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무너지는 부분을 피해 지반이 아직은 탄탄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프 좀비들 중 일부도 진표성을 따라왔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고서야…….”
순식간에 진표성의 주변이 하프 좀비들로 둘러싸였다. 찐득한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하프 좀비 하나가 살벌하게 읊조렸다.
진표성의 능력으로도 버거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몇 놈은 최소 A급 에스퍼 정도의 기세를 내보이고 있었다.
“누구 간이 먼저 밖으로 나오는지 내기라도 할까?”
그러나 진표성은 주눅 들기는커녕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방금 입을 열었던 하프 좀비가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수십 미터는 떨어져 있던 진표성의 샛노란 눈동자가 코앞에서 보여서였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반사적으로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인 순간이었다.
“커흑…….”
“어때? 네 간을 직접 눈으로 본 소감이.”
배 속에 들어 있던 간이 진표성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내장이 헤집어지는 고통과 함께 눈에 핏발이 섰다.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하프 좀비는 사지가 떨어져 나가도 머리통이 부서지지 않는 한 되살아났다.
그러나 하프 좀비가 된 이후 처음 겪어 보는 지독한 고통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다들 무기 꺼내. 한 번에 공격해야 하니까.”
하프 좀비들 중 가장 전투 경험이 많은 이가 품에서 무기를 꺼냈다. 날카롭게 벼려진 마체테 형태의 무기였다.
“재미없게.”
진표성이 들고 있는 간을 던지고 그대로 벌벌 떨고 있는 놈의 머리통을 손으로 꿰뚫었다.
하프 좀비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사지를 경련했다. 떨림이 멎기도 전에 진표성이 손을 탁 털어 냈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하프 좀비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콰지직, 두개골 형태가 남아 있는 덩어리가 진표성의 발 아래에서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온몸에 쏟아지듯 흘러오는 살기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진표성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사방에서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한수호가 비어 있는 안쪽을 훑어보며 침음을 삼켰다. 이곳에서도 찾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인질을 가둬 둘 만한 공간은 한정적인데, 들르는 곳마다 허탕이었다.
진표성이 폭탄을 터트리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30분의 타이머 세팅을 동시에 했다. 한수호에게도 진표성과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진표성의 성격과 능력이라면 제시간에 맞춰서 폭탄을 터트릴 게 분명했다. 폭탄이 터지기 전에 이현과 김솔을 구해야 했다.
일부러 살상력이 좋은 폭탄들로만 골라 가지고 왔다. 웬만한 폭탄으로는 하프 좀비들에게 별다른 타격을 줄 수 없어서였다.
그렇다는 건 일반 사람은 폭발의 영향권에 있는 것만으로도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초조해지자 자꾸만 과거에 미련이 생겼다.
진작에 이현을 찾아가야 했던 걸까.
하지만 자신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그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현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으니까.
기억을 되찾은 이현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두려웠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기억을 되찾은 후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수호가 다리 쪽으로 마력을 순환시켰다.
지금은 이현을 무사히 구해 내기 위해 집중할 때였다. 아직 그는 살아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쪽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무슨 소리?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가만히 들어 봐. 분명 인기척 같은 게 났다니까?”
“좀비 몬스터들이겠지. 요즘 부쩍 렉스터가 극성이잖아.”
“아니…….”
하프 좀비가 지나가는 복도의 천장에 몸을 붙이고 있던 한수호가 소리 없이 내려와 그들의 뒤에 섰다.
방금 전에 닫힌 문을 강제로 열 때 난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 같았다. 양손 위로 한 손에 적당히 잡히는 단검이 만들어졌다.
나란히 서 있는 하프 좀비의 목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이변을 눈치채고 뒤돌아봤을 때는 이미 늦었다.
툭,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통 두 개를 한수호가 단검으로 찔러 받아 냈다. 바닥으로 무너지는 몸도 발등으로 툭툭 쳐 올렸다.
곧 그림자가 일어나 두 개의 몸뚱이를 소리 나지 않게 구석으로 치워 냈다.
“저쪽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A-12에서 보초 서는 애들하고도 연락이 안 돼.”
“다들 이쪽으로!”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들켰다. 한수호가 시계를 내려다봤다. 남은 시간은 5분여.
