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가이드가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1화 (1/133)

001.

세상이 멸망했다.

아니, 지구는 여전히 둥글고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만 멸망에 가까워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전조도 없이 지구촌 곳곳에서 열린 정체불명의 검은색 구멍은 인류의 반을 앗아 갔다.

구멍이 등장하는 곳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고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고, 수많은 차들이 오가는 대로 한복판에 생길 때도 있었다.

공통점은 구멍 속에서 영화나 드라마, 혹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는 점이다.

“꾸르륵. 꾸륵.”

“저게 뭐야……. 다들 도망쳐요……!”

구멍은 몬스터라 불리는 괴물들을 뱉어 냈다. 대한민국도 초창기에는 아수라장이 됐다.

현재는 ‘게이트’라 명명되는 구멍들이 나타난 날, 서울에 있는 대교 중 양화대교와 한남대교가 무너졌다.

하필 출근 시간대에 게이트가 등장하고 말았다. 게이트에서 쏟아진 몬스터들로 다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어졌다. 도로 위를 지나다니던 수많은 차들이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수백 명의 목숨이 허망하게 스러졌다.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곳곳에서 랜드마크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물들도 수수깡처럼 무너져 내렸다.

“엄마……!”

“아, 안 돼……!”

“꺄아아악……!”

무너지는 건물 잔해들에 깔리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밟혀 죽은 사람들의 수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다들 조준하고 발사해!”

투콰콰콰콰―.

“김 중위님! 소용이 없습니다!”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몰려…… 으아악……!”

현대 화기로도 몬스터들을 해치우는 건 쉽지 않았다. 지구촌 일부는 핵무기가 터져 폐허가 되어 버렸다.

콰아아앙!

“끼이잉, 끼잉…….”

“방금 몬스터가 날아갔어……?”

멸망의 장막이 드리운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내려온 건 게이트가 열린 순간만큼이나 급작스러웠다. 기적이 일어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몬스터의 입 안에 얼굴이 반쯤 들어갔던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의 주먹 위에 폭풍처럼 맴돌던 바람의 힘이 들개형 몬스터를 날려 버렸다.

“허억, 헉…… 이게 도대체 무슨…….”

남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남자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몬스터의 몸속 어딘가에서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그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이어 몸을 움직인 결과가 두개골이 함몰된 몬스터였다.

몬스터의 마석에 담긴 힘, 마력을 이용해 몬스터를 상대하는 에스퍼의 등장이었다.

문제는 에스퍼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마력이 몸속에 잔여물처럼 남는다는 것이었다.

마력은 에스퍼의 몸속에 남아 그의 몸을 해치기 시작했다. 마치 맹독을 흡수한 것처럼 에스퍼들은 갈수록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렀다.

“들끓던 마력이 가라앉았어.”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는 에스퍼가 등장한 것처럼, 그런 에스퍼를 위한 존재도 나타났다.

바로 에스퍼의 몸속에 남은 마력을 정화하는 능력을 가진 이, 가이드였다.

가이드는 마석을 이용해 에스퍼의 몸속에 축적된 독처럼 변질된 마력을 정화했다.

패드 속 영상을 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균열, 전격 개봉! 홍보 트레일러!]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의 홍보 영상이었다. 게이트가 나타났던 초창기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평가되는 영화였다.

현시대에서 영웅인 양 칭송받는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담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아무 영상이나 보다가 발견한 것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까지만 등장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르르…….”

투명한 유리 벽 속에서 살이 썩어 가고 있는 몬스터 한 마리가 괴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남자가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알이 두꺼운 안경 속에 가려진 남자의 눈매가 몬스터를 살필수록 가느다래졌다. 닫혀있던 연구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김이현 수석 연구원.”

“네, 연구소장님.”

이현이 연구소장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눈인사했다.

“C-345 실험은 어떻게 되었나?”

“방금 실패로 끝났습니다. 1분 23초 동안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다시 탁한 회색으로 물들었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투명한 유리 벽 안에 갇힌 네발로 서 있는 몬스터를 가리켰다. 척추뼈를 따라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B급 몬스터 울케라였다.

연구소장이 비틀거리는 울케라를 착잡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현의 옆에 떠 있는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는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C-334 실험에서는 분명 1분 48초 동안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돌아온 시간이 단축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세 번째 염색체에서 거부 반응이 심했습니다. 지금 울케라의 다리 쪽 근육이 빠른 속도로 괴사 중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흐음…… 이번 달 안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실효성이 있는 치료 약을 개발해야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좀비들이 어제 서대문구까지 밀고 들어왔어.”

“몰아내지 못한 겁니까?”

“현재 서울 지부 알파 1팀부터 10팀까지 모두 서대문구로 파견 나갔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야.”

“알파 팀이 전원 출전했는데도 쉽지 않은 거면…… 곧 서대문구도 좀비들한테 넘어가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보통 주간 보고 회의 시간에만 참석해 연구진들이 수행한 실험 결과의 추이를 살피는 연구소장이었다.

그런 연구소장이 웬일로 이현이 있는 연구실까지 몸소 행차했나 의아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다.

“일단 계속 실험을 진행해 주게. 국가에서 자네한테 거는 기대가 커.”

“네.”

이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이현의 어깨를 두드린 연구소장이 어느덧 유리 벽 안에 쓰러져 있는 울케라를 힐끗 살피고는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하아…… 서대문구까지 먹힌다라…….”

