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

크게 심호흡을 한 세진이 옷을 꿰어 입는다. 

그 모습들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눈도 깜빡이지 않던 진한이 세진에게 말했다.

"앉지."

진한의 말에 천천히 의자에 앉던 세진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리를 반대편으로 꼰 진한이 턱을 오른손에 받치고 물었다.

"어머니랑 산다지?"

갑작스런 질문에 세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한을 쳐다봤다.

"아버지는.. 최근에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엄마랑 그 애인이랑 같이 산다고?"

자신은 이 얘기를 진한에게 한 적이 없다. 그럴 시간도,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학원측에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 외에는 한 적이 없었다.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세진은 아무말 없이 진한을 쳐다봤다.

"대답."

진한은 세진의 조금은 날카로워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네."

진한은 예상하고 있던 답이 세진의 입을 통해 나오자 보기드문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잘됐군."

잘됐다고? 무엇이? 아빠랑 이혼하고 자신을 버린 어미가 그 애인과 같이 살자고 했을 때 거부하지 못한것이?

아니면, 자신을 낳아준 어미가 낳아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받아준 것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세진이 진한을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여태까지와는 다른 느낌을 품고 자신을 대하는 세진을 보며 진한은 왠지 모를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나와 같이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거지."

"뭐?"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입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지만, 세진은 그런 것 따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오늘 학원에 선생으로와서 자신을 놀래키더니, 화장실에서 자신의 페니스를 희롱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섹스를 했다. 물론 거부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그런 남자가 이제 자신과 같이

살자고 말한다. 제의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었다. 단지 평소에 자연스러운 말을 하듯, 그래. 남자가 좀 전의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와 다름없는 말투로 세진에게 [통보]하고 있었다.

세진은 흐려진 눈빛으로 진한을 쳐다봤지만 진한은 그저 입꼬리를 올려 세진을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몸상태도 몸상태지만, 진한의 말에 세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이 학원의 선생이고 박진한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 외에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자세한 사항들까지..

뒷조사라도 한 것일까. 세진은 깨름칙한 기분에 살풋 인상을 썼다.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나즈막히 인사를 해본다. 거실을 한번 둘러보던 세진이 자조적인 웃음을 띄며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가방을 침대에 벗어 던져두곤 제 앞머리를 한번 쓸어올린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져 자고 싶지만 제 몸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땀냄새와 정액냄새가 세진의 심기를 건들였다.

낮게 한숨쉰 세진이 욕실로 들어갔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샤워기의 물을 한참동안 맞고 서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차오른 생각들로 인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세진은 살풋 찡그리며 자신의 애널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중지 손가락을 구부려 천천히 그 속을 긁어냈다.

"흐윽.." 

이미 부어버린 애널에서 미약한 아픔이 피어 올랐지만 세진은 애써 무시하며 진한의 정액을 긁어냈다.

- 집에 가서 네 그 아랫구멍이나 잘 씻어 두라고.

욕실 한가득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 하다. 세진이 교실을 벗어나기 전, 진한이 비웃듯이 내뱉은 말이다.

세진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몸에 닿는 찬물 때문만은 아니리라.

세진은 자신의 입술을 한번 물었다 놓고는 샤워기를 잠궜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옷을 걸치고 나오자,

아랫층이 소란스럽다. 아마도 제 어미와 그 가증스러운 애인이 집에 왔겠지.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세진이었지만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역시. 거실 한 복판에서 그의 어미와 남자는 싸우고 있었다. 거실은 그녀가 던져버린 핸드백과 겉옷이 널부러져 있었고 그녀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 트리며 악을 질러댔다.

남자 쪽의 상태도 과히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엔 짜증이 감돌았지만 여자를 위해 참는 듯 했다.

그들은 세진이 내려온 것도 모르고 한참을 그 대치상태로 싸워댔다. 아니지. 세진이 내려온 사실을 알았을지도.

그만큼 자신의 어미는 세진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여자였고 남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세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만 좀 해!"

그제서야 남자가 힐끗 세진을 쳐다봤지만, 여자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모습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세진이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할말있어. 얘기좀해 엄마."

세진의 말에 여자가 세진을 쳐다봤다. 매섭게 치켜 뜬 눈이 세진을 닮아 있었지만 세진에게는 없는 표독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던 여자가 쇼파에 널부러지듯 앉았다. 

세진은 여자와 한 공간에서 오래있고 싶은 맘이 없었다. 세진은 제 어미에게 진한과 다름없는 투로 내뱉었다.

"나 집나가."

여자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세진을 쳐다 보았다. 세진은 어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나 나갈거야. 나가서 살거야. 엄마랑 더이상 살고 싶은 맘 없어."

"집을 나가겠다고?"

여자는 기가 막힌지 핫ㅡ! 하고 웃었다. 여전히 세진을 치켜뜬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가 물었다.

"나가면? 어디서 살건데? 니가 혼자 밥이고 청소고 할 수 있어?"

"살 데 있으니까 나가겠다는거야. 밥? 지금 밥이라고 했어?"

