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이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서동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뒷덜미에 서느런 감각이 들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었다. 오히려 뜨거웠다. 이현은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서동연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놈한테 키스한 걸까. 자괴감마저 들었다.
아무리 그때 생명에 위협을 느껴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서동연은 기본적으로 살기를 두른 사람이었다. 표정은 무해하고 생글생글 잘 웃어도 그에게서는 날것의 피 냄새가 났다.
마치 서동연이 칼을 들고 자신을 위협하는 것처럼 이현은 순식간에 식은땀이 차오른 손바닥을 바지에 살살 문질러 닦았다.
“내가 무서워?”
“아니요.”
다부지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려서 별 소용은 없었다. 단순히 생명의 위협만 느껴서 무서운 게 아니라 정조까지 걱정되는 판국이었다.
도대체 서동연은 왜 이현과 데이트 같은 행위를 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이현은 그가 자신을 좋아해서 이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질 낮은 흥미는 있을지언정, 애틋한 마음 같은 건 보이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이현은 운이 지독하게 나쁜 건지도 모른다. 서동연이 제 맘대로 데리고 놀 인형이 필요한 시점에 이현이 그를 자극했다는 게 그나마 신빙성 높은 가설이었다.
“무서워해도 괜찮아. 가끔은 공포가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서동연이 입매를 시원스럽게 끌어 올리며 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것 좀 챙길게요. ……비싼 거라서.”
하지만 이현은 서동연의 손을 잡는 대신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호복을 주워 들었다. 이현이 직접 보호복 개발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보호복을 만드는 데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는 건 잘 알았다.
게다가 언제 필요할지 모른다. 이현은 계속 서동연에게 얌전히 잡혀 있을 생각이 없었다. 무모한 짓은 선뜻 저지르지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알파 1팀이 최대한 빨리 구하러 오는 거였다. 김솔의 상태가 걱정돼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를 발견한 날에도 긴장이 풀려 열경련이 왔던 아이다.
지금처럼 극도의 긴장 상황에 놓여 있다면 아플 가능성이 높다. 성인에게는 별거 아닌 열감기도 어린아이에게는 치명적이다.
서동연이 김솔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이 아픈 아이를 과연 친절하게 보살펴 줄까? 자문해 봐도 대답은 암울하기만 했다.
“진짜 골 때리네.”
이현은 김솔이 걱정돼서 죽겠는데 서동연은 이현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이현이 서동연에게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겁이 많은 것 같다가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서동연이 불시에 손을 뻗어 덥수룩한 이현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렸다. 폭탄이 터질 때 머리카락에 가득 묻어난 먼지들이 풀풀 날렸다.
“하지 마요.”
차마 손을 쳐 내기에는 무서워서 이현이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이건 압수. 왠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거든.”
이현이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보호복이 서동연에게 넘어갔다. 좀비의 피부 결을 살린 외피가 마음에 안 드는지 서동연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 검지와 엄지로만 보호복을 집어 들었다.
“쇼핑도 했겠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하도 속이 답답해서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응? 데이트하잖아.”
“…….”
이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설마 했던 생각이 사실일 줄이야.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이현이지만 옷을 사 주고 밥까지 먹자고 하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어려우리라.
연구소 동료들이 이현에게 왜 창창한 나이에 연애를 안 하냐고, 그러다 몸에 사리 생기겠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임무에 파견되기 전에 훈련하다가 한수호가 넘어질 뻔한 이현을 잡아 줬을 때에도 연애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별거 아닌 접촉에도 반응하고 만 자신이 한심했던 탓이다.
“데이트할 때는 일단 백화점에 가서 비싼 옷 사 주는 걸로 시작하라고 하던데.”
누구한테 조언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연애를 많이 안 해 본 게 분명했다. 아니면 물질적인 걸 바라는 상대하고만 연애를 했거나.
평화로운 세상에서나 먹힐 법한 방식이었다. 상대가 이현이 아니었다면 꽤 성공적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서동연은 하프 좀비였다. 좀비였다가 사람으로 다시 돌아온 자. 심지어 서동연은 하프 좀비들을 이끄는 리더 격이었다.
그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두려운 시선으로 이현을 바라보기는 해도 입맛을 다시지는 않고 있어 인육을 탐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든지 돌변해서 이현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남자였다.
“심장소리가 또 빨라졌어. 설렘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아쉽네.”
이현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서동연이 활짝 미소 지었다.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부하 한 명에게 들고 있던 보호복을 휙 던져 넘겼다.
빈손이 된 서동연이 마찬가지로 손에 든 게 아무것도 없는 이현의 손을 슬쩍 잡았다.
