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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61화 (61/65)
  • 61화

    예전에 세현이 집에 바래다주면서 그의 아파트를 지나친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세현이 정확히 몇 층에 사는지 몰랐고 이렇게 연락도 없이 가는 것이 걱정되었다.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세현이라면 날 반겨 줄 것 같아, 세현을 만나기 위해 그의 아파트로 향했다.

    1월의 밤은 차가웠다. 겁탈당하기 직전에 무작정 나왔기 때문에 겉옷을 챙기지 못했다. 숨을 쉴 때마다 유백색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세현의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경비원에게 세현이 사는 곳을 물어봤지만, 역시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도 추위에 떠는 내 모습을 보고 몸을 녹일 수 있도록 경비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는 나를 아는 듯한 눈치였다.

    “혹시 가이드님 아니신가요?”

    원래 S급의 신분은 기밀이었지만, 미국 게이트에 다녀오면서 신상이 풀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나는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군요. 차세현 에스퍼님은 아직 귀가 전이시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그렇게 경비실에서 30분 정도 기다렸지만, 세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경비실에 신세를 지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근처 호텔에라도 갈 생각이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감사했습니다.”

    “네, 가이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날씨는 추웠고 나오자마자 손이 붉어졌다. 얼굴 또한 필시 새빨갛게 얼었을 것이다.

    근처에 협회 호텔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추위 속에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검은 세단이 내 옆에 정차하더니 창문이 내려갔다. 그동안 기다리던 세현의 모습이 보이자 나는 그대로 그의 차로 뛰어갔다.

    “세현 씨!”

    “신의 씨, 왜 여기 있어요?”

    “저 세현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번에 여기 산다고 한 거 들어서요.”

    나는 고개를 뒤로해서 어느새 멀어진 아파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선 차에 타세요. 날씨가 많이 추워요.”

    “네…!”

    나는 세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추위를 피해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이 날씨에 겉옷도 안 입으시고. 무슨 일 있었어요?”

    “조금요….”

    세현에게 온 이상 성요한과의 일을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나온 걸 보니 가벼운 일은 아닌 거 같군요. 괜찮다면 저희 집에서 이야기하실래요?”

    세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그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신의 씨, 혹시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요?”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세현이 내게 물어 왔다.

    “아니요. 알레르기는 없어요.”

    “다행이네요. 저희 집에 동생이 있거든요.”

    “동생이요?”

    “네. 귀여워서 신의 씨도 좋아할 거예요.”

    세현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 데다, 동생과 알레르기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의 동생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마음이 더 컸다.

    “세현 씨 동생이라니 살짝 긴장되네요.”

    “긴장하지 말아요.”

    그렇게 세현과 함께 엘리베이터을 타고 그의 집으로 올라갔다.

    세현이 도어 록을 풀고 중문을 열자 어디선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가벼운 발소리에 복도를 보자, 작은 강아지가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강아지는 세현의 다리에 코와 몸을 비비다 내 쪽으로 와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제 동생, 구름이예요.”

    그제야 동생이 반려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동생이 있다는 게, 강아지 얘기였어요?”

    “네. 귀엽죠?”

    “너무 귀여워요.”

    이름처럼 구름 같은 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강아지였다. 각성하기 전, 공장에서 키우는 강아지들과 자주 놀았기에 그때처럼 무릎을 굽히고 구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구름이가 복도에 누워 배를 드러냈다.

    “구름이도 신의 씨가 좋나 봐요.”

    “안아 봐도 돼요?”

    “물론이죠.”

    나는 그대로 구름이를 품에 안아 들고 세현과 함께 이동했다.

    현태운의 집만큼은 아니지만, 세현의 집도 상당히 컸다.

    세현과 욕실에서 손을 씻고 거실로 이동하자, 그제야 그가 코트를 벗으며 물었다.

    “차 괜찮으시죠?”

    “네.”

    나는 세현이 차를 우리는 동안 구름이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세현의 성격을 반영한 듯한 깔끔한 내부였다.

    “그런데 이 밤에 왜 나온 거예요?”

    세현이 잘 우러난 차와 간단한 간식을 트레이에 담아 소파 테이블에 놓았다.

    “같이 사는 사람이랑 트러블이 있었어요.”

    “어떤 트러블이요?”

    나는 세현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마음이 너무나도 답답해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미국 협회가 제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는 걸 협회에서도 눈치챘어요. 그래서 협회 에스퍼가 제 감시역으로 함께 살고 있어요.”

    “신의 씨 의사도 묻지 않고 그렇게 진행했다는 겁니까?”

    “네.”

    세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세현의 반응에 조금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오늘 그 에스퍼가 각인을 시도했어요.”

    내 말에 세현은 놀란 듯했지만, 이내 더욱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변해 나를 바라봤다.

    “신의 씨, 나쁜 짓 당한 건 아니죠?”

    “네. 중간에 도망치고 여기로 온 거예요.”

    “다행이에요. 저도 같은 에스퍼지만, 그런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알아요. 세현 씨는 다르다는 거.”

