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5화 (5/133)

005.

‘부모도 천애 고아라면서요.’

‘어린 나이에 안됐죠. 꽤 재산이 많았던 것 같은데 부모가 일으킨 사고 때문에 다 거덜 난 거나 마찬가지래요.’

‘쯧쯧. 인생이 기구하기도 하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이현은 상복을 입은 채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문질러 봐도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귓가로 어지럽게 파고들었다. 이현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새하얀 국화꽃에 감싸인 영정 사진을 봤다.

기억 속의 부모님이 다정하게 웃으며 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이 바빠도 하나뿐인 아들에게는 최대한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셨던 분들이다.

‘엄마…… 아빠…….’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는지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옇게 흐려졌다 재차 맑아지는 시야 속에서 여전히 부모님이 차가운 유리 너머로 이현을 내려다봤다.

열이 오르며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까무러치는 몸이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품에 안착했다.

“머리 아파…….”

이현이 깨질 듯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악몽 속에서 느꼈던 두통과 비슷했다. 이현은 피 트라우마가 있었다.

손가락 끝이 찔렸을 때 나는 핏방울 정도는 괜찮았다. 그러나 비릿한 향이 훅 끼칠 정도로 쏟아지는 피를 보면 가끔씩 악몽 같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현은 스무 살 때의 기억이 없었다. 악몽이 스무 살 때 겪은 일의 잔상일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상담 치료를 받아도 상담 선생님은 이현에게 무리해서 기억하지 말라는 충고를 해 줄 뿐이었다.

좀비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악몽을 깨웠다. 어그러지는 호흡에 이현은 그 순간 반쯤 정신을 놓았다. 차가운 무언가가 자신을 들어 올리는 감각에 이어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한수호에게 안겼을 때 악몽 속에서 항상 등장하는 품이 떠올랐다.

“……부딪쳐 봐야 하는 걸까.”

고통으로 얼룩졌던 새까만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빛으로 물들어 갔다.

* *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서울 지부 알파 1팀 임시 가이드로 일하게 된 김이현입니다.”

이현이 회색빛 문을 열고 들어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현은 늘 입고 다니던 하얀색 가운을 벗고 에스퍼들의 유니폼과 색만 다른 가이드 정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창백한 살결이 새하얀 가이드복 때문에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이게 누구야?”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스미스 머신으로 몸을 단련하고 있던 진표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무에서 돌아온 후 진표성은 한수호에게 가 도대체 그 샌님과 무슨 사이냐고 물어봤었다.

‘훈련이 부족한 것 같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생뚱맞게도 진표성의 훈련량을 꼬집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진표성은 여러 번 부팀장인 임태한에게 훈련량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그때마다 유들거리면서 넘어갔던 부분을 팀장이 집어냈다. 결국 진표성은 임무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동안 미뤄 놨던 육체 훈련을 몰아서 하느라 나날이 고난이었다.

훈련이라는 게 꾸준히 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도 한수호는 진표성을 지치게 만들어 입을 막을 작정인 것 같았다. 평균 훈련량의 서너 배를 진표성이 하게끔 스케줄을 짰다.

오늘도 진표성은 일반 사람은 들어 올리지도 못할 무게의 바벨을 양쪽에 매달고 벤치에 누운 채 봉을 들어 올렸다 내리고 있었다. 무게가 상당했던지라 이미 그의 벗은 상체는 땀으로 번들거린 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에 문이 열리며 요즘 진표성의 최대 관심거리인 샌님이 들어왔다.

“팀 가이드로 온 거라고? 샌님이?”

서울 지부 알파 1팀에는 팀 가이드가 없었다. 팀원들과 대체적으로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가 없거니와, 딱히 팀원들도 팀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폭주 위험 수치가 차오를 때마다 가이드 센터에 가 랜덤으로 매칭된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게 다였다.

“네. ……조금만 물러나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은데요.”

이현이 눈앞에서 들썩이는 거대한 흉곽에 두꺼운 안경알 속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얼굴만 봐서는 앳돼 보이는데 위협적으로 들썩이는 대흉근과 전거근에 숨이 턱 막혔다.

“팀 가이드가 되려면 팀원 전원이랑 매칭률이 80%가 넘어야 하는데?”

“맞습니다. 여기 관련 서류요.”

이현이 품속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진표성에게 건넸다. 이현이 알파 1팀의 팀 가이드로 발령이 난 건 오늘 오전에 확정된 일이었다.

미리 한수호 팀장에게는 언질이 들어간 일이다. 진표성의 반응으로 보아 팀원들에게는 공유를 안 한 듯싶었다.

“나랑 92%라고? 말도 안 돼…….”

진표성이 알파 1팀의 명단 옆으로 적혀 있는 이현과의 매칭률 수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로 이현은 알파 1팀 모두와 매칭률이 80%를 넘기고 있었다. 심지어 팀장인 한수호와는 매칭률이 95%였다.