이현이 손을 움찔 떨며 빼내려고 했지만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 든 서동연의 손길이 더 빨랐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손만 잡자. 이미 키스까지 한 사이기는 한데, 진도는 최대한 천천히 나가는 게 좋아.”
서동연의 손은 일반 사람처럼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서 이현은 더욱더 소름이 끼쳤다. 키스라는 단어를 꺼내며 옅은 홍조를 띠는 볼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
양쪽 눈동자의 색이 다른 것만 빼면 그는 정말 이현과 같은 사람 같았다. 본질은 괴물인데 겉가죽은 사람인 존재.
그에게서 느껴지던 혈향마저도 어느 순간부터 고유한 체향에 가려져 잘 느껴지지 않았다. 서동연에게서는 이질적으로 잘 마른 빨래 냄새가 났다.
밝고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뽀송뽀송하게 마른 침구에서나 날 법한 내음이었다.
그 괴리감에 이현은 울고만 싶었다.
사실 이현의 신경 줄은 현재 당장이라도 끊어질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임무 초반부터 극도로 긴장했다.
김솔을 만난 후부터는 김솔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쉬어야 할 때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선잠을 잤다.
그런 상황에서 동료였던 이가 팀의 가장 막내인 황두학을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설상가상으로 현재는 서동연에게 납치된 상황이었다. 모든 게 다 스트레스로 귀결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살결이 보들보들해. 기분 좋다.”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은 이현과 달리 서동연의 표정은 행복감에 젖어 반짝였다.
심지어 손등을 간질이는 손끝에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연구소에 처박혀서 연구만 하던 세월이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이현이 지닌 지식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석 연구원이라는 지위는 무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D급 에스퍼보다 못한 처지였다.
“음식은 어떤 거 좋아해? 일단 스테이크로 준비시키기는 했는데.”
그 음식이 사람은 아니겠지.
좀비는 희한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만 먹이로 삼았다.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눈앞에 지나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황 덕분에 생존한 인간들은 고기만큼은 풍족하게 섭취할 수 있었다. 오히려 좀비들에게 빼앗긴 땅이 많아 예전보다 채소류와 과일들을 다양하게 섭취하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돼. 다리 아프면 내가 업어 줄까?”
“……괜찮아요.”
이현은 현재 다리뿐만 아니라 서동연과 맞잡고 있는 손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괜찮다고 되뇌어도 긴장감과 두려움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 억지로 업지는 않을게.”
손은 자기 마음대로 잡았으면서 선심 쓴다는 말투에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현은 현명하게 침묵을 택했다.
서동연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레스토랑은 딱 한 테이블만 세팅되어 있었다. 바깥의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비현실적으로 하얀 테이블보가 씌워진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이현은 거대한 인형의 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서동연의 놀이 상대가 되어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현실에 숨이 막혔다.
“음식 재료는 인간들이 먹는 걸로만 만들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스테이크의 단면에서는 여전히 선홍빛이 돌았다.
“먼저 앉아.”
서동연이 자연스럽게 이현이 앉을 의자를 빼 줬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행동에서 귀티가 느껴졌다.
문득 서동연이 정말 인간이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현은 실없는 생각을 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솔이 밥은요?”
꽤 오랜 시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배 속은 이현의 속도 모르고 음식 냄새를 맡자 소리를 냈다. 배를 손바닥으로 감싸 안은 이현의 볼이 붉었다.
탈출을 하기 위해서라도 배는 채워야 했다. 굶은 상태로 있으면 몸에 힘이 없어 기회가 오더라도 힘을 내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이현은 김솔에게도 끼니를 챙겨 주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기다려 봐.”
이현은 김솔의 상태를 확인할 때까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을 기세였다. 눈매를 좁힌 서동연이 뒤쪽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여기 있습니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하프 좀비 한 명이 서동연에게 다가와 손바닥만 한 종이를 건넸다.
“자, 봐 봐. 신부가 계속 보고 싶어 하던 꼬맹이. 우리가 이래 봬도 꽤 신사적이라고. 어린애 밥을 굶기지는 않아.”
서동연이 이현에게 건넨 건 자그마한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김솔은 음식이 든 식판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눈물이 가득했지만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눈빛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또렷했다. 품에는 다시 꼬질꼬질해진 토끼 인형을 안은 채였다.
“얘가 신부보다 겁이 없는 것 같아. 계속 신부를 찾더라고. 그래서 밥 안 먹으면 영원히 못 만날 거라고 했어. 나 잘했지?”
이현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끝으로 사진을 쓰다듬었다. 사진 속에서 김솔은 다행히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그건 신부도 마찬가지야. 밥 안 먹으면 꼬맹이 영원히 못 만날 거야.”
서동연이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 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괬다. 이현의 앞에 차려진 음식을 눈짓하는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