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솔이 좀…… 부탁할게요.”
“걱정 마세요.”
김민지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콩콩 두들겨 보였다. 믿음직스럽기보다는 귀여운 행동이었지만 이현은 옅게나마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멍청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현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김민지의 눈빛은 평범한 사람 같았다. 자신보다 약한 이를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런 보통 사람처럼.
게다가 이현이 김솔의 곁을 지킨다고 해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한수호와 진표성을 도와 지금의 난국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이현이 무릎을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수수깡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사정없이 떨려 왔다. 이마에 맺혔던 식은땀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눈이 따가워 손등으로 훔치자 반쯤 굳은 피가 묻어났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까지. 누군가 이현의 몸을 들고 흔드는 것처럼 시야 또한 어지러웠다.
“하아…….”
금세라도 까무러칠 듯 힘이 없었다. 아픈 곳이 너무나 많아 모든 고통이 한데로 뒤섞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육신의 피로에 져 버리면 그대로 황천길로 갈지도 모른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음들이 날카로웠다. 비명이 난무하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이현이 가이딩 마력을 끌어모았다.
가이드가 에스퍼를 가이딩할 때는 신체가 맞닿아야 한다. 가이드라면 반드시 숙지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상식 중 하나였다. 분명 이현도 과거에는 에스퍼를 가이딩할 때 다른 가이드처럼 접촉해야만 했다.
그런데 죽을 뻔한 위기 속에서 이현은 스스로도 이해 못 할 기적을 일으켰다.
가이딩 마력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간 느낌이었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스라한 감각을 떠올리기 위해 이현이 눈매를 좁혔다.
“너는 왜 위험하게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그런 이현의 모습을 진표성이 놓칠 리 없었다. 분명 기절한 걸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곳에 두고 왔다. 언제 일어난 건지 시체 같은 안색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도, 도와드리려고…….”
“네가 뭘 어떻게 돕는다고. 이따가 가이딩이나 해 줘. 폭주 위험 수치 때문에 죽겠으니까.”
진표성이 이현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이현이 짐짝처럼 그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등허리를 주먹으로 두들겨 봐도 진표성은 다가오는 하프 좀비들만 처리했다.
“가만히 있어. 진짜로 죽고 싶어서 이래?”
진표성은 지금까지 특정 가이드와 친분을 쌓았던 적이 없다. 전속 가이드 계약은 생각도 하지 않았거니와 가이딩을 받으러 주기적으로 가이드 센터에 갈 때도 랜덤 매칭을 했다.
그와 전속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가이드들은 간혹 있었지만, 이상하게 누군가와 단둘이 묶인다는 게 꺼려졌다. 그런데 어느 날 이현이 알파 1팀 전속 가이드로 나타났다.
비록 팀 가이드로 온 거였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진표성은 보다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을 거다. 위험한 임무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포장보다 이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처음에는 목석같은 팀장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 덩달아 시선이 간 거였다. 그런데 이현에게 가이딩을 받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진표성은 한수호를 떠나 이현 자체에게 관심이 생겼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이현을 발견했을 때 진표성은 심장이 뚝 떨어진다는 표현이 어떤 기분인지 알게 됐다. 김종현의 배신으로 황두학이 다쳤을 때 느꼈던 심정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여유 만만하네. 우리를 상대로 연애 놀음까지 하고.”
하프 좀비 하나가 사납게 웃으며 진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은빛 털이 돋아난 손이 날카로운 날붙이를 쳐 냈다. 동시에 하프 좀비의 목을 잘라 내려고 했으나, 날붙이의 방향이 반 바퀴 돌아 이현의 등으로 향했다.
“……성가시게.”
진표성이 둘러메고 있던 이현을 안아 드는 자세로 바꿨다.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날붙이에 등 쪽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피가…….”
이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갑자기 바뀐 자세에 이현은 별수 없이 진표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원래도 진표성의 몸에는 상처가 많았지만, 방금 난 상처에서 흐르는 붉은 피는 유독 선명한 빛깔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내 말 좀 듣자. 왜 자꾸 움직이는 거야?”
진표성이 혀를 끌끌 찼다. 이현이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고쳐 안아 들고 땅을 박찼다.
그런 진표성의 곁으로 하프 좀비 하나가 바짝 따라붙었다. 방금 전에 이현을 공격했다가 진표성의 등에 상처를 낸 놈이었다.