이현이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알이 큰 안경을 벗었다. 안경의 무게가 꽤 나가는 터라 콧등 위에 자국이 생겼다.

뻐근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부스스한 앞머리도 이마 뒤로 쓸어 넘겼다. 안경에 가려져 있던 맑고 깊은 새까만 눈동자 위로 전등 빛이 쏟아져 내렸다.

“큰일 났네. 내 비상금 어떡하지.”

이현의 얼굴 위로 한 겹 그늘이 더해졌다. 연희동에 있는 낡은 건물 지하에 이현이 그동안 합법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차곡차곡 모은 달러와 금괴, 마석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곳에 비상금을 숨겨 둔 건 수시로 좀비들이 침범하는 지역이라 다른 지역보다 건물값이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비상금만 있었다면 이현은 속이 쓰리기는 해도 포기했을 거다. 하지만 그곳에는 부모님의 유품까지 함께 있었다. 기숙사 안에 보관하기에는 여러모로 부피가 커 그곳에 둔 게 화근이었다.

“아티팩트로 감춰 둬서 다행이기는 한데…….”

이현이 안경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짐을 챙겼다. 좀비들에게 서대문구가 완전히 넘어가면 아예 출입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냥 몸에 지니고 다닐걸…….”

이현은 연구소 내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연구의 기밀상 연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게 원칙이었다.

외출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외출할 때마다 행정실에 가서 외출증을 끊어야 했다.

“이틀 전에도 써서 왜 쓰냐고 물어볼 텐데……. 으, 진짜 되는 일이 없네.”

이현이 유리 벽 가까이 다가가 울케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탁하게 풀려 있는 회색 눈동자가 이현의 손 위로 힘없이 따라붙었다.

“조금만 더 버티고 있어. 내일은 다른 약을 투입해 볼 테니까.”

좀비화된 울케라에게 인사까지 한 이현이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마스터키가 있는 연구소장을 제외하면 이현의 홍채와 지문으로만 반응하는 연구실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 위험한데…….”

이현이 가방 속에 있는 손바닥만 한 주머니를 꺼냈다. 복주머니처럼 생긴 건 외견은 평범해 보여도 공간 확장형 아티팩트였다.

한 평 크기의 공간이 연결된 것으로 무생물이라면 어떤 것이든 집어넣을 수 있었다.

이현이 석 달 치 봉급을 털어서 산 귀한 것이었다. 다만 전 재산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불안해서 아지트에다가 따로 비상금과 유품을 보관해 놨다.

새로운 아지트를 찾기 전까지는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답답했다.

“어? 김이현 수석 연구원님. 오늘도 외출증 끊으러 오신 거예요?”

“네. 외출증 좀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사유가 어떻게 돼요? 저번에는 치과에 들르신다고 했잖아요. 이가 아직도 아프신 거예요?”

“아니요. 오늘은 사야 할 책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되지 않아요?”

“배송비가…….”

“그렇죠. 연구원님 월급으로도 살인적인 배송비는 부담스러우신가 봐요.”

이현이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행정실 소속 직원 김하은은 친절한데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모든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살고 싶은 이현에게는 부담스러운 타입이기도 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무사히 외출증을 끊은 이현이 주차장으로 내달렸다. 달릴 때마다 무거운 안경이 벗겨질 듯이 들썩거려 한 손으로는 안경을 붙잡은 채였다.

“허억, 헉…… 이놈의 저질 체력…….”

매끈한 외양의 검은색 바이크에 올라탄 이현이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훑었다. 맨날 연구실 안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한 탓에 원래도 좋지 않던 체력이 더 나빠졌다.

“날 어두워지기 전에 다녀와야 해.”

몬스터든 좀비든 어두워지면 흉포함이 배가된다. 아직 해가 기울려면 서너 시간 정도 여유가 있지만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안정감 있게 바이크를 움직인 이현이 빠르게 종로구를 벗어났다. 서대문구와 연결된 지점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좀비에게 넘어간 지역을 제외하고 서울 전역은 여전히 인간들이 지키고 있었다. 불시에 열리는 게이트만 아니라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막혔네.”

이현이 정복을 입은 이들로 가득한 거리를 보고는 탄식했다. 검은색 정복을 입은 에스퍼들이 대다수였지만 하얀색 정복을 입은 가이드들도 보였다.

“진짜 상황이 긴박하기는 긴박한가 봐.”

가이드의 수는 항상 에스퍼에 비해서 부족했다. 대체적으로 거친 성격을 가진 에스퍼들도 가이드의 안전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투가 벌어져도 가이드는 철옹성이나 다름없는 대한민국 능력자 협회 건물 내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임무지까지 가이드가 따라 나왔다는 건 에스퍼들이 수시로 가이딩을 받아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개구멍은 어디에나 있지.”

길을 우회한 이현이 미리 알아 놓은 구석진 골목길로만 움직였다. 알파 팀이 전원 출동했다고 하더라도 서대문구 전체를 에워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좀비가 서대문구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건 서대문구를 감싸고 있던 결계 아티팩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게다가 제정신이라면 에스퍼도 아닌 사람이 좀비들이 출몰한 지역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에스퍼들은 서대문구에 들어온 좀비들에게 집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계가 있는 곳은 반투명한 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현을 태운 바이크가 골목길 구석구석을 돌아 마침내 결계가 희미해진 곳을 발견했다.

하지만 서대문구에 들어갔을 때 이현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눈 마주쳤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