혀를 쯧, 찬 한수호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하프 좀비 무리가 한수호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수호는 최대한 그들의 시야에 잡히지 않기 위해 어두컴컴한 그림자들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리 중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이가 함께 있었다.
“천장 위쪽!”
한수호의 존재를 가장 먼저 눈치챈 하프 좀비가 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놈의 뒤를 이어 달려오던 하프 좀비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크르르……!”
늑대 형태의 좀비 몬스터들도 다수였다. 목에 채워진 목줄과 연결된 끈이 하프 좀비들의 손에서 놓아졌다.
“컹! 컹!”
한수호를 향해 좀비 몬스터들이 짖어 대기 시작했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한수호의 잔상이라도 물려는 입질이 사나웠다.
하프 좀비들의 공격을 피해 움직이고 있는 한수호의 발등에 아슬아슬하게 좀비 몬스터의 이빨이 스쳤다.
특수 제작된 워커를 신고 있지 않았다면 신발이 찢어졌을 만큼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커억!”
“쿨럭, 쿨럭…….”
“다들 정신 안 차려?”
한수호가 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하프 좀비가 하나씩 사체 덩어리가 되어 갔다. 일부는 한수호의 옷깃을 잡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단검이 놈들의 목을 훑어 내리고, 머리통을 갈랐다. 생명을 위협하는 건 단검뿐만이 아니었다.
손바닥 반만 한 표창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여지없이 하프 좀비의 몸에 틀어박힌 표창은 피 흘리는 상처만 낸 후 허상처럼 사라졌다.
한수호의 존재를 처음 눈치챘던 이가 몸을 물리며 고함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도 한수호의 단검과 제가 들고 있는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바로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토막 나 죽었을 테니까.
“이건 또 뭐야?”
한수호의 주변으로 그림자 병사들이 일어났다. 하프 좀비의 그림자들이었다.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게 된 하프 좀비들이 하나둘씩 뒤로 밀렸다.
그림자들은 한수호처럼 단번에 그들을 죽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림자를 공격해도 그림자는 몸이 베어졌다가 원래 모습을 금방 회복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림자가 일어나 몸을 움직이자 그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서서히 잃어 갔다.
“씨발! 좀 죽으라고―!”
“아아악!”
여기저기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마치 허상을 공격하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허상의 공격은 자신의 몸에 실제로 상처를 내는데, 자신의 공격은 허상에게 아무런 대미지도 주지 못한다는 게 절망스러웠다.
“인질들은 어디 갇혀 있지?”
한수호가 현재 있는 이들 중 가장 대장 격으로 보이는 놈의 목 줄기를 틀어쥐었다. 하프 좀비가 목을 옥죄고 있는 한수호의 손등을 떼어 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여지없이 그의 그림자가 일어나 움직이는 팔과 다리를 결박했다. 물어뜯기 위해 이를 딱딱 부딪쳐 봐도 헛수고였다.
그림자가 이마를 휘감아 뒤로 잡아당겼다. 한수호가 그에게서 들을 말이 있기에 입은 막지 않고, 고개만 뒤로 젖힌 거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다들 하프 좀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맛본 절망감에 무너져 갔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한수호의 눈동자에 소름이 돋았다. S급 에스퍼의 능력은 엄청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다른 S급들보다도 한 차원 다른 존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이렇게 날뛰는 것도 잠시뿐이야.”
그러나 하프 좀비는 한수호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의 보호 아래 있다. 언젠가 그의 본성을 지척에서 마주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이 남자라면 제 목숨을 걸어도 된다고. 무너진 세상이 완전히 재건됐을 때 왕이 될 이는 그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대장이 곧…….”
한수호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하프 좀비의 목을 비틀었다. 뼈가 어그러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숨이 끊어지지 않아 핏발 선 눈이 한수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컥…….”
하프 좀비를 옭아매고 있던 그림자의 손이 턱 밑을 파고들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에서 생기가 안개처럼 스러져 갔다.
복도는 하프 좀비들에게서 흘러나온 것들로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전투의 여파로 부서진 전등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깜박깜박 점멸할 때마다 끔찍한 광경이 드러났다 모습을 감추었다.
한수호가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하프 좀비 하나에게 다가가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복도 끝에서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린 건 그때였다. 일부러 들으라고 내는 소리였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