“우리도 그 사람한테 볼일이 있거든. 순순히 내줘야겠는데.”
이현이 하프 좀비를 정화하는 걸 본 이는 서동연뿐만이 아니었다. 주홍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강준도 그 장면을 목격했다. 더더군다나 서동연이 인간이 된 동료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까지 봤다.
강준이 생각하기에 모든 원흉은 이현이었다. 하프 좀비를 인간으로 돌리는 능력을 가진 사람 따위 듣도 보도 못했다. 직접 눈으로 본 장면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누군가 관련된 얘기를 해도 미쳤냐며 무시했을 터다.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네.”
진표성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현을 훑어 내리는 강준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이었다. 이현도 저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아까부터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감각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서동연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하프 좀비의 신체 어딘가를 접촉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당시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터라 지독한 생존 본능이 이능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지금은 그때만큼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몸을 감싼 온기가 더없이 듬직하기는 했다.
홀로 김솔을 지켜야 하는 상황과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한수호도 서동연을 상대로 팽팽한 접전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진표성 에스퍼, 저 사람, 아니 좀비한테 좀만 더 가까이 붙어 봐요.”
이현이 진표성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간지러운 감각에 진표성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도 가이딩하려고? 그렇게는 안 놔두지.”
최대한 작게 속삭인 거지만 하프 좀비의 청력은 일반 좀비나 좀비 몬스터보다도 뛰어났다. 강준이 눈매를 서늘하게 굳혔다. 이현 때문에 능력을 잃은 동료가 어떻게 됐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다들 가이드한테서 떨어진 채로 움직여.”
강준이 다른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표성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상태로 장내를 훑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묘한 탓이다.
“너 무슨 짓 했냐? 저 새끼들 왜 꽁지에 불붙은 개새끼처럼 너를 피해?”
진표성이 알기로 이현에게는 딱 B급 가이드다운 능력만 있을 뿐이다. 높은 매칭률 덕분에 이현보다 높은 등급의 가이드에게서 가이딩을 받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지만, 능력만으로 보면 그랬다.
“저도 몰랐던 제 능력을 발견했거든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진표성 에스퍼도 능력 더 사용하면 위험하니까.”
이현의 눈동자가 진표성의 팔목을 훑었다. 현재 그의 폭주 위험 수치는 59였다. 단 2만 올라도 코드 오렌지 등급이었다. 코드 오렌지면 에스퍼는 등급을 막론하고 가이딩 센터에 입원해야 했다.
항상 여유로움이 넘치던 얼굴 위에도 짙은 피로가 맺혀 있었다. 여전히 하프 좀비들의 수는 아군의 몇 배를 웃도는 상황. 게다가 한수호는 서동연에게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코드 오렌지로 올라가면 에스퍼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지금 느끼는 통증도 분명 무시할 수준이 아닐 텐데 진표성은 의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진표성이 말갛게 빛나는 이현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자신을 향한 걱정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보자 심장 한쪽이 또 이상하게 반응했다. 마치 이현에게 제 심장을 내어 준 것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격한 고동 소리를 냈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에서도 이현이 지닌 체향은 뚜렷하게 코끝을 훑었다.
주변에 가득한 피 내음이 과일의 즙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달콤하면서도 산뜻한 향이었다. 달큼한 향 너머 푸르른 삼나무로 둘러싸인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상쾌함도 느껴졌다.
진표성은 이현에게 말을 걸면서도 입 안이 바짝 말라 마른침을 삼켰다. 와중에서도 주변에 달라붙어 오는 놈들을 피해 움직이는 몸이 날렵했다.
“한 놈씩 접촉할 수 있게…….”
“쟤네를 왜 만져, 네가.”
이현은 분명 진표성보다 나이가 많았다. 잠시 ‘너’라는 호칭을 정정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상황이 여의찮았다. 이현이 표정을 가다듬고 진표성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가 가이딩하면 좀비들이 능력을 잃더라고요. 일반 좀비와 좀비 몬스터는 사체로 돌아갔고, 하프 좀비는 다시 사람으로 변했어요.”
“뭐?”
자각도 없이 이현의 체향에 취해 있던 진표성이 큰 소리를 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못하게 막아!”
동시에 강준도 남아 있는 하프 좀비들과 함께 총력을 기울였다. 예전처럼 아무 능력도 없는 상태로 돌아갈 바에는 전투 중에 죽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