이딩 마력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혀를 섞는 키스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물러나―!”

강준이 이를 악물고 이현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물렸다. 하지만 이미 이현에게서 흘러나온 가이딩 마력이 주변을 장악한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 안에 넘쳐나던 활력이 빠른 속도로 스러지기 시작했다. 강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변화된 몸 상태가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거였다.

강준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하프 좀비들도 바닥으로 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신부가 자꾸 위험한 능력을 남발하네.”

서동연의 시선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자신과는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권에 놓인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참기 힘들 정도로 불길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한눈팔 정도로 내가 만만한 상대인 줄은 몰랐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한수호가 서동연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오른손에 쥔 단검의 끝이 서동연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피익, 콧등에 생긴 실선 위로 곧이어 붉은 핏방울이 꽃술처럼 맺혀 들었다. 한수호가 혀를 쯧, 찼다. 드물게 서동연이 방심한 순간이었다.

콧등을 스치는 게 아니라 머리통을 반으로 가르려고 했다. 경미한 상처로 서동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서동연의 반격을 막아 낼 준비를 하던 한수호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내가 진짜 무서운 게 없는데……. 저 능력은 좀 성가시거든.”

서동연이 빠른 속도로 한수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서동연은 현재 이현의 가이딩 마력이 닿는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거였다.

한수호가 서동연을 끝장내기 위해 따라붙으려고 할 때였다.

“김이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뚝 멎었다. 빠져나가는 데 집중하던 서동연의 시선도 찰나이지만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닿았다.

“……정신 좀 차려 봐.”

“쿨럭, 쿨럭…….”

이현의 뺨을 쓰다듬는 진표성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이 현재 핏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핏물을 제외하면 입술 색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입을 맞추는 순간까지는 좋았다. 상황의 긴박함도 잊고 진표성은 정말로 이현에게만 집중하고 말았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정신이 혼미했으니까.

이현을 안았을 때 풍기던 체향 또한 강하게 코끝에 감돌고 있어 그대로 깊숙이 고개를 틀고만 싶었다.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강하게 차오르던 두통도 서서히 옅어졌다. 손을 잡고 가이딩을 받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각이었다.

단순히 입술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혀를 깊게 섞으면 어떤 감각이 들까, 호기심이 치밀었다.

아마 이현의 코끝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진표성은 상황도 잊고 이현에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을 것이다.

코피를 흘린 게 시작이었다. 이현의 등이 앞으로 굽더니 검붉은 핏덩어리를 토해 냈다. 하프 좀비들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회복 포션이…….”

진표성이 품을 더듬었다. 이현의 숨은 점점 뜨거워져 가는데, 품 안의 몸은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혹시 몰라 회복 포션을 사용하지 않고 챙겨 놨었다.

서동연에게 잡혀간 이현과 김솔의 상태가 어떨지 모르는 만큼 회복 포션을 마셔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도 마시지 않고 버텼다.

그렇게 아껴 둔 회복 포션인데 자꾸만 헛손질하는 바람에 꺼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이현에 대한 제 감정이 뭔지 제대로 깨닫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마주한 상황에 진표성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김이현 가이드.”

한수호가 정신을 못 차리는 진표성에게서 이현을 빼앗아 품에 안았다. 진표성이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다가 다가온 사람이 한수호라는 걸 알고는 순순히 이현을 건넸다.

곧장 회복 포션 하나를 꺼낸 한수호가 이현의 입술 새로 흘려 넣었다. 하지만 이현은 포션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뱉어 내기만 했다.

간헐적으로 기침도 계속하고 있어 이대로는 양이 많지 않은 회복 포션만 낭비될 수도 있었다. 빠르게 상황 판단을 끝낸 한수호가 회복 포션을 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현의 목덜미를 안정적으로 받치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진표성의 눈이 커다랗게 홉뜨였다. 한수호가 이현에게 남다른 행동을 보인다고는 생각했지만, 이토록 스스럼없이 입을 맞출 줄은 몰랐다.

물론 지금 그가 한 행동은 키스가 아니라 응급조치에 가깝다는 걸 안다. 다만 그런 생각들은 머릿속에서만 빙빙 돌았다.

알파 1팀의 다른 이들은 가이딩 센터에 가면 필요에 따라 가이드와 성적 접촉까지 하고는 했다. 유일하게 손잡는 것 이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한수호가 유일했다.

그랬던 그가 스스럼없이 이현의 입술을 머금는 장면에 이현이 입을 맞췄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진표성의 표정이 멍해져 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