    “신의 씨가 믿어 줘서 고맙네요. 그럼 오늘은 어디서 머물 생각이세요? 제가 호텔 잡아 드릴까요? 아니면 저희 집에 게스트 룸이 있긴 한데.”

    나 또한 고민이 되었다. 호텔에서 지내는 게 좋을지, 아니면 세현의 집에서 지내는 게 좋을지. 하지만 오늘은 세현의 집에서 머물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혼자 있으면 성요한이 능력으로 쫓아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괜찮다면 여기서 머물러도 될까요?”

    “당연하죠. 여기는 정부 소속 건물이라서 협회 에스퍼는 들어올 수 없어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쉬어요.”

    “고마워요, 세현 씨.”

    나는 차를 조금 마셨다. 따뜻한 찻물이 들어가자 얼었던 몸이 녹으며 점차 안정되었다.

    “전 신의 씨가 걱정되네요. 협회에 있겠다는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나요?”

    사실 세현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개입하면 일이 커질 거 같은 느낌에 결국 도와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우선은요.”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네.”

    나와 세현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자정이 훌쩍 지나 서로 잠자리에 들러 갔다.

    세현이 말한 게스트 룸으로 들어가는데 구름이가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내가 침대에 앉자 구름이도 침대 위로 올라오고 싶은지 계속 뛰었지만, 올라오지 못했다. 결국 내가 안고 침대 위로 올려 줬다. 그러자 구름이가 내 손을 핥았다.

    한동안 구름이와 놀아 주다, 같이 침대에서 잠들었다. 따끈한 강아지를 품에 안으니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바로 옆에서 자는 구름이를 보다, 거실로 나갔다. 거실과 이어진 주방에서 세현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의 씨, 잘 잤어요?”

    “네. 뭐 하고 계세요?”

    “아침 준비하고 있었어요. 뭇국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자리에 앉아 계세요. 식사 금방 준비할게요.”

    세현의 말에 자리에 앉아 식사를 기다렸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 자의로 나를 위해 식사를 차려 준 건 오랜만이었다.

    식탁에 세현이 만든 음식들이 하나둘씩 놓였다. 반찬들이 가지런하게 그릇에 담겨 있었다.

    이내 식사 준비를 모두 끝낸 세현이 내 앞에 앉았다.

    “신의 씨, 맛있게 드세요.”

    나는 잘 먹겠다고 말하며 뭇국부터 먹어 보았다. 세현은 요리 솜씨가 좋은지 맛이 좋았다.

    “맛있어요.”

    “다행이에요. 많이 먹어요.”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세현이 웃으며 자신 또한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요리 오래 하셨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많이 도와드렸어요.”

    “음식들이 다 맛있어요.”

    “신의 씨만 원하신다면 매일 요리해 드릴 수 있어요. 된장찌개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제가 만든 된장찌개 한번 맛보면 저한테 푹 빠져서 못 헤어 나올 거에요.”

    세현의 농담에 웃으며 마저 밥을 먹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걱정만 가득했는데, 어느새 성요한의 일은 잊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슬슬 나갈 준비를 했다.

    어제 결국 센터에서 잔 원재가 조금 전에 아침 훈련 때 만나자는 문자를 보내 온 참이었다. 우선 센터로 가서 원재를 볼 생각이었다.

    “이제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내 말에 세현이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저도 출근 시간이네요. 센터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잠도 재워 주셨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나는 세현의 배려를 받아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계속 신세만 지는 거 같네요.”

    “나중에 신의 씨가 비싸게 갚으면 되죠. 연봉 높은 거 다 압니다.”

    “다음에 거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세현의 차를 얻어 타고 센터로 향했다. 현태운과 성요한, 그리고 세현 모두 S급 에스퍼였지만, 모두 느낌이 달랐다.

    현태운, 성요한은 함께 있으면 불안했는데, 세현과 있으면 너무나도 평온하고 안정감을 느꼈다.

    머지않아 센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내려 주실 수 있으세요? 저번에 세현 씨가 태워다 줬을 때 경비원이 본 거 같아서요.”

    “알겠어요.”

    세현이 센터에서 살짝 거리가 있는 곳에 차를 정차했다. 저번에 세현과 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협회 경비원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 오해받았던 적이 있었기에,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세현과 헤어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차에서 내리기 전 세현이 재킷 안에서 카드 키를 꺼내 내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도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저희 집으로 와요. 카드 키예요.”

    “이렇게 막 줘도 돼요?”

    일단 그가 주는 카드 키를 받았지만, 불편한데도 억지로 참고 도와주는 중일까 봐 염려되었다.

    “신의 씨만 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간직하고 있을게요.”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지금은 카드 키를 받아 놓는 게 좋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제 세현의 집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제는 원재가 없어서 발생한 예외적인 상황이었고, 오늘은 원재와 함께 협회 호텔에서 자야 할 거 같다.

    “네. 그럼 들어가세요.”

    “어제 감사했습니다.”

    나는 다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세현의 차는 여전히 정차한 채 가만히 있었다. 아마 내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 같았다.

    그의 걱정을 느끼며 서둘러 센터로 갔다. 그런데 근처에서 현태운의 파장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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