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57화 (57/65)

57화

점심을 먹고 소파에 앉아 원재와 쉬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진동하는 걸 느끼며 화면을 보자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기에 전화 거부를 눌렀지만, 곧바로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잘못 온 전화는 아닌 것 같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 가이드님, 윤정호 박사입니다.

윤 박사라는 말에 살짝 놀랐다. 그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박사님, 무슨 일이세요?”

- 미국은 잘 다녀오셨어요?

“네. 잘 다녀왔어요.”

- 다행이군요.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말씀 나눴던 가이드 프로젝트에 관해서 다시 제안하려고 연락했습니다.

거절했는데도 또다시 제안해 오는 모습을 보니, 그만큼 내 도움이 절실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여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센터에 있을지 몰랐고, 프로젝트에 집중하기에는 현재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회귀 전 프로젝트를 하면서 몸이 악화되었던 기억이 있어서 마음에 걸렸다.

“저는 어려울 거 같아요.”

- 프로젝트에 신의 가이드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윤 박사는 거듭된 자신의 간곡한 부탁에도 내가 답이 없자,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해 왔다.

- 가이드님께서 무사히 협회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곧장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협회에 오랫동안 있었던 윤 박사님의 말이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정말입니까?”

- 네. 프로젝트에 참여하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윤 박사님의 말에 혹했지만, 그의 말을 풀어 보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면 퇴사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는 뜻이었다. 내가 미리 퇴사하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프로젝트이기에 이번에도 섣불리 승낙할 수 없었다. 윤 박사님도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 마음이 바뀌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그렇게 윤 박사님과의 통화가 끝났지만, 살짝 머뭇거려졌다. 우선 오늘 저녁에 세현을 만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 할 거 같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날에 세현도 내게 연락해 왔다. 잠깐 만나자고 하는 그의 말에 고민했지만, 결국 약속을 잡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협회를 떠나려면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 두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5시였다. 오후 6시에 세현이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았다.

세현은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멋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를 만날 때면 나도 차림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

외출복을 입고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던 원재가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형, 어디 가요?”

“약속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저녁 챙겨 먹고 있어.”

“누구랑요?”

현관으로 가는 내 뒤를 원재가 따라오며 물었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차세현 씨랑.”

“그 사람이랑 요즘 너무 자주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정부 사람인데…. 형 정말 정부 쪽으로 이동하는 건 아니죠?”

저번에 분명 아니라고 말했는데, 내가 세현과 자주 만나니 원재는 걱정이 되는 거 같았다.

“저번에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래도 요즘 센터에서 형이 미국이나 정부 쪽으로 이동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나는 원재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전과 같이 내 생각을 전했다.

“갈 생각 없어. 그리고 가더라도 원재 너한테 숨기지는 않을 거야.”

내 말에 원재는 믿는다는 얼굴을 해 보였지만, 여전히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알아요…. 전 형이 계속 협회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 미국이나 정부 쪽으로 갈 생각 없으니까.”

나는 원재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재차 말했다. 다행히 이번엔 원재의 얼굴에서 걱정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만약 가시게 되면 저도 꼭 데리고 가 주세요.”

“알겠어.”

원재와 함께 협회에서 나올 일은 희박했지만, 적어도 원재가 안심하길 바랐기에 알겠다고 답했다.

“형…. 약속해 주세요.”

원재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새끼손가락을 편 채 내밀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덩치는 나보다도 큰데 하는 행동은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애같이 뭐야. 걱정하지 말고 집 잘 지키고 있어.”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그의 손가락에 걸어 주지 못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더는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받아치며 신발을 신었다.

그런 내 모습에 원재의 표정이 다시 걱정으로 번져 갔지만, 그 모습을 외면하며 밖으로 나왔다.

***

아파트 정문 앞에 이제는 익숙한 세현의 차가 정차되어 있었다. 그의 차를 보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세현도 내 모습을 봤는지 차에서 내렸다.

“신의 씨!”

나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역시 세현과 있으면 반갑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일찍 오셨네요.”

“네. 타세요.”

세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매번 조수석을 열어 주는 그에게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늘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조수석에 앉자, 세현이 문을 닫아 주었다. 그리고 내가 안전띠를 매는 사이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가는 거예요?”

“신의 씨가 좋아할 만한 곳이요.”

세현은 차를 출발시키겠다고 말하며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회원제 레스토랑이었다.

“정말 좋은 곳 맞네요.”

“제가 좋은 곳 많이 데려간다고 말했잖아요.”

세현은 그렇게 말하며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개인실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곳은 S급 에스퍼와 가이드들만 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S급 전용 레스토랑이라니. 세현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평생 몰랐을 것이다.

여전히 내가 과거로 돌아온 이유도 S급이 된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 씁쓸하면서도 평안한, 이중적인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미국엔 잘 다녀왔어요?”

“네. 세현 씨 선물도 사 왔는데 깜빡하고 놓고 왔어요.”

“정말요? 제 선물까지 사 주시다니 기쁘네요.”

“큰 건 아니에요.”

“괜찮아요. 준비한 신의 씨 마음이 중요하니까요.”

세현은 정말 기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물었다.

“미국 게이트에서의 활약은 잘 들었어요. 미국 협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고 하던데.”

세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거둬졌다. 어떻게 세현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몰랐지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제의는 거절했어요.”

“협회를 떠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협회가 싫은 거지 한국을 떠나고 싶진 않아요.”

한국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미국에서 지내면서 알았다. 한국에서 사는 게 더 편하다는 걸.

“다행이네요. 해외로 가면 어쩌나 계속 걱정했어요. 협회와는 협의가 잘되었나요?”

“협의가 잘된 건 아니에요.”

협회가 내 비위를 맞추는 건 확실했지만, 퇴사만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신의 씨, 협회에서 나가고 싶은 거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로 돌아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협회에 들어온 것이었다. 협회는 배려해 주는 거 같으면서도 매번 자기들 입맛대로 사람을 굴리며 우습게 봤다.

“제가 도와줄까요?”

“세현 씨가 도와줄 수 있어요?”

“네. 대신 신의 씨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요.”

조건을 내거는 세현에게 살짝 실망감을 느꼈다. 아까 윤 박사님과 나누었던 대화도 떠올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단 생각을 했다. 나는 현재 S급 가이드였고 정부든 협회든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을 것이다.

“뭔가요?”

“몇 년 전에 제일 친했던 친구의 동생이 사라졌어요.”

“어디서요?”

“그게…. 그 아이가 협회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협회에 있다는 말에 놀란 나는 서둘러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뭔데요?”

세현이 내 말에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동 소리에 세현이 말을 멈췄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거절했지만, 다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원재였다.

이번에는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어쩐지 심상치 않아 세현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 중에 죄송해요. 잠깐 전화를 받아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의 말에 나는 전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대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원재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 형, 성요한 에스퍼가 형이랑 같이 살겠다고 집으로 찾아왔어요.

2