여자의 물음에 차갑게 일갈하던 세진이 말했다.

"나 어렸을 때 부터 혼자 밥해먹고 살았어. 

엄마가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붙어서 놀러 다닐 동안에 나는 .. 

어둠뿐인 이 곳에서 나 혼자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먹었어. 

그거 알아? 엄마 덕분에 나에겐 어둠이 공포가 됐어. 

집에 나 혼자 있는 날이면 불이란 불은 다 켜놓고 있었어. 

무서워서. 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날 잡아먹을까봐. 

살려달라는 말, 백번 천번 외쳐봐도 들어줄 사람 없는 이 집에서 

나 혼자 그렇게 죽어갈까봐."

세진은 자신의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며 숨이 거칠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세진을 말 없이 지켜보던

여자는 굳은 얼굴로 세진을 쳐다봤다.

"엄마는 그래. 아빠가 죽던말던 신경 안쓰고 있었잖아. 

엄마 품에 온갖 보석 갖다 받치는 남자들만 신경쓸 뿐이었잖아.

사실은 나도 죽었으면 하고 빌고 싶었던 거-"

짜악ㅡ!! 세진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끊겼다. 세진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여자는 

다시 한번 손을 올리지만 그런 세진의 모습을 보곤 천천히 손을 내렸다.

"네 맘대로 한번 해봐."

여자는 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핸드백을 집어 지갑을 꺼냈다. 현금 몇십만원과 카드를 세진에게 뿌리듯 

던지곤 아무런 미련없이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도 곧 여자를 따라 들어갔다.

제 앞에 떨어진 것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세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주섬주섬 돈과 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방문을 잠그고 세진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눈가가 뜨거웠지만 세진은 마음을 다잡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목록을 눌렀다.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지만 자신은 이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대로 통화를 누르려다 멈칫한 세진이 이내 심호흡을 한번 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흔한 컬러링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계적인 신호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받았습니다."

"........."

상대방은 전화를 건 사람이 세진인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목 안으로 큭큭 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래. 결정은 했나?"

".........."

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도 자신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곧 데리러 가지."

세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세진을 알고 있는지 진한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세진은 자신의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의 옷가지를 가방에 챙기기 시작했다.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돈들도 지갑에 잘 정리해 넣었다.

더 챙길 물건이 없는지 제 방을 한번 훑어 보았지만 마땅히 챙길 것은 없어 보였다.

세진은 짐 가방을 어깨에 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구겨 신고 자신을 낳아준 어미의

방을 쳐다보았지만 세진이 나갈 것을 알고 있는 여자는 매정하게도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다.

세진은 체념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현관문을 열었다.

전화한지 십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이미 집 앞에 있었다. 

그는 그를 닮은 잘빠진 재규어XF를 타고 왔다.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한은 느릿하게 차체에서 몸을 떼더니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세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세진과 진한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가방은 좌석 뒤편에 던져놓고 안전벨트를 맨 세진은 그 뒤로

눈을 감고 있었고 진한 역시 묵묵히 운전하고 있었다. 

차 안속의 침묵을 참지 못한 세진이 살며시 눈을 떴다. 힐끔 곁눈질로 진한을 쳐다 봤지만 진한은 

자신을 쳐다보는 세진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세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차가 부드럽게 정차하고 진한은 세진을 한번 쳐다봤다. 

내리라는 의미겠지. 세진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진한의 집은 고급 빌라였다.

진한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세진도 진한을 따라 들어갔다. 신발을 벗지 않고 현관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있자 진한은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현관에서 잘껀가. 개새끼처럼."

진한의 말에 기분이 상한 세진이 진한을 쏘아보며 크게 발소리를 내며 거실로 들어섰다.

그런 세진을 쳐다보는 진한의 입술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세진은 쇼파에 자신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진한이 세진의 팔을 가볍에 움켜쥐곤 세진을 방으로 끌고 갔다.

진한의 방은 아이보리색의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킹 사이즈의 침대나 탁자 위에 있는 스탠드,

큰 옷장 등이 있었다. 그를 닮아있는 방이었다. 반드시 필요한, 기본적인 물건들이 그의 방을 채우고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방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보단 모델 하우스를 그대로 데려온 듯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쉰 세진이 진한을 살짝 올려다 보았다. 

"제 방인가요?"

세진의 물음에 진한은 세진을 살짝 고개짓을 하며 말했다.

"그래."

"저 옷장 쓰면 되는 건가요?"

"음."

세진은 아직도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진한의 손을 조심스럽게 풀고 거실로 나갔다.

자신의 가방을 들고 방으로 돌아온 세진이 기세좋게 옷장 문을 열어 젖혔지만 옷장 한가득 들어 있는 정장이 

세진을 반기자 세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진한을 바라본 세진이 작게 인상을 쓰며 물었다.

"써도 된다면서요."

누가 뭐랬나? 라는 표정으로 세진을 쳐다보던 진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자

세진은 낮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넣을 데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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