협회를 통틀어도 보기 드물 정도로 높은 매칭률이었다.

“김이현 씨, 이미 와 있었군요.”

그때, 이현의 곁으로 한수호가 다가왔다.

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현이 그와 대화를 나눈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간단한 인사가 다였다. 스쳐 지나가듯이 인사할 때는 그저 무서울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가 구해 준 이후로 무의식 속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자극받았다.

갑작스럽게 알파 1팀 가이드로 파견 가라는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보람이 있을까.

기억의 공백은 이현이 삶을 살아가면서도 제대로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예 기억이 남지 않았다면 괜찮을 텐데. 잃어버린 기억의 잔존이 트라우마로 남아 이현의 삶을 때때로 엉망으로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반갑습니다. 한수호 팀장님.”

이현이 한수호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작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안경 탓에 입꼬리만 올라가는 게 보였다. 한수호도 마주 이현에게 미소를 건넸다.

“……지금 우리 팀장님 웃은 거야?”

“나 팔에 소름 돋았어.”

알파 1팀 팀원들이 못 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목석의 표본이라 불리는 팀장의 웃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결과였다.

“팀원들과 인사하고 있었습니까?”

“네. 진표성 에스퍼가 입구에서부터 환영해 줘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어요.”

검녹색 눈동자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굳어 있는 진표성을 기민하게 훑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 뭉치는 이미 반쯤 구겨진 채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한수호가 이현을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휴게 공간으로 이끌었다. 알파 1팀의 사무실은 이현의 연구실을 서너 개 합쳐 놓은 것만큼 넓었다.

이현의 연구실도 실험 도구와 실험체를 가둬 놓는 우리 때문에 굉장히 넓은 편이었는데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이현이 소파에 앉자 한수호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정신을 차린 알파 1팀 팀원들도 소파로 모여들었다.

사람 아홉 명이 앉아 있는데 소파에는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이현이 자신만 넓은 소파에 혼자 앉은 것 같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미소를 머금은 한수호의 얼굴을 보고는 얌전히 자세를 잡았다.

딱 붙은 무릎 위로 올려진 두 손이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상부에서 김이현 씨를 알파 1팀 가이드로 파견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발령이 난 상황인데 면접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현도 그게 의문이었다.

가이드 등급이 B급이기는 하지만 이현은 협회에 들어온 이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 내에서 보냈다.

전투 경험도 별로 없는 자신이 과연 협회 내에서도 가장 임무 달성률이 높다는 서울 지부 알파 1팀에서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마…… 이대로 있다가는 좀비들에게 인간들의 영역을 다 빼앗길까 봐 그런 거 아닐까요. 좀비 치료제 연구가 진전이 없으니 현장에 가서 뭐라도 얻어 오라는 걸로 알아들었습니다.”

“현장에 나가면 위험한 일이 많이 생길 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지시를 따른 겁니까?”

“수석 연구원이라고는 하지만 제게는 상부의 명령을 어길 만한 힘도, 배짱도 없는걸요.”

이현이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자신은 명령을 따른 것뿐이다. 취조라도 받는 듯한 분위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거운 분위기는 짧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김이현 가이드.”

한수호가 이현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이현에게 질문을 건네며 싸늘할 정도로 굳어 있던 표정 또한 온화해졌다.

이현이 한수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면서 경직된 입꼬리를 애써 위로 끌어 올려 보였다.

“아니, 팀장. 팀 가이드가 온 건데 왜 우리한테는 한마디 언질도 안 해 준 거야?”

“진표성, 말버릇.”

“내가 팀장이랑 팀원들한테 말 편하게 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얌전히 듣고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진표성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옆에 앉아 있던 임태한이 진표성의 팔을 붙잡으며 조용히 속삭였지만, 진표성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땀이 채 마르지 않은 상체에 에스퍼 정복 상의만 대충 걸친 그는 사람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 같았다.

한수호가 진표성의 불만을 이해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다들 이쪽으로.”

직사각형의 스크린 앞에는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들이 열을 맞춰 놓여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알파 1팀을 따라 이현도 슬그머니 비어 있는 의자 중 하나에 착석했다.

스크린 위로 한수호가 패드에서 내보낸 정보가 떠올랐다. 새빨간 점들이 박힌 서울의 지도였다.

“알파 1팀에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하프 좀비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들에 잠입해 본부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 오라는 상부의 지시야.”

“뭐?”

“임무를 수행하려면 팀 가이드가 필수지. 상부의 지시에 따라 협회 소속 가이드들과 우리 팀 전원의 마력 파동을 매칭했다. 그중에서 김이현 가이드가 우리 팀 전원과 매칭률이 상당히 높은 걸로 나왔고. B급 가이드지만 충분히 제 몫을 해낼 거야.”

한수호의 말에 진표성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의자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하프 좀비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들은 말 그대로 좀비 떼들이 우글거리는 지역이었다. 아무리 알파 1팀이라 해도 그곳에 잠입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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